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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욜로회의 정착지는 꽤나 넓었다. 주변의 나무를 다 베어 널찍하게 만든 기도원이라 그런지 이곳만 뻥하니 뚫린 느낌이었다.

서원호는 기세등등하게 앞장서 나갔다. 준영이 같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어? 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오자 정착지를 지키던 보초들이 당황했다. 앞선 자를 보니 자기네 사람이었다. 적이 쳐들어온 것 같지도 않아 더 헷갈린 것이었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서원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초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눈빛으로 열심히 말했다.

“얘기하자면 길다. 곽주식네 사람들이니 회장한테 전달해. 이 사람들도 이제 여기서 지낸다.”

“네, 네.”

보초는 냅다 회장에게 달려갔다.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자자, 다 들어갑시다.”

서원호가 일행들을 이끌고 정착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널찍한 공터에 앉아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수십 명의 사람들이 왔으니 당연히 무슨 일인가 싶어 욜로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로 구경하며 어색한 긴장감이 맴돌 때, 일단의 사람들이 건들거리며 나타났다.

“뭐야 이것들은? 새로 잡아 온 사람들이야?”

“일꾼으로 쓸 놈들인가?”

온몸에 흉측한 장신구를 달고 촌스러운 가죽옷들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일반인이지만, 욜로회의 산적들이었다.

“이것들 뭐유? 새로 온 노예들인가? 낄낄.”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덩치가 큰 남자가 서원호에게 건들거리며 물었다.

“끼어들지 말고 가라.”

서원호가 턱짓을 하며 내보내려 했지만, 남자는 쉽게 떠나지 않았다.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집단이다 보니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서원호 정도의 각성자는 겁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보슈. 어디서 이렇게 잡아 왔수?”

“죽고 싶냐?”

서원호가 노려보자 남자도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같이 노려봤다. 주변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은용도 준영의 옷소매를 꽉 잡고 긴장했다.

“카악, 퉷!”

한참 동안 노려보던 남자는 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그래도 각성자니 더 안 건드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일반인인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충분히 가오는 잡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서원호는 겁을 줘도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냥 몸이 긴 멸치 일반인이 화내는 것처럼 보이니 어색한 것이었다.

“어휴, 내가 빨리 각성자가 되어야지. 진짜 드러워서.”

“큰 회장님하고 다음은 너 아냐?”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되면 아주 다 죽었어. 삐쩍 고른 놈들보다는 내가 피지컬이 좋으니 더 세지겠지?”

“그렇지. 일단 몸이 되어야 더 세지는 거지!”

“낄낄낄.”

남자는 자신의 무리들과 서원호가 듣도록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를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이 새끼들이…….”

서원호가 이를 갈았다. 준영과 은용,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쪽이 팔렸다. 가서 때려죽일까, 말까를 순간적으로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 회장과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가서 족치는 건 사실 자신이 없었다.

“야야, 꺼져. 꺼져.”

구경하던 정착 사람들을 뒤로 물린 남자의 무리가 털썩 주저앉는다. 어찌되었든 무슨 일인지 구경은 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욜로회의 산적들부터 일반인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방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구경하는 것이지만,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왠지 겁도 나고 긴장이 되어 전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뭔데! 뭔데! 비켜 봐라!”

갑자기 우렁찬 호통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의 고개가 전부 돌아갔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일부러 낸 소리가 아니라 타고난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갈라지자 그곳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곳의 회장, 조재도와 다른 각성자들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원호? 이게 뭔데? 주식이네 사람들이라고?”

조재도는 어색한 억양의 표준말을 쓰고 있었다.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었는데 배가 불룩 나와 있었다. 흔히 보는 아저씨 체형이었다.

밤톨 같은 얼굴형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뭉툭한 코와 고집스러운 입술을 갖고 있었다. 서원호의 말로는 멸망 전 다단계 회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 직업에 딱 어울리는 사기꾼 꼰대 이미지였다.

막상 회장인 조재도가 나타나자 서원호가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어쨌든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각성자고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위치다 보니 그 자연스러운 권위에 압박당한 것이었다.

“크흠, 흠. 욜로회에서 지낼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네가 뭔데? 그런데 괴물은 어디 있어?”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울렸다. 확실히 타고난 성량이었다. 그때마다 서원호가 움찔거렸다.

“괴물은 모두 죽었습니다.”

준영은 곽주식의 정착지를 떠나올 때, 괴물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곳에 도착해 필요하다면 다시 구할 생각이던 것이다.

“뭐? 왜? 그리고 곽주식이가 왜 사람들을 보냈는데?”

“저기, 그러니까…….”

“그런데 형님은? 형님은 어뎄는데?”

서원호는 정신이 없었다. 조재도가 상대방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내뱉었기 때문이다. 생긴 이미지 그대로였다.

“어, 그러니까 큰 회장님은…….”

“어디 있냐고!”

“히끅.”

불길한 기색을 느낀 조재도가 크게 소리 질렀다. 소심한 서원호가 깜짝 놀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내가 죽였다.”

대화를 구경하던 준영이 앞으로 한발자국 나서며 조용하게 내뱉었다.

“뭐라?”

조재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니, 지금 뭐라 했나?”

“내가 죽였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말하는 준영의 모습에 조재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가뜩이나 성질도 급한 그가 화난 것 이었다.

“이, 이 새끼가!”

조재도의 손이 올라갔다. 그가 준영을 치려는 것 같자, 서원호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잠, 잠깐! 잠깐만요! 회장님! 이분 A등급이십니다. 곽주식 패거리도 이분한테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뭐라?”

서원호가 외치자, 조재도의 올라간 손이 멈칫했다.

A등급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도 준영을 이길 수 없었다. 조재도는 다단계 회사를 운영하고 사기까지 칠 만큼 머리 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그만큼 남을 믿지 못하고 의심도 많았다.

“A등급이라고? 그런데 왜 우리 형님을 죽였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준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사이에도 쉴 틈 없이 마력을 뿜어내 탐색을 했다. 하지만 준영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도 되는 놈이라 죽였다.”

“으드득.”

조재도는 이가 갈렸다. 자신의 형을 죽인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형님이 잘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개차반이었으니까.

푹. 푹. 푹. 푹.

준영이 손짓하자 열 개의 창이 허공에서 생겨나 땅에 박혔다.

조재도와 그를 따르는 각성자는 총 열 명. 그 숫자에 맞게 창을 꺼낸 것이었다.

“너를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떠나라. 살려 주겠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그 말에 조재도는 온 얼굴을 씰룩거렸다. 열이 올라 얼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A등급이란 말에 함부로 덤비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 준영은 수틀리면 모두 다 쓸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서원호가 여기 있는 모두가 조재도의 뜻을 따르는 건 아니라고, 산적질에 가담하지 않는 각성자도 있다고 설득하였다.

은용에게도 물어보자 그녀는 정착지를 지킬 각성자가 있어야 안전하니, 나쁜 자들이 아니라면 남겨 두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한 서원호는 그들이 나쁜 놈들이긴 하지만, 곽주식만큼은 아니라고, 회장의 형이 특별히 더 나쁜 놈이었다며 그냥 곱게 보내 주자고 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자신을 받아 준 사람들이라 죽이는 것까지는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준영은 고민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줘 보기로 했다. 누나에게 물어보니 누나도 그러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은용은 어차피 인형 언니가 결정하는 데 뭐 하러 물어보냐고 혼자 궁시렁거렸지만.

으득.

조재도는 준영과 서원호가 자신을 헛된 말로 속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 해 두었다.

슬쩍.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번 덤벼 보라는 뜻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수하였다.

그는 신속의 능력을 가진 자였다.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기에 선공을 취하면 조재도도 쉽게 막지 못할 정도였다.

눈짓을 받은 그가 순식간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빨라서 아예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푹.

“꺽…….”

공중에서 복부가 창에 찔린 채 나타난 그는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냥 사라지자마자 공중에서 창에 찔린 채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헉.”

헛숨을 들이킨 조재도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정말 A등급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다. 떠나라.”

준영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창 아홉 개가 동시에 바닥에서 뽑히며 그들을 겨누었다.

“아, 알겠소.”

살기를 느낀 조재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소집했다.

회장이 포기하자, 그의 수하들도 별 수가 없었다. 건들거리는 수십 명의 일반인 수하들과 다섯 명의 각성자가 조재도를 따랐다. 다른 네 명은 이곳에 남기로 하고 준영과 서원호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리 서원호에게 언질을 받은 준영은 그들이 남는 것을 허락했다.

약간의 식량과 무기들을 챙긴 조재도 일행이 모였다. 그들은 떠나기 전, 준영과 남은 각성자들을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기어코 한마디 내뱉은 조재도가 휙 몸을 돌려 정착지에서 벗어났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한마디씩 내뱉고 침을 뱉으며 떠나갔다. 그들 입장에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정착지와 노예들을 뺏긴 셈이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싸우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회장과 그의 수하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남은 각성자들은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고 잘해 주거나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한 사람들뿐이었다. 이 사람들만 있어도 훨씬 살 만할 것이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함께 살 것이다! 조재도는 이제 이곳을 떠나고 없다!”

이번에도 서원호가 앞에 나서서 사람에게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사람들도 이내 그의 설명을 듣고 조금씩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조재도와 그의 패거리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와아아!”

한 명이 환호하자 이내 모두가 손을 들고 기뻐했다. 특히 조재도의 형이 죽었다는 말에 더 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욜로회란 추잡한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단장할 것이다!”

서원호는 ‘원호회’가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연설이 끝났고 이제 새로 온 사람들의 거주 공간을 정해야 했다. 또한 누가 리더가 되어 꾸려 갈지, 당장 식량과 필요한 것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등의 문제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준영을 바라보았다.

“음.”

잠시 생각한 준영은 은연중 사람들을 조금씩 이끌고 있던 김종문을 찾았다.

그는 준영이 자신을 찾자 부리나케 달려와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자 근래 만난 사람 중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 절로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음.”

눈앞의 김종문을 보며 한참 턱을 만지던 준영은 인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히잉, 나한테 물어보지. 맨날 인형 언니한테만 물어보구. 내가 더 대답 잘해 줄 수 있는뒈.’

은용이 맹랑한 생각을 하는 동안, 준영은 인형과 대화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다시 김종문 앞으로 걸어온 준영은 그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당신, 각성자가 된다.”

“네?”

김종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준영은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주로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들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