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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서원호는 이제 자신 있었다. 준영의 실력을 확실히 봤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회장과 그의 수하들이 모두 덤벼도 준영을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회장 개인의 실력은 곽주식과 비슷한 급으로 평가되거나 조금 더 낮았다.

애초에 회장의 형을 죽었기에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이제는 계획이 바뀌었다. 회장의 형을 죽인 준영과 회장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회장과 그 수하들은 이제 끝이란 것이었다.

‘그나마 좀 사람답게 사는 곳이 되겠네.’

준영이 회장 패거리를 정리한다면 자신이 이제 욜로회를 이끌면 된다. 자신과 남은 사람들은 살인을 좋아하는 악독한 사람들이 아니니 충분히 잘 이끌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서원호는 그렇게 혼자 욜로회를 집어먹고 대장이 되는 꿈을 꾸며 히죽히죽 웃었다.

일행의 이동속도는 느릿느릿했다. 다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괴물 육포 몇 개만 겨우 먹고 살다 보니 기력이 상당히 쇠한 상태였다.

“야영을 한다.”

준영은 해가 질 때쯤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의 걸음 속도가 워낙 늦다 보니 하루를 걸었음에도 절반도 오지 못했다.

“끄으응…….”

“에구, 죽겠다.”

다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욜로회는 산적 무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곳에 가려하니 걱정도 앞서 몸이 긴장되었다. 게다가 힘이 없는 상태에서 하루 종일 걸으니 몸이 금세 축났다.

준영은 인형에게 다가가 또 속삭였다. 뭐가 좋은지 중간중간 웃기도 했다.

‘에궁, 배고파. 오늘은 밥 안 주나?’

은용이 주린 배를 붙잡고 준영을 바라보았다. 점심 때, 사람들은 말린 괴물 육포를 먹었다. 자신도 몇 개 얻어먹은 게 전부였다.

준영은 점심을 먹지 앉고 그저 사람들이 먹는 걸 구경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은용도 얻어먹지를 못했다.

‘다음부터는 인형 언니한테 점심 좀 달라고 졸라야겠다.’

혼자 야무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준영이 다가왔다.

“저녁을 먹는다.”

“넵!”

은용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살짝 걱정도 됐다. 50명이 넘는 이 많은 인원 앞에서 밥을 어찌 먹을지 고민이 된 것이었다.

쿵!

“헐.”

쌀 한 가마니가 눈앞에 떨어지자 은용이 입을 쩍 벌렸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들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 벌리고만 있었다.

쿵! 쿵!

고깃덩어리들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쏟아졌다. 어찌나 많이 나왔는지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웅성웅성.

갑작스럽게 나타난 식량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입만 다시고 섣불리 덤벼들진 못했다. 준영이 각성자인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음…….”

준영은 갑자기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인형에게 또 말을 건다. 이번엔 대화가 잘 들린다.

“누나도 모른다고? 으음, 그래? 하하, 누나도 모르는 게 있구나?”

‘오랜만에 맛 갔네.’

혼자 또 미친 짓을 하는 준영을 보며 은용이 혀를 찼다. 사람들도 저게 뭐하나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은영.”

“넹.”

“사람들 몸이 좋지 않다. 갈비탕을 할 건데 누나는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아무렴요. 인형 언니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도 할 줄 몰랐다. 엄마가 해 주는 것이나 식당에서 먹어나 봤지 직접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에, 그러니까 갈비탕은요… 네? 갈비탕이요?”

은용은 뒤늦게 깜짝 놀랐다. 갈비탕이란 건 이제 먹을 수 없는 꿈의 음식인데 그걸 한다고 하니 놀란 것이었다.

“헉헉, 형님, 그냥 대충 넣고 끓이면 되지 않을까요?”

서원호도 잽싸게 달려와 침을 질질 흘렸다. 뜨끈한 고기와 쌀밥을 생각하니 입에서 침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었다.

“저, 제가 할 줄 아는디유…….”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무리 사이에 소심해 보이는, 나이 든 아줌마가 손을 들고 있었다.

“임자, 갈비탕 할 줄 알아?”

“저으기 멸망 전에 식당을 했었어유.”

사람들이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아줌마를 바라봤다. 다들 저 고기와 쌀이 자신들에게 올 것이란 걸 이제는 안 것이었다.

준영은 성큼성큼 아줌마 앞에 다가가 섰다. 각성자가 앞에 오자 겁먹은 아줌마가 고개를 잽싸게 숙였다.

“필요한 재료를 말하라.”

“그러니까 그게, 마늘하고 대파하고… 소금하고…….”

아줌마가 떠듬떠듬 재료를 말하자, 준영은 허공에 손을 휙휙 휘저었다. 그러자 재료들이 후드득 떨어져 눈앞에 펼쳐졌다. 요리를 할 수 있는 큰 통과 여러 도구들,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들까지 꺼내 주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물도 큰 통으로 수십 통을 꺼내주었다.

“알아서 요리를 해라. 몸에 좋은 갈비탕을 한다.”

준영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휙 둘렸다. 이제 저들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그때, 아줌마의 작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 이건 돼지 갈빈디… 등뼈도 아니라서… 갈비탕은 쇠갈비로…….”

준영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은 그냥 여러 고기 중에 갈비를 구매해 꺼낸 것이었다. 갈비탕이 무슨 고기인지도 잊고 살았다. 아줌마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럼 돼지갈비탕을 할게유.”

걸음을 멈추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나마 준영을 아는 은용이 배꼽을 쥐고 깔깔거리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돼지갈비는 구워 먹고 소갈비를 또 꺼내서 하는 건 어때요? 또 만들 수 있어요?”

끄덕.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소갈비를 잔뜩 꺼내 주었다. 구워 먹을 수 있는 불판도 여러 개 꺼내 주었다.

“알아서들 요리해라.”

“와아아!”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신나서 환호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었다. 다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몇몇은 주변에서 땔감이 될 만한 것들을 구해 왔고 몇 명은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대장 노릇을 하고 싶은 서원호가 또 앞에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훈수하기 시작했다.

다들 신이 나서 요리 준비에 한창이었다. 큰 통에서 갈비탕이 보글보글 끓으며 고기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오랜만에 맡는 요리 냄새라 그런지 모두에게 엄청난 자극으로 다가왔다. 고소한 냄새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식욕을 동하게 하였다.

한쪽에서는 불판에 구워지는 돼지고기 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퍼졌다. 결국 못 참은 몇몇 사람들이 다 익기도 전에 게걸스럽게 주워 먹기 시작했다.

“아니, 다 구워지면 먹어야지!”

“다 같이 먹어야지, 이게 뭔 짓이람!”

“에라, 모르겠다.”

당연히 난장판이 됐다. 간도 양념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집어 먹었다.

“천천히 드세요! 아직 많이 있어요!”

은용이 그릇을 들고 갈비탕을 담아 여기저기 뛰어 다녔다. 요리는 잘 못하니 허드렛일이라도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제 음식에 여유가 있다는 걸 안 사람들이 오랜만에 맛보는 따뜻한 국물을 음미하면서 먹었다. 자신은 먹지 않고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아이한테 먼저 먹이는 부모도 있었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돌보는 부모가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저 부모는 상상도 못할 모진 고생을 했을 것이다.

준영은 가만히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식 하나에 우는 사람, 음식 하나로 웃는 사람, 그 와중에 입이 터지도록 음식을 구겨 넣는 사람. 자신보다 어린아이에게, 혹은 늙은 사람에게 먼저 음식을 권하고 먹여 주는 사람.

저 작은 무리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눈에 담고 있었다.

서원호는 대장 노릇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무리에 껴서 미친 듯이 먹고 있었다. 역시 음식 앞에는 각성자고 뭐고 없었다.

은용은 땀을 흘리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먹지도 않았으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자요. 아저씨도 드세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은용이 갈비탕 한 그릇을 가지고 와 준영에게 내밀었다.

“음.”

준영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은용도 옆에 앉아 코를 박고 마구 먹어 댔다.

“아, 배부르다. 꺼억.”

“더럽다.”

“눼눼.”

은용이 배를 쓰다듬으며 거하게 트림을 하고 이를 쑤셨다. 나중에는 손가락까지 빠는 것이 어지간히 맛있던 모양이다.

“보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 때문에 기뻐하고 있어요.”

“누나가 시킨 것이다.”

“그래도 아저씨가 음식들을 꺼내 줬잖아요? 언니랑 아저씨 때문에 좋아하는 거죠. 손만 휘저어도 음식이 나오다니 대단하다니까요. 헤헷.”

“음.”

준영은 자신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예전에는 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그런가…….”

“그럼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대단한 거예요.”

사람들에게 주는 도움이란 것에 준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은 그저 누나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왠지 기분이 묘했다.

다들 배가 부른지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몇몇은 주변을 정리하고 몇몇은 남은 고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숨겼다.

잠시 후, 몇몇 사람이 준영에게 다가왔다. 김종문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종문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준영에게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본 떨어져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준영에게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음.”

그게 왠지 불편한 준영은 고개만 까닥이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은용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흐흐거렸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주섬주섬 땔감들을 모아 불을 폈다. 원래 밤에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하지만, 은용과 서원호가 괜찮다고 하니 마음을 놓고 피운 것이었다.

은용은 또다시 준영에게 부탁해 수십 장의 모포를 얻어 내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니 사람들은 그녀에게 연신 인사를 해 댔다.

“에, 제가 아니라 저 아저씨가 주신 거예요.”

은용은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준영 덕분인데 사람들이 자신까지 칭찬하니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다들 불 옆에 옹기종기 모여 모포를 깔고 잠이 들었다. 세상이 멸망한 이후, 오랜만에 맛보는 따뜻한 잠자리와 평화였다.

이튿날, 사람들은 새로 생긴 각자의 식기들을 챙기고 다시 이동하였다. 이동 중 괴물 몇 마리가 나타났지만, 서원호가 나서서 정리할 정도로 소수였다.

이동속도가 느려 이틀 정도를 더 걷고 나서야 일행들은 야트막한 산 중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여러 건물들과 각종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산속에 있는 건물들은 멸망 전에 특정 종교의 기도원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서원호가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욜로회의 정착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