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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명백한 협박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먹이로 줘 버리겠다는 뜻이다.

‘으으…….’

은용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떨고 있었다. 준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제 아예 눈을 감고 음식 씹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빼고 다리 한쪽을 바깥으로 돌렸다. 여차하면 일어나 뛸 생각이었다.

‘놓고 가야겠지? 괜히 싸웠다간 나도 죽는다.’

서원호도 슬슬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두뇌가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해. 잡히면 평생 여기서 못 벗어나.’

‘어쭈? 도망갈 눈치인데? 형님이 방해하면 붙잡기는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준영이 방해한다면 은용은 무사히 도망갈 수는 있을 것이다. 준영은 그 뒤에 도망가면 될 테니까. 문제는 자신이었다. 만약 은용을 놓친다면 괜히 자신이 화를 입을 수 있었다.

‘아저씨가 막아 줄까? 다들 가만히 있으면 금방 붙잡힐 텐데.’

그래도 혹시 막아 주지 않을까 기대는 해 봤다. 각성자이니 실랑이 좀 하다가 준영도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희망 회로를 돌렸다.

‘어떻게 하지? 형님이 만약 싸운다면? 나는 전력에 도움이 안 되니까… 5대 1? 형님이 진짜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쫄아서 지금 나한테 하라고 한 거 아냐? 아니지. 어쩌면 시험일수도? 그래도 정말 싸우면 자신 있나? 에이씨, 어쩌란 거지?’

‘내가 도망가면 아저씨랑 원호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잡혀서 괴물 밥이 되나? 아니, 그래도 어떻게 여기서 살아. 난 못 해. 못 살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맹렬하게 두뇌를 돌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곽주식 입장에서는 아예 나까지 죽여 버리면 아무도 모를 테니 욜로회와 불편한 관계가 안 생길 거라 생각할 수도 있어. 순순히 내놓고 바짝 엎드려야 한다. 여차하면 밑으로 들어가야 해.’

‘일단 최대한 도망가야 해. 아저씨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저씨들이 날 먼저 버린 거니까. 양심이 있으면 앞에서 실랑이라도 해 주겠지. 만약 잡혀도 날 원하니까 죽이진 않을 거야.’

“답이 너무 늦는데? 응?”

곽주식이 일어나 수레로 다가갔다. 강철이 엄청나게 두꺼운 수레였다. 어지간한 두께는 괴물이 그냥 뜯어 버리고 나오니 최대한 두껍게 만든 것이었다. 이 정도도 사실은 위험했다. 하지만 괴물의 목과 몸에도 굵은 사슬들이 메여 있어 괜찮아 보였다.

카아악!

곽주식이 괴물을 쓰다듬으려 하자, 그것은 시체를 먹다 말고 창살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그를 물려고 달려들었다.

퍼억!

카악!

곽주식이 마력을 담은 주먹으로 강하게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괴물이 주춤주춤하며 주저앉았다.

괴물은 죽을 때까지 적에게 덤벼드는 것이 본능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다른 모습에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크큭, 그래, 예쁘다. 어때? 신기하지 않아? 새끼 때부터 키워서 그런지 점점 길들여지고 있어.”

뭐가 좋은지 그는 연신 낄낄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빨리 결정 안하면 전부 먹이로 줘 버리겠다.”

‘흐윽!’

‘젠장!’

두 사람의 굳은 얼굴이 마주쳤다. 이제 결정을 해야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땀이 비 오듯이 줄줄 흘렀다.

잔뜩 긴장해서 상기된 얼굴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남을게요.”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망갈 거 아니었어?’

‘날 넘기는 게 아니야?’

서로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서로의 입에서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클클, 여자 쪽이 더 현명하군. 원호 네 대답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지.”

기분이 좋아진 곽주식이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서원호는 도박을 걸어 본 셈이었다. 준영의 등급에 대해 아직도 긴가민가하지만, A등급이라 생각하고 질러 본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준영의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 때문이었다. 자신은 약해서 여기저기 눈치를 본다. 그래서 약자의 행동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준영이 정말 겁을 먹었다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겁먹은 거 같지 않아.’

서원호는 은용처럼 준영을 완전히 미친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냉정하게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다 버리고 도망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일단 준영에게 걸어 보고, 안 되면 바로 도망갈 생각인 것이었다.

은용은 반대였다. 준영이 갑자기 얌전해지자 미친놈 특유의 ‘강자 앞에서 정상인 되기’가 발동됐다고 생각했다.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고 도망가면 두 사람이 괴물 먹이가 될까 봐 걱정된 것이었다.

어차피 도망가 봤자 밖에서는 혼자 생존하기도 힘들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곽주식이라도 꼬드겨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대, 대신 여기 두 사람은 그냥 보내 주세요.”

은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기로 마음의 결정은 했지만, 무서운 건 여전했다. 게다가 자신이 질리면 분명 다른 여자들처럼 괴물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거나 부하들에게 넘겨질 것이었다.

“큭큭, 그래. 보내 줘야지. 굳이 피곤하게 손쓸 필요는 없으니까.”

“잘, 잘해 주실 거죠?”

“그럼, 그럼. 이렇게 예쁜 여자는 잘해 줘야지. 아주 아껴 주도록 하지. 큭큭.”

곽주식이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사실 그의 정착지에 예쁜 여자는 별로 없었다. 가끔 나가서 소규모 일행이나 정착지가 있으면 반항하는 자는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이 차지했다. 그래도 예쁘고 잘 꾸민 여자는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고, 젊고, 옷까지 잘 차려입은 여자가 왔으니 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지는 것이었다.

은용은 어떻게든 곽주식을 잘 꼬드겨서 조금이라도 착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착각하는 ‘내가 이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해 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그거 아니면 방법이 없으니까.

“끄응.”

서원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나름 용기를 내고 준영에게 걸어 본 것인데, 준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은용이 스스로 남겠다고 나섰다.

각성자인 자신도 머리를 한참 굴리고 제대로 덤비지도 못했는데, 용기 있게 나서고 자신들까지 보내 주라는 그녀를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괴물은 내가 지참금으로 조금 더 주도록 하지. 회장한테 고맙다고 전해. 크크.”

“그, 그래…….”

곽주식이 선심을 쓰듯 말하며 웃었다. 그는 지금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괴물 두세 마리는 더 줄 용의가 있었다.

“자, 밥 다 먹었으면 이제 나가 봐. 괴물은 내일 아침에 받아 가고. 잘 쉬도록 해. 밤이 심심할 거 같으면 우리 여자라도 붙여 줄까? 좀 더럽긴 한데 그것만 참으면 돼. 크크큭.”

“낄낄낄.”

곽주식의 말에 옆에 있는 부하들도 웃었다.

“돼, 됐어. 가 볼게.”

“그래, 빨리 가 봐. 난 이 아가씨하고 몸으로 대화를 좀 나눠야겠어.”

그는 지금 욕정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거사를 치룰 생각이었다.

괜히 주눅 든 서원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혀, 형님, 가시죠.”

“음.”

그때서야 준영은 식사를 끝마쳤다. 너무 천천히 먹어 남들보다 오래 걸린 것이었다.

드륵.

준영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은용의 볼이 뾰로통하게 부어올랐다.

‘아저씨 정말 무서워서 그냥 가는 거야? 미워…….’

그래도 잠깐이지만 든든한 보호자였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겁먹고 그냥 가 버리는 게 조금은 속상하고 서운했다. 저 성격에 인사도 안하고 그냥 가 버릴 거 같았다.

“아, 저 시체인지 마네킹인지 하는 것도 빨리 가져가고. 거, 이상한 취미네 그래.”

“살아 있는 사람은 싫은 게 아닐까요? 크큭.”

“낄낄낄, 우리도 그런 놈은 없는데 저거 대단하네.”

곽주식과 부하들이 낄낄대며 웃는다. 준영은 그 말에 잠깐 움찔했지만, 예전처럼 바로 발광하지는 않았다.

‘아저씨, 인형 언니 얘기하는데도 가만히 있고… 정말 겁먹은 거 맞구나…….’

준영이 겁먹어서 가만히 있다는 게 끝까지 안 믿기던 은용도 그 모습엔 고개를 숙였다. 괜히 눈물도 차올랐다. 왠지 초라해 보이는 준영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잘해 준, 가장 강한 각성자였으니까.

“가, 가시죠.”

서원호가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하지만 준영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성큼성큼 인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낮춘 뒤 남들이 들리지 않게 인형에게 작게 속삭였다.

“얼레? 저거 뭐하는 거야? 크큭, 저 나무토막 같은 거하고 대화하는 거야? 저거 미친놈 아니냐?”

곽주식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빙빙 돌리며 웃었다. 옆에 있는 부하들도 같이 한참을 웃어댔다. 하지만 준영은 신경도 안 쓰고 계속 인형에게 속삭이며 중간중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야야, 이제 재미없다. 미친놈 데리고 빨리 나가라.”

곽주식이 눈을 부라리며 서원호에게 손짓했다. 빨리 꺼져 버리라는 뜻이었다.

“아가씨는 일루 와 봐.”

은용이 머뭇거리자, 곽주식이 다시 눈을 부라리며 재촉한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큼직한 손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잡아당긴다.

“꺅!”

“어허, 왜 놀라고 그래.”

곽주식이 능글맞게 웃으며 은용을 껴안고 옆에 낀다. 은용은 눈을 꼭 감고 인상을 썼다. 짐승 같은 악취가 풍겨 왔고 겁이 났기 때문이다.

“자자, 아가씨는 이제 나랑 놀자고.”

“저, 저기 다른 사람들도 내보내야…….”

앞으로의 일을 각오한 은용이 최대한 고개를 뒤로 당기며 말했다.

“크큭, 내 부하들은 괜찮아. 같이 놀 거걸랑.”

“네? 시, 싫어요!”

은용이 곽주식의 품 안에서 싫다고 발버둥 쳤다.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어허, 오빠 취향이 좀 그래. 다 이유가 있으니 네가 이해해라. 낄낄낄.”

주변의 부하들도 욕망이 가득 찬 눈으로 웃었다. 자신들의 보스가 이런 취향이라서 참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은용은 싫다며 빠져나오기 위해 계속 발버둥을 치지만, 그것마저도 곽주식에게는 앙탈로 보였다. 욕정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왔다.

“뭐해! 빨리 안 나가? 죽고 싶어?”

머뭇거리는 서원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 알겠어. 형님, 가시죠.”

서원호가 잔뜩 겁먹고 말할 때, 준영은 인형과의 대화가 끝났는지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주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은영은 데리고 간다.”

메마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아저씨!’

은용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

곽주식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쏙 빼고 준영을 바라봤다. 주변의 부하들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사람들도 데리고 간다.”

“이 새끼가 미쳤나.”

“그냥 죽여 버리죠.”

곽주식의 부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손을 봐 줄 심산인 것이었다.

“혀, 형님. 다섯 명입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서원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준영이 양손을 뻗어 펼쳤다.

“저 새끼, 저거 뭐하는… 으헉!”

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의 양손에 두 사람이 빨려 들어와 목이 잡혔다.

으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준영이 손을 놓자, 두 사람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부들거리더니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준영의 메마른 음성이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이제 세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