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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정말요?!”

은용이 반색하며 말하자, 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한다.”

“언니, 고마워요! 오빠, 고마워요!”

은용이 기뻐하며 인형 언니한테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서원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내일 아침에 떠날 테니 짐을 싸 두라고 해라. 원하는 자는 모두 데리고 간다.”

준영은 그 말을 끝으로 휠체어를 끌고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은용은 천막의 환자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전달을 해 주었다. 사람들은 연신 그녀에게 고맙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잠깐 나 좀 봅시다.”

기뻐하는 은용을 끌고 서원호가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왜요오?”

은용이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서원호는 머리를 다시 재차 긁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누님 미쳤어요? 저 사람들을 욜로회로 데리고 가자고요? 다 죽고 싶어요?”

“그, 그게 왜요…….”

서원호의 박력 있는 말에 은용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을 연신 꼬는 것으로 보아 바짝 주눅이 든 거 같았다.

“저 사람들 데리고 가면 우리 다 죽어요! 곽주식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그, 그래도 아저씨가 강하니까…….”

“강하죠. 그래요. 강해요. 그런데 얼마나 강한데요?”

“괴물 100마리도 넘는데 쉽게 죽였잖아요…….”

“그 정도는 곽주식도 해요! 그리고 설사 형님이 곽주식보다 강하다고 해도 얼마 차이 안 날 겁니다. 둘이 싸우면 형님이 이길 수도 있겠죠. 저도 형님이 이길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옆에 네 명은요?”

“그, 그러니까…….”

은용은 할 말이 없었다. 막연히 준영이 강한 줄만 알지 정확히 어떻게 얼마나 강한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일반인이다 보니 당연히 서원호보다 보는 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누님은 일반인이고, 저는 E등급이에요. 저 네 명 중 하나도 감당 못해요. 결국 형님 혼자 다섯 명이랑 싸워야 하는데,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일반인이란 말이 은용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그녀는 힘이 없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누님, 일반인이 이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은 사치예요. 오만한 겁니다. 그런 행동은 모두 죽이는 행동이에요.”

서원호의 말에 은용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도 며칠 전까지 벌레처럼 살다가 준영을 만났다. 그의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하니 너무 나댄 것 같고 창피한 것이었다.

“저, 전 그냥…….”

은용은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순수한 행동이 이런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생각하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여기에 내버려 두면 그래도 더 살 겁니다. 그런데 데리고 가면 그날로 당장 다 죽어요. 아니, 그것보다 형님하고 누님하고 나까지 전부 다 죽는다고요.”

“아, 아저씨가 혹시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은용은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자신이 본 각성자 중 준영이 가장 강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그냥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가장 잘해 준 각성자니까. 각성자들끼리 서로 얼마나 강한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곽주식이는 그 큰 괴물도 어쩌면 혼자 잡을 겁니다. 중급 천사요. 형님이 그거 잡는 거 봤어요?”

도리도리.

은용은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많이 잡을 수 있으니 막연히 강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럼 많이 쳐 줘도 비슷한 거예요. 그런데 네 명이나 더 있어요. 우리 다 죽어요. 전 싸우면 무조건 도망갈 겁니다. 그리고 욜로회에 운 좋게 데리고 가도 형님은 회장 형을 죽였어요. 거기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거기는 저 빼고도 열 명이에요. 형님이 이길 거 같아요?”

은용의 고개는 완전히 숙여졌다. 현실 파악을 못하고 사람들에게 괜한 희망을 준 거 같아 미안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님, 제발요. 각성자가 아니라서 모르나 본데 각성자들 대부분은 일반인들 사람 취급도 안 해요. 그냥 노예예요, 노예. 그 사람들 재산이라고요. 절대 그냥 뺏기지 않아요.”

은용은 가슴이 아팠다. 각성자에게 직접 들으니 더욱더.

“원호 아저씨도… 우리가 노예 같아…요?”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자신이 요새 너무 주제넘게 나댄 것이 맞았다. 예전 같으면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 붙일 존재들에게 이렇게 대화도 하고 있었다.

“크흠, 전 아닙니다. 전 예전 대장한테 그렇게 안 배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너무 위험하게 설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차가운 그의 말에 은용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위치를 새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사람들한테는 제가 다시 말해 볼게요.”

“누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요. 각성자도 잘못하면 죽어 나가는 세상입니다. 남을 위해 힘을 쓰는 건… 그러니까, 예전에 말한 우리 대장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전까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주변 눈치보고 살 수밖에 없어요. 그게 살아남는 길입니다.”

“…네.”

“누님하고 형님 모두 살려면 그래야 해요. 전 싸움 나면 무조건 도망갈 겁니다. 정 안 되면 곽주식 편에라도 설 거예요. 전 죽기 싫으니까요.”

“…알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서원호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은용은 한참을 자리에 남아 애꿎은 바닥의 돌만 발로 툭툭 쳤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한 그녀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왔다. 숙소라고 해 봤자 냄새 나고 낡은 침대와 거미줄이 잔뜩 붙어 있는 창고 같은 방이었다.

“풉.”

갑자기 웃음이 났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 여겼을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곳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자신이 준영 때문에 잠깐 주제를 잊은 것이 맞았다.

자신은 그들에게 노예 같은 존재였다. 기라면 기고, 벗으라면 벗는. 그리고 선심 쓰듯 던져 주는 괴물 육포 쪼가리 하나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존재.

‘나도 각성자가 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준영은 자신을 각성자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들과 다른 각성자가 될 수 있을까. 그때도 서원호처럼 힘이 부족하다고 많은 것들을 외면하며 피해 다니지 않을까.

‘하아, 뭐라고 얘기하지…….’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몰래 숨죽이고 있을 것이었다. 각성자가 자신을 데리고 나갈 것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다. 누가 더 강한지 아닌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각성자가 데리고 가 준다니, 욜로회가 세력이 더 크고 거기서 온 각성자가 있으니 되는 줄 알고 기대할 뿐이었다.

‘어떡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고민해 보지만,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도무지 가서 말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는데 벌써 저녁이 다가왔다. 배가 고파질 때쯤, 곽주식이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보스가 부른다. 모두 따라와라.”

일행은 곽주식의 처소로 이동했다. 서원호와 은용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지만, 준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녁이나 먹자고 불렀지. 할 말도 있고.”

곽주식이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기를 권유했다. 식탁에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각종 야채들과 보기 힘든 통조림까지 있었다.

“으음.”

은용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서원호도 마찬가지다. 각성자긴 하지만, 식량이 항상 부족하고 서열이 낮다 보니 이런 음식보다는 괴물 육포를 더 많이 먹었다.

“자자, 어서 먹어. 편히 먹자고.”

전혀 편하지 않은 분위기지만, 일단은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준영이 가장 끝에 앉고 서원호와 은용이 마주 보며 앉았다.

‘젠장, 맛있잖아.’

은용도 이런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곧 본능적으로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서원호도 열심히 먹었다. 이런 음식은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 했다. 그게 지금 세상의 현실이었다.

준영도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먹었다.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직접 자연에서 채취한 음식을 먹는 건 그도 아주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저분은 안 먹나?”

곽주식이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인형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어, 윽, 아, 안 드신데요. 속이 좀 안 좋아서.”

은용이 번쩍 고개를 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곽주식은 계속 비웃는 표정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먹든 말든.”

이윽고 은용과 서원호가 다 먹고 고개를 들었다. 급하게 먹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먹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어색함만이 가득했다. 준영만이 천천히 계속 먹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다 먹은 것을 본 곽주식이 은근히 입을 열었다.

“뭐, 안 좋은 소문이 들리던데…….”

“딸꾹.”

두 사람은 동시에 딸꾹질을 했다. 괜히 무서워진 것이다.

곽주식은 그런 건 별거 아니란 듯이 넘어가며 말했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내일 아침에 괴물들 데리고 갈 때 말이야. 저 여자는 여기 두고 가지.”

“뭐?”

“네?”

서원호는 놀라 곽주식을 쳐다보았고 은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달 떨기 시작했다.

“요새 참 보기 드문 미인이야. 복장도 마음에 들고 말이지. 킬킬.”

“낄낄낄.”

곽주식의 말에 옆에 있는 각성자들도 웃는다.

“아니, 우리 사람인데 왜 그래? 그냥 곱게 보내 주지 그래? 관계 어색해지잖아?”

“놓고 가.”

곽주식이 웃음을 거두고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서원호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좆됐다!’

욜로회 회원인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곽주식은 회장의 여자도 아니고 각성자도 아니니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서원호의 여자라 착각한 것이었다. 설사 정말 중요한 회장의 여자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과 싸우지는 않을 테니까.

“저, 형님 이게 어떻게…….”

“네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해라.”

서원호의 말에 준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말했다.

‘젠장, 쫄았네. 쫄았어! 확실하군. 여기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거야.’

‘뭐야! 아저씨 완전 실망이야! 진짜 무서워서 나 버리는 거야?’

은용 입장에서는 황당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미친개처럼 날뛰다가 여기서는 자신을 놓고 가라는 데 얌전했다. 역시 미친놈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갑자기 정상인이 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은용은 울상으로, 서원호는 똥 씹은 표정으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놓고 가야 하나? 형님도 못 이길 거 같으니 나한테 떠넘긴 거 같은데…….’

‘사람들을 정말 데리고 가지 못하겠구나. 흑, 아저씨도 못 이기는 거였어.’

두 사람이 한참 고민하자, 곽주식이 고갯짓을 했다. 곧 옆에 있던 각성자가 아주 큰 수레를 끌고 왔다. 천으로 덮여져 있는 수레지만, 두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악취와 짐승의 울음소리. 바로 괴물이었다.

“으허헉!”

“꺄악!”

천을 걷자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괴물보다 조금 작은 체구의 괴물이 사람을 뜯어 먹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곽주식이 비열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애기가 살아 있는 것만 좋아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