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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물론 속으로만 한 생각이었다. 준영 때문에 저 여자도 위험 요소나 다름없었다. 건드리지 않고 모른 척 하는 게 좋았다. 일단은 누님으로 모시기로 했으니까.

“오빠, 오빠, 오늘 저녁은 뭐예요?”

그녀의 아저씨였다가 호칭이 바로 오빠로 바뀌었다.

준영은 아무 말 없이 뽕라면을 꺼내 들었다.

“헤헤, 맛있겠다.”

“응?”

서원호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라면이 나왔단 말인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라면은 자신도 못 먹어 본 지 꽤 됐다. 그냥 부숴 먹기만 해도 맛날 거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물건들을 보자 라면 생각은 머리에서 싹 지워져 버렸다.

“뭐, 뭐야…….”

“으헤헤헷.”

은용은 그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웃어 댔다. 하지만 서원호는 비웃냐고 반박도 하지 못했다. 준영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신기한 물건들이 튀어나왔으니까.

‘뭐, 뭐지? 마법사 같은 건가?’

텐트에 간이 샤워 부스까지 나오자, 서원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서원호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라면을 먹고, 샤워를 하고, 텐트에서 편히 눕는 호사를 누렸다.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누워 있는 내내 혼란스러웠지만 그것도 이내 잠시, 오랜만의 깨끗하고 편한 잠자리에 그냥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음냐, 이건 꿈이야. 꿈…….’

서원호가 코까지 골며 자는 동안, 은용은 모포를 잡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언니, 언니, 나도 정말 각성자 되는 거라니까? 미소녀 각성자 등장!”

은용은 오늘 있던 일 때문에 흥분이 되어 쉬이 잠들지 못했다. 옆에 인형 언니를 눕혀 놓고 쉴 새 없이 짹짹대며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각성자가 된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아주 멋지고, 예쁘고, 아름답고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신나 죽겠는 것이었다.

한편, 준영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언제나처럼 뇌를 잠식하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각자의 상념과 생각들이 가득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

서원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이런 게 가능한가? 속박 능력이 아닌가? 다중 능력자?’

듣기로는 아공간 수납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했다. 혹시 그런 쪽 능력인가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기에는 나오는 물건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알아서 무엇 하리…….’

“이동한다.”

준영은 멍 때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다.

“넵!”

서원호는 상념을 멈추고 바짝 일어나 바로 움직였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어제처럼 쥐어 터지고 싶지 않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서원호가 앞장을 서서 안내했고 그 뒤에 휠체어를 미는 은용, 마지막에 준영이 자리한 채 일행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근데 저 사람은 뭐지?’

어제야 정신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서원호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영 거슬렸다. 그는 각성자다. 그는 눈썰미도 보통 사람보다 좋고 약간이지만 마력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호흡이 없다. 움직임도 없어. 시체인가?’

은용이 워낙 꽁꽁 싸매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하루 종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서원호는 살짝 걸음을 늦춰 은용의 옆에 섰다. 그리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절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기…….”

“왜요?”

은용은 그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 사람의 일행이었고 싫어하는 욜로회의 사람이다.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아니… 여기 휠체어에 앉으신…….”

“쉿!”

서원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용이 인상을 버럭 쓰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응? 왜?”

“절대, 절대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이 언니에 대해서는 궁금해도 참아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아요. 안 그러면 당신, 저 아저씨한테 죽어요. 의아해도, 궁금해도, 말이 안 되어도 참아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관심을 끄세요.”

“어, 어… 네…….”

은용의 박력 있는 말에 서원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목숨이 지금도 간당간당한데 괜히 쓸데없는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나름 눈치는 있는 편이라 서원호는 여기서 더 알려 들면 위험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준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에라, 생각하지 말자. 목숨이나 건졌으면 된 거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앞장서서 일행을 인도했다. 그러다 궁금한 점이 생겨 다시 은용의 옆에 섰다.

“저기, 누님. 형님은 등급이 어떻게 됩니까?”

“모른데요.”

은용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그 말에 서원호는 준영의 등급을 추측할 수 있었다.

‘B등급이군. 아마 B등급 상위일 거야. A등급이라면 자신의 등급을 숨길 리 없으니까.’

간혹 자신의 등급을 숨기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의 패를 전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B등급 상위권 정도로 생각했다. A등급이면 숨길 리가 없었다. 건드릴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테니까.

“근데 누님이라뇨? 아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아저씨라뇨? 저 스물일곱입니다.”

스물일곱이라기에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폭삭 삭은 얼굴이었다.

“저 스물셋이거든요? 누나 아니거든요? 제가 더 늙어 보여요?”

은용이 핏대를 세우자, 서원호가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늙어 보이는 게 아니라 제가 누님으로 모시겠다 이거 아닙니까? 헤헷.”

“흥!”

‘어유, 이 쥐방울만 한 년이…….’

평소였다면 일반인은 자신에게 말도 걸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준영 때문에 건드릴 수 없으니 그저 땀을 삐질 흘릴 뿐이었다.

은용도 준영이 아니었다면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 숙이고 도망가기 바빴을 것이다. 준영이 뒤에 있기에 간덩이가 조금 부어 난생 처음으로 각성자한테 막 대해 본 것이었다.

준영의 입장에선 참으로 단순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원호 아저씨는 능력이 뭐에요? 등급은 어떻게 되구요?”

“저는 E등급이고 고유 능력은 반사입니다.”

그 말에 은용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서원호를 한 번 가리키고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다음, 다시 그를 가리켰다.

“이런 반사요?”

은용의 질문에 서원호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받은 피해의 50%를 공격 당사자에게 반사하는 능력입니다.”

은용은 경악과 벌레 씹은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반사라면 자신이 맞아야 능력이 발휘되는데, 아무리 봐도 절대 맞으면 안 될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자세히 보니 키는 무척이나 큰데 몸은 해골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데미지를 반사하기도 전에 한 대만 맞아도 그냥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말라서 잘 피하는 민첩성 캐릭터 같지도 않았다.

그냥 멸망 전에 가끔 상가 앞에서 보던, 바람 불면 흐느적거리는 홍보용 풍선 인형 같았다.

“저기, 능력을 써 본 적은 있어요?”

“거의 없습니다. 형님한테 맞았을 때, 분명 발동되었을 텐데 형님이 살살 때렸나 봅니다. 전 죽을 거 같이 아픈데 형님은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제가 맷집이 좀 약합니다.”

“힘내요…….”

“감사합니다.”

은용이 작은 목소리로 위로해 줬다. 서원호도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고마워하며 한참을 걷자, 그들은 드디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깁니다!”

폐자재를 잔뜩 쌓아 올려진 벽이 있고, 그 안에는 천막들과 흉물스러운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괴물들은 날개가 있어 벽이 소용이 없었다. 저것은 그저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아닐 것이었다.

작은 시골 읍내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층짜리 상가 건물들이 몇 개가 있고, 대부분은 파손되어 있었다. 낡아 빠진 천막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걸로 보아 일반 사람들은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기가 곽주식이란 자의 정착지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 보시죠.”

서원호와 준영이 들어가기 위해 앞장섰지만, 은용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으… 가기 싫어.”

은용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으로 따라갔다.

“멈춰라!”

“누구냐!”

일행이 다가가자 폐자재 위에서 소총을 들고 서 있던 남자들이 일행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욜로회에서 왔다! 곽주식을 만나러 왔다!”

서원호가 앞장서서 소리를 지르자, 남자들은 조금 움츠리며 아무 말 없이 고갯짓을 했다. 딱히 문도 없으니 그냥 뚫려 있는 자재 사이로 들어가란 뜻이었다.

어차피 욜로회라면 자신들의 세력보다 큰 곳이고 한두 번 온 것도 아니니 자세히 확인을 안 하는 것이었다. 확인을 할 방법도, 배짱도 없으니까.

이들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괴물들이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사람들이야 대규모로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정착지 내에 있는 각성자들로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들어가시죠.”

서원호의 말에 은용은 몸을 더 움츠렸고, 준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들어가려는 그때.

“어? 너 은용이 아니냐?”

“저년이 왜 저기 있어? 당신들 욜로회 맞아?”

사내들은 다시 총을 들어 일행을 겨누었다. 이 정착지에서 지내던 은용이 있으니 의심이 든 것이었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우지직!

서원호가 옆의 자재들을 손으로 움켜쥐고 우그러뜨렸다. 각성자가 아니면 낼 수 없는 힘이었다. 사내들은 바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년은 우리 정착지에서 지내던 사람인데 갑자기 욜로회라 하니까…….”

사내 중 하나가 떠듬떠듬 말했다. 자신들로서는 각성자를 막을 수도 없고 총을 쏴 봤자 통하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 욜로회원이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욜로회원이니까 함부로 건드릴 생각 말어.”

“아, 알겠어. 들어가.”

“자자, 들어갑시다.”

서원호가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들어갔다. 은용은 그대로 몸을 움츠린 채 따라갈 뿐이었다.

“휘유, 여전하구만.”

서원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주변의 더러운 천막 앞에는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썩은 동태눈처럼 전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일행들을 슬쩍 쳐다만 볼 뿐, 그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욜로회의 사람들도 모두 이런가?”

“아, 뭐, 비슷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요. 여기는 갈수록 분위기가 좋지 않네요.”

준영의 물음에 서원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람이 더 줄어든 거 같아요.”

은용이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신들이 탈출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때보다 확연하게 사람들이 줄어든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확실해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줄어들 이유가 없어요.”

“소문이라뇨?”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서원호가 의아해하자 은용이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헐, 그건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욜로회도 사람을 먹이로 주지는 않아요. 차라리 빡세게 일을 시키지. 주식이 놈이 진짜 미친 건가?”

“만나 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