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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미친!’

‘무슨 특별훈련이야! 그냥 자살이지!’

두 사람은 동시에 속으로 외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저씨! 오빠! 제발!”

“형님, 제발 도망 좀!”

두 사람은 바들바들 떨며 외쳤지만, 준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안 돼.”

무려 백 마리가 넘었다. 서원호는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저 괴물 무리와 부딪쳤다가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괴물의 수는 스물 이하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서원호가 크게 외치며 잽싸게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용은 발만 동동 굴리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미안해요! 언니는 내가 잘 챙길게!”

은용도 휠체어를 잡고 뒤로 돌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일단 우리부터 살자고. 저 아저씨는 미쳤어. 언니도 사실 잘 알지?”

그래도 인형이지만, 잠깐 정이 들었는지, 자신도 맛이 갔는지 버리고 가지 못했다. 어쩌면 준영이 그렇게 아끼는 인형이니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고 싶어서인지도 몰랐다.

“헉, 헉?”

숨이 멎을 정도로 뛰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두 사람은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야! 왜 거리가 안 벌어져!”

“아저씨, 날 이제 놔 줘요. 엉엉엉. 가는 여자 붙잡는 거 아니라고! 엉엉엉!”

두 사람은 발을 아무리 굴려도 제자리에서 나아가질 못했다. 한마디로 제자리 뛰기만 한 것이었다.

“난 안 죽어!”

“나도 안 죽어!”

괴물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저 정도의 괴물과 만난다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었다. 그 생각이 발을 멈추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헉헉… 이거 뭐야, 왜 이래.”

“아저씨, 제발 날 좀 내버려 줘! 질척거리지 말라고!”

결국 두 사람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준영이 마력을 이용해 못 나가게 한 것이지만, 두 사람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준영이 무슨 수를 썼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걱정 마라.”

메마른 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사람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저 많은 괴물을 앞에 두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한단 말인가.

“아저씨…….”

은용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준영을 바라봤다. 언니고 뭐고 다 죽게 생겼다.

이상하게 원망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맛있는 걸 먹고, 깨끗하게 씻고, 새 옷을 입었으니 이런 세상에서 나름 사치하다가 가는 느낌이었다.

“걱정 마라.”

준영이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말했다. 은용은 주저앉은 채 그저 멍하니 준영을 바라만 보았다. 서원호는 땅을 치며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이내 주저앉고 포기해 버렸다.

크와와와!

괴물들의 선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는 도망가려 해도 늦었다.

바로 그때, 준영이 양팔을 벌리자 백 마리가 넘는 괴물들이 모두 멈추고 말았다.

하늘에 뜬 채로 날갯짓도 하지 않는데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고 만 것이다.

드드드드드.

준영이 마력을 더 끌어 올리자 마치 공기가 마찰을 일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와와악!

괴물들은 비명만 지를 뿐,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준영이 천천히 벌린 양팔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헉!”

“딸꾹, 저게 무슨…….”

서원호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고 은용은 딸꾹질까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랍게도 준영의 손짓에 따라 괴물들이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크와아아아!

괴물들도 이 현상이 당황스러운지 고함을 지르며 눈을 뒤룩뒤룩 굴려 대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천천히 마력을 올려가며 괴물들을 한데 뭉쳐 놨다.

곧 괴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가 생겨났다.

“이제 잡는다.”

휘릭.

준영이 허공에서 창 하나를 꺼내 은용에게 던졌다. 창은 정확히 주저앉아 있는 은용의 앞에 박혔다.

“?”

“뽑아라. 하나씩 잡는다.”

“뭐, 뭘… 난 괴물 못 잡아요. 내가 어떻게…….”

“잡는다. 심장을 파괴하면 된다.”

은용이 뭉쳐 있는 괴물들을 보며 질린 눈으로 엄살을 떨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창을 뽑아라.”

단호한 준영의 말에 은용이 비실거리며 창을 쥐어 들었다.

“너.”

“네, 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서원호가 대답하자, 준영이 예의 그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봐라.”

“네, 넵!”

누구 명이라고 거역할까. 서원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드드드.

준영이 손짓하자, 괴물 한마리가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발버둥 치는지 몸을 움찔거리지만, 한쪽 손을 뻗고 있는 준영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스악!

어느 순간 검을 허공에서 꺼내 든 준영이 순식간에 괴물의 팔과 다리, 날개를 모두 잘라 버렸다.

“으으…….”

은용은 아무리 괴물이지만, 눈앞에서 사지가 잘리는 것을 보니 몸이 절로 떨려 왔다.

철푸덕.

“까악!”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사지가 잘린 괴물의 몸통을 은용 앞에 던져 버렸다. 잡으라는 뜻이었다.

“심장을 파괴하면 된다. 이놈들의 방어력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재생력과 힘만 조심하면 된다.”

“크와아악!”

은용은 창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잡을 수 있다 해도 소리 지르고 있는 괴물을 찌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억울하지 않은가?”

“네?”

준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은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놈들 때문에 너의 가족,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세상은 멸망 직전까지 왔고, 너는 비참한 생활을 하며 살아남았다.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각성자가 되어 이놈들을 몰아내고 싶지 않은가?”

그 말을 끝으로 준영은 입을 다물고 은용은 눈을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이.

‘그래, 힘. 힘이 있어야 해. 복수하고 싶어. 그리고 아저씨 말처럼 나도 각성자가 된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올라갈 거야. 근데 갑자기 말은 왜 저렇게 잘한담?’

은용의 머릿속에 그간 힘들던 기억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얽히고설켜 마음속 깊이 공포와 생존이란 이름하에 감춰져 있는 분노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하아…….”

은용은 크게 심호흡하며 창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바로 내리꽂지는 못했다. 다시 괴물의 얼굴을 보자 무서워서 찌르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으으, 살아 있는 걸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크와와와아!

괴물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역한 냄새가 훅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찔러야 해. 어차피 찌를 때까지 끝나지는 않아.’

은용은 한참을 망설이고 마음을 가다듬는 걸 반복했다. 준영은 아무 말 없이 그걸 기다려 주었다.

은용은 이 괴물들을 잡는다면 자신의 인생 또한 달라질 거란 작은 소망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내리꽂았다.

“크와아아아!”

초심자인 은용이 단번에 심장을 파괴할 리 없었다. 괴물의 울부짖음에 그녀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다시.”

준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상하게도 떨림이 가라앉았다. 저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남자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푸욱! 푹! 푹!

“크아아아악!”

은용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여러 번 괴물의 가슴을 찔러 댔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괴물을 죽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은용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잡았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 같았다.

하지만 단 하나. 괴물을 찔러 죽였을 때, 느낀 묘한 쾌감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치 그간 도망 다니면서 느낀 절망과 분노를 모두 뿜어낸 것처럼. 아니, 한 마리로는 부족했다. 더, 더 괴물의 피를 원했다.

“잘했다.”

준영이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괴물의 사지를 잘라 은용에게 던져 주었다.

이번에는 은용 또한 아무 말 없이 괴물을 찔러 죽였다. 몇 번이 반복되자, 은용도 괴물을 죽이는 데 익숙해져 갔다.

‘으으, 미친것들이야…….’

서원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어 댔다. 이런 기이한 장면은 살아오면서 본적도 없다.

자신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괴물을 죽여 각성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직 많이 남았다. 염원을 담아 찔러라. 무엇이든 좋다. 시스템은 그 대가로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준영의 말에 은용은 강한 염원을 담아 괴물을 찔렀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은 자신만의 열망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묵묵히 던져 주는 준영과 말없이 괴물을 찔러 죽이는 은용. 둘의 움직임은 노을이 질 때쯤이 되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저, 정말로 저 많은 괴물들을…….”

서원호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어찌 일개 사람이 저런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저 많은 괴물들이 꼼짝도 못하고 도살장의 소처럼 얌전히 죽어 나갔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악, 하악…….”

은용은 마지막 괴물의 숨통을 끊고 나서 주저앉아 버렸다. 피가 어찌나 튀었는지 온몸이 피범벅이 됐지만, 그녀는 씻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잘했다.”

“저도 이제 각성자가 된 건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은용이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꽤 많이 잡았으니 이제 각성자가 됐을 법한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 앞으로 틈틈이 괴물들을 잡을 것이다.”

“몇 마리나 잡아야 하는데요?”

“사람마다 다르다. 빠르면 열 마리 이내로도 될 수 있고, 늦으면 수천 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마력량이 다르군. 선발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은용은 준영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도 이 짓을 더 해야 한다는 것만 이해했다.

“참고로…….”

“?”

“누나는 처음의 단 한 마리를 잡고 각성했다. 엄청난 재능이었지. 넌 재능이 없구나.”

“…….”

‘쳇, 재능 없어서 미안합니다.’

입은 뾰로통하게 나왔지만, 말은 속으로만 했다.

“원호.”

“네, 넵! 형님!”

서원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다가 곧바로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준영이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저분하니 조금 이동한 뒤, 쉬도록 한다. 앞장서라.”

“넵!”

서원호는 욜로회에 합류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교류하는 정착지에 대한 지형은 숙지하고 있었다. 몇 번을 와 봤으니까.

“이쪽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그는 안내를 시작했고 준영과 은용은 아무 말 없이 따라갔다.

‘욜로회가 문제가 아니야. 곽주식과 싸우면 누가 이길 수 있지? 형님인가? 잘 생각해 보자.’

곽주식은 B등급의 각성자였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강자였다. 그렇기에 적은 인원으로도 정착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영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수백 마리의 괴물과 싸워 이기는 것은 그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예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잡아 죽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니, 특수 능력이 혹시 저런 건가?’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홀드나 제압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원호도 그런 능력자를 본 적이 있었다.

‘S등급은 아니야. A등급인가? B등급 최상?’

서원호는 S등급인 양승수의 곁에 꽤 있던 경험이 있다. S등급은 달랐다. 옆에만 있어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이 절로 풍겨 나왔다. 그리고 수백 마리의 괴물도 마력의 방출만으로 찢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준영을 S등급 아래라 판단했다.

서원호는 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힘보다는 눈치로 살아남은 적이 많았다. 상대의 능력을 재빠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 그를 생존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등급이 낮으니 자신보다 높은 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고유 능력이 속박 계열이라면 저 현상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저 정도 인원과 싸우려면 적어도 B등급은 되어야 할 테고… 하지만 분위기만 보면 A등급 같기도 한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넵? 아니,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쉰다.”

번뜩 정신을 차리니 꽤나 멀리 이동을 했다. 생각에 전념하느라 얼마나 이동했는지도 모른 것이었다.

벌써 해가 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죠. 그리 멀지 않으니 내일은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서원호가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으니 딱히 야영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누워 잘 생각이었다. 그 정도야 익숙한 세상이니까.

그런 그를 은용이 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다.

‘뭐야? 왜 웃어?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