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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번쩍!

준영의 눈이 떠졌다.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새벽 공기가 복잡해진 머리를 씻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놈들은… 살아 있을까?’

지금으로선 알 방도가 없다.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먼 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었다.

준영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이런 세상에서야…….’

모든 인프라가 망가져 있다. 은용의 얘기를 대충 들어 보니 생존자들이 나름 영역을 구축하고 살고 있는 거 같았다.

각성자들이니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살아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힘이 괴물들을 압도했다면 세상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뭘 해야 할까…….’

다시금 든 고민이었다.

‘애초의 계획대로 할 수 있을까? 복수도 해야 하지만 찾을 수나 있을까?’

물론 우연찮게라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할 것이다.

‘은영.’

준영은 은용이 잠든 텐트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저 친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지구로 돌아와 처음 동행하는 사람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묘한 집착이 느껴졌다.

‘일반인은 많이 자는군.’

살아남은 인류의 평균 수면 시간은 많이 줄어 있었다.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니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각성자들의 눈에는 많이 자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살며시 은용의 텐트를 열어 보니 그녀는 긴장이 풀어졌는지 아예 대자로 널브러진 채 자고 있었다.

치마가 올라가 곰돌이 팬티가 보였다. 칠칠맞지만 생기가 느껴지는 그 모습이 가슴에 작은 여운을 남겼다.

‘누나도 좋아하는 거 같군.’

인형은 당연히 미동도 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살아 있는 건 좋아.’

준영은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의식도 못한 채 자리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아 별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자, 슬며시 동이 터 왔다. 해가 밝았음에도 은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잘 자는군.’

다시 몇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은용이 눈을 비비며 텐트에서 기어 나왔다.

‘아, 아저씨, 아니, 오빠, 일찍 일어났네요. 하암…….’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넉살이 꽤 좋다고 생각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지 나름 배포도 큰 거 같았다.

“밥은 안 먹어요?”

은용이 입을 다시며 말한다. 준영의 기억으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찾는 여자는 없었다.

“배가 고픈가?”

“헤헤, 잘 먹으면 좋죠.”

그 말이 맞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굶을지 몰랐다.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영양분을 채워야 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뭘 먹지?”

준영이 아침을 준비하며 물었다.

“음, 주로 괴물의 시체를 먹죠. 대충 육포나 스프로 만들어서요. 으, 근데 진짜 맛은 없어요.”

괴물의 시체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없었다. 각성자들이 잡고 나눠 줘야 그것을 먹을 수 있었다.

“괴물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다들 알아요. 누가 처음 얘기해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과학자나 각성자겠죠?”

아마 선발대로 뽑힌 각성자가 알려 줬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모두 숙지하고 왔을 테니까.

“와! 또 라면이잖아… 뽕라면… 그래도 좋아!”

준영은 다른 음식을 차리는 게 귀찮아서 뽕라면을 꺼내 주었다. 어제도 면이고 오늘도 면이지만, 은용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확실히 사람은 굶어 봐야 음식의 소중함을 아는 거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은용은 허겁지겁 뽕라면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야말로 어제 밤에 이은 폭풍 흡입이었다. 맵지도 않은 지 국물까지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이었다.

“음음? 오빠랑 언뉘는 안 먹어요?”

“우리는 저녁만 먹는다.”

“눼눼.”

그녀는 우물거리며 말하다 다시 코를 박고 먹었다. 누가 뺏어 먹지도 않는데 그게 버릇이 되어 버린 거 같았다.

‘여유가 없군.’

식사 예절이 개판이지만, 탓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젊은 여자가 그런 것까지 챙기고 산다면 아주 강자거나 빨리 죽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이야기를 듣고 싶다.”

“눼? 우물우물, 끄억. 꺼억.”

“더럽다.”

“네… 죄송… 그런데 무슨 이야기요?”

“지금이 몇 년도지?”

“에, 글쎄요? 몇 년도지? 2022년? 2023년? 뭐, 대충 그 정도 됐을 걸요?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산 지 꽤 됐어요.”

“흐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런 세상에 일반 사람이 매일 날짜를 세고 있을 리는 없었다.

‘대략 십 년 좀 넘게 흐른 건가? 그곳과는 정말 시간의 흐름이 다르군. 그놈들도 살아 있을 수 있겠어.’

자신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홀로 그곳에 있었다. 수백 년은 지낸 거 같은데 이곳은 십 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어디긴요? 한국이죠.”

“한국의 어디.”

“에, 전라북도 고창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피난 다니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니까 동네 이름도 잘 몰라요. 저도 서울에서 살다가 왔어요. 저 서울 여자에요.”

은용이 뒷머리를 휙 넘기며 도도하게 말했지만, 준영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나 더 물어보지.”

“뭔데요?”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

“으응? 모르세요? 각성자인데 왜 몰라요?”

“모른다.”

“아, 음…….”

어느새 뽕라면 한 그릇을 다 비운 은용이 옆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물도 마실 수 있을 때 많이 마셔야 했다.

“아, 배부르다. 잘 먹었어요. 으음, 일단 대화를 나누자는 거죠?”

“그래.”

은용이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름 우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제 소개를 다시 정식으로 할게요. 제 이름은 장은용. 나이는 아마 스물셋 정도? 고향은 서울이고 학교는…….”

“듣고 싶지 않다.”

“히잉…….”

‘인형, 뽕라면, 랜턴, 교복 좋아함, 내 얘기 싫어함.’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한 은용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대충 십 년? 십이 년? 전쯤에 초능력자들이 나타났어요.”

“각성자말인가?”

“네, 그때는 그냥 초능력자라고 불른 거 같아요. 제가 그때쯤에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사실 그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이후에 뉴스로 나오고 이슈가 된 건 기억해요. 학교 가서 친구들하고 신나게 얘기한 기억이 있거든요. 근데 옆 반 희숙이가 글쎄 말이죠. 자기 남자 친구랑…….”

“듣고 싶지 않다.”

“히잉, 네.”

냉담한 자르기에 학교 친구 희숙이는 제대로 등장도 못 해 보고 조기 퇴장을 당해 버렸다.

“아무튼 막 뉴스에도 나고,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어요. 나라마다 다 나타났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이상한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했지?”

“저 괴물들이 쳐들어온다고요. 난리가 났죠. 초능력까지 보여 주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믿자니 너무 허무맹랑하고. 아무튼 그래서 비웃음도 많이 샀어요. 게다가 처음에 천사라고 했다가 더 욕먹고 그랬어요. 종교계에서도 난리가 났죠. 그런 의미의 천사가 아니라고 해명도 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믿을 수가 없었겠지.’

“나중에 그냥 괴물이라고 말을 바꾸긴 했는데, 아무튼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갈려서 이러쿵저러쿵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사고?”

“네, 그 뭐지? 어느 나라에서 좀 약한 각성자를 잡아서 강제로 실험을 했다나? 죽였다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그래서 막 난리가 난 거죠!”

‘실험이라…….’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다. 국가에서는 초능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어느 독재국가에서는 그걸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현대 무기로 F급 각성자 정도라면 힘들긴 해도 제압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쩌면 인질이나 약점을 잡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뒤에 어떻게 됐지?”

“어휴, 무슨 나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나라 정부가 날아갔대요. 화가 난 각성자들이 찾아와서 다 죽였대나? 그때부터 난리가 난 거죠. 막 세계 곳곳에 초능력 범죄가 일어나고, 그거 막겠다고 무슨 협회가 생기고, 초능력자들끼리 싸우고, 군대도 출동하고, 진짜 전쟁이었다니까요.”

“큭큭…….”

웃음이 나왔다. 괴물을 막으라고 힘을 줬더니 인간들끼리 먼저 싸우고들 있었단다.

‘응, 이게 웃긴가?’

은용은 확실히 미친놈은 웃음 포인트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렇게 매일 전 세계 곳곳이 싸워 대니까 사람들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저도 덕분에 학교 빠진 적 많아요. 그래서 옆 반 친구 희숙이랑 희숙이 남자 친구랑 선생님 몰래…….”

“듣고 싶지 않다.”

“히잉, 네…….”

‘희숙이 싫어함.’

이유 없이 두 번 고통 받은 희숙이를 제쳐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막 사람들은 초능력자 반대. 아, 그때는 초능력자라 불렀어요. 자기네들은 각성자라 불렀구요. 어쨌든 사람들이 ‘돌연변이다’, ‘외계인이다’, ‘지구를 떠나라’하고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거 다 질투 나서 그런 거래요 저도 사실 조금 부러웠거든요. 헤헤.”

“각성자들이 다른 사람도 각성시켜 준다는 말은 안 하던가?”

“어? 그건 아시네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해 봐라’하고 국가에서도 ‘비밀을 공유해라’하고 뉴스에서도 막 뭐라고 하고 그랬는데… 자꾸 괴물이 와야 해 줄 수 있다고만 하니까 사람들한테 더 미움 받고, 뉴스에서도 매일 까고 그랬어요. ‘도대체 괴물 언제 오냐’고, ‘자기들끼리만 방법을 숨긴다’, ‘이기적이다’ 이런 식으로요. 아니면 미친놈 취급 받고 그랬어요. 뭐, 믿은 사람들도 꽤 되긴 하지만요.”

“그래서 그들이 뭐라 했지?”

“‘언제 오는지 모른다고’요. ‘괴물을 잡아야 한다’고, ‘다 각성할 수 있다’고 그랬는데 당연히 아무도 안 믿죠. 계속 욕만 먹었어요.”

“나름 스트레스들을 받았겠군.”

“그런데 진짜 괴물들이 왔어요.”

“언제 온 거지?”

“5년 정도 전? 아마 5년, 6년 정도 됐을 거예요. 제가 막 꽃다운 나이가 됐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