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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준영이 라면을 그릇에 담아 건네주자, 은용은 보기만 해도 눈물이 터질 거 같았다.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쫄깃해 보이는 면발이 건더기 스프와 함께 잘 어우러져 담겨 있었다.

새빨간 국물 사이로 올라오는 하얀 김이 코로 들어와 매콤한 냄새를 풍기니 식욕이 바짝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저 탱탱한 면발과 칼칼한 국물을 어서 빨리 입 안에 넣고 음미하고 싶었다.

‘라면, 넌 이제 진심 뒤졌다!’

한입을 넣어 보니 매콤한 맛이 혀를 찌름과 동시에 부드러운 면발이 혀를 감쌌다. 그러고 씹는 순간, 육즙이 터지듯 라면 스프 특유의 향이 코를 자극해 왔다.

맛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폭풍 흡입이 시작되었다.

막상 먹게 되니 맛을 느낄 새도 없을 정도로 제대로 씹을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배 안으로 집어넣을 뿐이었다.

“켁, 컥!”

뜨거운 라면을 한 번에 흡입하니 목에 김이 들어가 눈물, 콧물과 함께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흡입했다. 그 정도로 끝내줬으니까.

“누나, 누나도 좀 먹어 봐.”

준영은 인형과 또 실랑이 중이었다. 하지만 인형이 라면을 먹을 리가 없었다. 은용은 애써 모른 척했다. 인형 언니와 엮여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꺽, 잘 먹었다. 쩝쩝.”

국물까지 남김없이 빨아먹은 은용은 배를 두드려 댔다.

정말 최고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 중 오늘 먹은 라면이 제일 맛있었다. 게다가 이제 텐트 안에서 모포까지 깔고 잘 수 있다니 정착지 부럽지 않은 호사였다.

‘이 남자다!’

은용의 눈이 빛났다. 이 남자만 따라다니면 먹을 거, 잘 거 걱정 안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비위만 잘 맞추면 될 거 같았다. 순식간에 준영의 위치가 곱고 착하게 미친 남자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얼굴도 잘생겼고.’

배가 부르니 얼굴도 더 잘생겨 보였다. 머리를 꾸미고 면도까지 하면 상당한 미남일 것만 같았다.

속물근성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이런 세상에서 이 정도 욕심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옷이 걸레군.”

그 말에 은용이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옷은 그야말로 넝마중의 넝마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깨끗하고 좋은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옷 자체의 생산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신발 역시 짝짝이인 것은 당연했다.

“헤헤, 옷은 구하기가 힘들어서요.”

“누나가 보기 좋지 않다고 한다. 여자는 항상 옷을 신경 쓴다고 자주 말했다.”

“아, 네…….”

보기 안 좋으면 어쩔 것인가. 옷이라도 구해 준단 말인가. 인형 언니가 요즘 세상을 정말 몰라도 1도 모르는 거 같았다.

‘…설마?’

준영이 다시 허공에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은용은 옷이 음식보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시스템을 연결해 옷을 검색하는 중이지만, 은용이 알리는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젊은 여자 옷 스타일. 세트로.’

곧 리스트 몇 개가 나타났다. 준영은 그냥 리스트 중 아무거나 골라 은용에게 던져 주었다.

“어맛, 새 옷이잖아! 신발까지! 으응?”

옷을 받아 든 은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하고 받았는데 옷이 이상했다.

“아저씨, 이거 교복…….”

넥타이까지 달려 있는 하얀 교복 상의와 짙은 파란색의 스커트, 검정 니 삭스에 굽이 있는 여성용 하이 캔버스화까지 있었다. 곰돌이가 그려져 있는 속옷은 덤이다.

은용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기, 저 스물 세 살인데…….”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누나가 잘 어울릴 거라는군.”

“네…….”

은용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그래도 깨끗한 새 옷을 입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데 이런 취향인가? 누나는 무슨, 지 취향이면서 툭하면 인형 언니 핑계야.”

나이가 몇인데 교복이란 말인가. 물론 자신은 동안이고 예쁜 미소녀라 뭘 입어도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래도 준영이 요구하면 이런 옷이라도 입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미모를 이용하는 건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으, 근데 조금 창피해.”

쭈뼛거리며 나오자 준영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군.”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은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런 환경이면 최고였다. 맛있게 밥도 먹고, 깨끗하게 씻고, 텐트까지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아무데서나 더럽게 당하던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그, 그럼 오늘은 어디서…….”

우물쭈물하며 말하자, 준영은 의아한 듯이 바라봤다. 은용은 그게 더 부끄러웠다.

“아, 잠은 그쪽에서 자라. 난 이쪽에서 잔다.”

“네?”

“언니랑 같이 자라. 언니가 여자가 없어 외로워했다.”

“네?”

준영은 다가와 인형을 은용의 텐트에 집어넣고 자리를 펴 줬다.

“누나, 오늘은 은영이랑 자. 여자끼리 수다도 떨어 보고 재미있겠지?”

“은용인데…….”

부드러운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고 난 뒤, 준영은 자신의 텐트로 들어가 버렸다.

“뭐, 뭐야…….”

은용은 인형의 옆에 앉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거 진짜 살아 있는, 뭐 신기한 그런 건가?’

준영이 보여 준 신기한 능력을 봤을 때, 이 인형도 어쩌면 인공지능이라든가 귀신의 씌었다든가 할 수도 있었다.

“어, 언니 자요?”

혹시나 하고 말을 걸어 보았다. 당연하게도 인형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언니?”

“…….”

“에이, 씨. 그럼 그렇지. 나도 같이 있다 보니 미치는 거 같네.”

은용은 투덜거리며 모포를 들어서 인형에게 덮어 주려 했다.

“아니, 근데 이렇게 매일 드레스를 입히고 있는 건가?”

의아해하며 같이 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인형을 살짝 옆으로 옮기려는 순간.

“응?”

드레스의 한쪽 부분이 이상했다. 마치 다리가 한쪽이 없는 듯이 푹 내려 앉아 있었다.

“뭐지? 으헉!”

살짝 드레스를 걷어 올리자 인형은 한쪽 다리가 무릎부터 베여 있었다.

“으, 살 떨려. 뭐야? 다리까지 한쪽이 없잖아? 정말 미친놈이야. 미친놈.”

은용은 잽싸게 드레스를 다시 내렸다. 괜히 준영한테 걸리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아니, 근데 물건들도 막 만들어 내면서 인형 고칠 생각은 안하나? 이런 건 못 고치는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제품인가?”

은용은 투덜거리며 모포를 덮고 누워 버렸다.

배도 부르고 긴장이 풀어지니 잠이 소르르 몰려왔다. 게다가 깨끗하게 씻고 새 옷까지 입었을 뿐만 아니라 좋은 향기도 같이 풍겼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어쨌든… 어, 언니? 잘 자요? 에휴, 내가 뭐하는 거람. 나도 미치겠네.”

‘인형 언니 얘기 싫어함. 랜턴 좋아함. 뽕라면 좋아함… 교복 코스프레 좋아함. 으음.’

인형에게 잠자리 인사를 한 뒤, 준영이 좋아하는 것들을 복기하며 그녀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뒤 처음으로 편하게 잠든 날이었다.

“다행이군.”

자신의 텐트로 돌아간 준영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나와 자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다. 여자가 일행으로 들어왔으니 누나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색하군.”

누나와 떨어져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주 까마득할 정도로. 그래서인지 뭔가 기분이 묘했다.

“잠이나 자자.”

준영도 누워 잠을 청했다. 잠이 안 오는 몸이지만, 의식적으로 육체를 조절해 억지로 잠이 들게 만들었다. 거의 선잠 자는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곧 현실과 잠의 경계에 빠진 준영의 머릿속에 아주 예전의 기억들이 그의 뇌를 잠식하듯 나타났다.



***



그녀는 우리들 중 가장 강했다.

게다가 수십만 명 중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다는 다중 능력의 보유자였다.

안내자인 녹색의 큐브 ‘오로바스’도 그녀의 재능을 극찬할 정도였다.

롱 웨이브 펌의 머리를 휘날리며 항상 도도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을 짓던 그녀. 화려하다는 표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우리, 희망을 잃지 말자. 꼭 돌아가자.’

그녀가 항상 웃으며 하던 말이었다.

낮과 밤도 없는 이 행성은 붉은색의 대기와 바위만이 가득했다. 오직 괴물들만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사는 곳이었다.

그래도 준영은 그녀가 있기에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녀가 강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준영을 사랑했기에 이 지옥 같은 행성에서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에서 버티며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어느 날.

수천의 괴물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항상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며 다녔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것이었다.

“안되겠어. 이대로 가다간 결국 체력이 떨어져서 잡히고 말거야. 그리고 전처럼 먹이를 보듯 쫓아오는 게 아니야. 정확히 우리를 찾고 있어.”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다리는 한쪽이 잘려 있어 대충 나무를 꺾어 만든 의족이 대체하고 있었다. 불편한 듯 보였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다리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알겠어. 차라리 힘이 더 빠지기 전에 여기서 싸워 보자.”

준영은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여태껏 그녀의 판단은 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옳았고 그녀의 결정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준영은 그녀를 믿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도저히 못 이길 거 같은 싸움도 그녀는 모두 이겨 내었다. 준영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고 믿음직한 보호자였으며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저 멀리 새까맣게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최소 수천 마리였다. 그런데 사방에서 무리에 합류하고 있는 괴물들이 늘어났다. 어쩌면 수만 마리가 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떻게든 이겨 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여자였으니까.

“우리가 모르는 존재가 있어.”

그녀가 저 멀리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응?”

준영은 느끼지 못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싸우던 괴물들과 다른 존재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도망가. 내가 막아 볼게.”

결국 고민하던 그녀가 차갑게 준영에게 말했다.

하지만 준영은 거절했다. 그녀를 두고 혼자 도망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결국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녀가 준영을 꼭 안았다. 준영도 힘을 주어 그녀를 꽈악 안아 주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이렇게 그녀와 안은 채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안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준영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죽음을 예감한 두 연인의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자, 그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준영에게 향했다.

지잉―

공기의 떨림과 함께 마력이 동그랗게 뭉쳐 준영을 감쌌다. 그것은 그녀가 손짓하자, 살짝 지면에서 떠올랐다.

“누나? 누나! 뭐 하는 거야! 이거 풀어, 어서!”

준영은 소리 지르며 마력을 개방해 자신을 속박한 그것을 풀어 보려 했다. 하지만 힘의 차이가 역력하다. 작은 구멍 하나 낼 수 없었다.

“누나! 누나!”

준영은 미친 듯이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무서웠다. 혼자 남게 될 거라는 상상이 엄청난 공포로 찾아왔다.

“준영아…….”

준영을 공중에 띄운 채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살아야 해. 꼭. 약속해.”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준영의 눈은 흔들렸고 그녀의 눈은 평온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어.”

“누나! 누나! 안 돼! 제발!”

준영은 울며 소리쳤다. 혼자 남을 바엔 그녀와 함께 죽는 것이 나았다. 이곳에서 혼자 버틸 자신이 없었다.

준영을 감싼 마력구가 점점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 사랑.”

팡!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마력구가 대포처럼 쏘아져 나갔다. 준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각성자기 때문에 알았다. 그녀가 사용한 이 기술이 얼마나 큰 마력이 필요한지. 아마 그녀는 준영을 보호하기 위해 가진 마력을 상당히 소모했을 것이다. 언제나 마력이 넘치는 그녀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마력을 쓰는 것은 전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멀어져 가는 준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이제 새까맣게 뭉친 괴물들은 시야에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지고 굳센 표정으로 변하였다.

“후우…….”

한번 심호흡을 한 그녀의 발 앞에 황금빛의 찬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마법진에서 새하얀 검이 천천히 손잡이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신검 브륜힐트.

화려한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매우 아름다운 검이었다.

척.

양손으로 검을 잡은 그녀가 자세를 잡았다. 괴물들은 이제 지척까지 다가왔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그녀가 우아하게 검을 휘둘렀다.

번쩍!

새하얀 섬광이 사방으로 퍼지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것이 준영이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