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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무 말 없이 걷던 준영이 걸음을 멈췄다.

“은영.”

“은용이요.”

“…….”

약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왜요?”

“아저씨 아니다.”

“네?”

“아저씨 아니라고.”

“네…….”

다시 아무 말 없이 걷던 준영은 인형과 속삭이더니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오빠가 좋을 거 같군.”

“…….”

할 얘기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둘은 걷기만 했다.

“저기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은용이 말을 걸었다. 저 몰골에는 오빠란 소리가 안 나올 거 같아 ‘저기요’라고 결정했다.

꽤 잘생긴 준영의 얼굴이지만, 안타깝게도 피범벅에 더러운 몰골이라 제대로 보여 주질 못했다.

어쨌든 곱게 미친 거 같아 어차피 같이 다닐 거면 대화라도 하면서 지내야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어딘지 아세요?”

“…….”

걸음을 멈췄다. 준영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길도 모른다. 그냥 쭉 걸어갈 뿐이었다.

“풋.”

준영이 가만히 서 있자, 절로 웃음이 나온 은용은 그의 옆에 가서 섰다.

“이틀 정도 걸어가면 정착지가 있다고 들었어요.”

“정착지?”

“각성자인데 왜 몰라요?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이요. 대부분 각성자가 지켜 주고 있어요.”

“그곳밖에 없나?”

은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요, 여기서 가까운 데가 하나 있긴 해요.”

“그런데 왜 다른 곳으로 가지?”

“거기는 안 가는 게 좋아요.”

“이유는?”

“거기는 위험해요….”

그 말을 끝으로 은용은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준영도 더 묻지 않고 다시 걸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은용이 나름 화제를 돌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저씨… 아니, 저기요. 어디서 오셨어요?”

“아주 먼 곳.”

‘어휴, 어디 미국에서 왔냐?’

“아, 네…….”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형하고는 시간만 나면 속닥이면서 자신과는 대화를 잘하지 않는다. 미친놈이지만 은용은 괜히 오기가 생겼다.

“저기 근데 그 인형은 뭐예요?”

준영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왜, 왜요…….”

눈을 보자 소름이 쫘악 올라왔다. 광기에 젖은 눈동자였다.

“컥!”

순식간에 준영이 다가와 은용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바로 숨이 턱 막혀 오고 현기증이 일었다.

“사람한테 인형이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지?”

답답하게 나오던 준영의 말투가 매끄러워졌다.

“사, 살려 주세요.”

‘죽일까?’

준영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악의가 없는 사람을 기분 나쁘다고 죽일 수는 없었다.

“아, 아저씨… 죄, 죄송해요. 사, 살려… 컥컥!”

준영은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괴물이면 그냥 찢어 죽이면 되지만, 지구에 와서 처음으로 같이 다니고 대화한 사람을 죽이거나 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죽을 정도의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이 기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더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뭐, 누나? 그러지 말라고?”

준영이 또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은용은 정신을 잃기 전에 기지를 발휘했다.

“어, 언니 살려 주세요! 언니! 잘못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목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콜록! 코록, 콜록!”

눈물과 콧물이 터지듯이 흘러나왔다.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역시 곱게 미쳐도 미친놈은 미친놈이었다.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은용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누나가 살려 주라더군. 누나가 너를 신경 쓰는 모양이다.”

“네네, 어, 언니 감사해요. 흐윽.”

은용은 목을 부여잡고 인형에게 연신 사과하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제야 마음이 풀린 준영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자.”

“네네.”

은용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준영을 따라갔다. 이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친해지려다 말 한번 잘못해서 죽을 뻔했다. 미친놈 비위를 맞추려면 일단은 정보가 더 필요할 듯했다.

“그리고 아저씨 아니다.”

“네, 오빠…….”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물론, 오빠 칭호를 획득한 준영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기분이 좀 좋아진 거 같았다.

“하하, 누나 질투하는 거야? 그냥 동네 오빠 같은 거야.”

‘미친놈…….’

다시 어색한 침묵이 시작됐다. 은용은 괜히 말 잘못했다가 죽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고 준영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걷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준영은 이 시간을 기다렸다.

“여기서 야영을 한다.”

“네.”

은용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냥 하자면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건물도 없고 도로와 벌판만 있는 곳이었다. 숨기에는 좋지 않고 위험한 곳이지만, 반 정도는 자포자기했다.

‘그래도 아까 순식간에 몇 마리 없애고 나까지 구해 준 걸 보니 꽤 강한 각성자 같아. D등급? 아니면 C등급일까?’

만약 B등급이면 그 거대한 괴물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고 한다. 그런 자가 지켜 주는 정착지는 꽤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어쩌면…….’

비위만 잘 맞춘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대폭 올라갈 것이었다.

“저기, 아저… 오빠! 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야영을 준비하려던 준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등급? 등급이 뭐였더라?’

준영은 상태창을 열어 확인을 해 보았다.



[등급 : 측정불가]



“모른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시스템도 모르는 걸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쳇, 생각보다 쪼잔하네.’

하지만 은용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가 알려 주기 싫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근데 여기서 그냥 잘 거예요? 너무 좀 트인 곳 같은데…….”

“어두우니까 여기서 한다.”

“네…….”

오늘은 몸이 좀 결릴 거 같았다. 이런 식으로 사방이 뚫린 위험한 곳에서 그냥 자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은용은 그 말만 하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항상 피곤한 하루지만, 오늘은 죽을 뻔도 하고 미친놈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더욱더 피곤한 하루 같았다.

‘괴물이 올 수도 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괴물이 어지간히 몰려오지 않는 이상, 저 미친놈이 처리해 줄 것이었다. 많은 각성자를 본 경험에 비춰 보면 최소 D등급 이상일 것이란 확인이 들었다.

F등급만 돼도 괴물 몇 마리는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던진 창의 위력과 정확도를 보면 그 이상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짐작 치고는 꽤나 날카로운 은용이었다.

‘응? 근데 창은 어디서 생긴 거지? 주워 온 건가? 그 아까운 걸 그냥 버리고 왔네.’

그녀가 누운 채 상념에 잠겨 있자, 준영이 한심한 표정으로 은용을 바라봤다.

“씻지도 않고 바닥에 그냥 드러눕다니… 거지야?”

그 말에 순간 간덩이가 부어올라 발끈하며 일어났다.

“아니, 아저씨가 여기서 자자면서… 엉?”

은용을 마치 더러운 생물처럼 바라보던 준영이 손을 휘젓자 두 개의 텐트가 허공에서 뿅 하니 나타났다.

“헐, 뭐, 뭐에요?”

은용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비벼도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건 현실이었다.

쿵!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꽤 큰 구조물까지 꺼냈다.

“저, 저건 또 뭐지…….”

그리고 준영은 기대하던 지구의 첫 야영에 그것을 꺼냈다. 바로 랜턴이었다.

이윽고 랜턴에 불이 들어와 주변을 밝혔다. 준영은 그것을 두 개의 텐트에 매달았다.

“아아…….”

지구에 돌아온 뒤 첫 야영이었다. 누나의 조언에 따라 오늘은 일행이 생겨 야영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기대하던 랜턴을 꺼낸 것이었다.

“좋구나.”

지구에 돌아오기 전의 장소에는 밤이 없었다. 랜턴을 설치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쓰지 않았다.

하지만 준영은 이 느낌을 그리워했다. 어두운 곳을 비춰 주는 빛.

이 따뜻한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그리움 끝에 본 랜턴의 빛에 준영은 무척이나 만족했다.

“하하.”

‘웃었어!’

지구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준영은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은용은 미친놈이라 그런지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 랜턴을 보고 좋아하다니 의외였다.

‘인형 얘기 싫어함. 랜턴 좋아함. 알아 둬야지.’

정확히는 랜턴을 좋아하는 게 아니지만, 그 사실을 은용이 알 리가 없었다.

“씻는다.”

“네?”

준영이 꺼낸 구조물은 3미터에 이르는 일자형의 샤워 부스였다. 검은 광택의 재질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기하하적인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규칙적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홈에서 푸른빛이 깜빡였다. 마치 SF 영화에서나 보던 디자인이었다.

준영은 익숙한 듯 느긋하게 구조물에 다가서자, 놀랍게도 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내부에는 전신 거울 같은 것이 박혀 있고 천장에는 작은 원반이 떠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씻을 수 있다.”

준영은 그 한마디만 하고 더러운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원반이 돌아가며 물줄기를 뿜어내었다.

지구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던 물건이 확실했다.

“시원하군.”

주변의 습기를 빨아들여 씻을 수 있게 만드는 이 간이 샤워 부스는 다른 차원의 문명이 만든 물건이었다. 준영이 가진 능력을 이용하여 구한 것이었다.

물 자체에 세정 기능이 있는지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퍼졌다. 따로 샤워 용품을 구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옷까지 입은 채 씻어 빨래까지 동시에 진행한 셈이었다.

지잉―

얼마 지나지 않아 물줄기가 멈추고 드라이가 시작되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깨끗해진 몸과 입고 있는 옷은 뽀송뽀송해졌고 좋은 향기를 풍겼다.

샤워 부스는 할 일이 완료되자 씻고 사용된 물을 수증기로 변화시켜 허공에 내뿜었다.

준영이 샤워 부스를 사용하자, 은용의 입은 아예 열린 채 닫힐 줄을 몰랐다.

“너도 씻어라. 그대로 들어가면 된다.”

얼이 빠진 채 부스 안으로 들어간 은용은 끝내주는 기분을 느꼈다. 따뜻한 물로 씻어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은용이 들어가자 준영이 씻을 때와는 다르게 문이 닫혔다.

“와, 이것도 능력인가?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그녀는 의문을 뒤로한 채 신나게 씻었다. 아예 신발과 옷도 벗어서 빨래까지 했다. 앞서 준영이 하는 것을 보니 드라이 기능도 있는 거 같았다.

잠시 후, 깨끗하고 뽀송뽀송해진 은용이 샤워 부스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씻고 나니 예쁜 얼굴이 살아났다.

“와, 기분 좋아. 정말 짱이에요, 오빠!”

오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은용은 가만히 준영을 쳐다보았다. 머리와 수염을 정리하지 않아서 야성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준영도 꽤 잘생겨 보였다. 정리만 잘한다면 훈남 소리를 들을 만했다. 샤워 한 번 하니 사람이 간사해졌다.

“라면 좋아하나?”

“라면요? 완전 먹고 싶어여어!”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은용이었다. 끝말에 애교가 절로 들어갔다. 팔팔 끓인 라면을 먹어 본 지 너무나 오래됐다. 항상 괴물의 시체만 먹다 보니 맛이란 걸 잊어버렸다.

준영은 피식 웃은 뒤, 허공에서 라면과 버너 등을 꺼냈다. 은용은 그 모습을 다시 봐도 신기했다. 많은 각성자들을 봐 왔지만 이런 능력은 단연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게 오빠 능력이에요? 물건 막 만드는 거?”

정확히는 만드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지만, 딱히 설명하기 귀찮은 준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이다.”

‘뽕라면’

끄덕끄덕.

은용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라면이 익는 것만 보고 있었다.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침이 계속 넘어갔다.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