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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뜻밖의 수확(1)





“우리가 남도 아닌데 계약서는 필요 없겠지요?”

“물론, 아우와 나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족하지 않겠나?”

“동감입니다.”

위험한 거래라는 것은 그도 승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약서는 필요가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안전한 거래였다. 1982년에 미국이 리비아 산 석유를 사들이지 않기로 할 때까지는.



그런데도 마크 리치는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우리와 거래할 시에는 제3국 국적의 선박을 이용하는 게 좋겠고, 몇 단계의 중개인을 이용해 자금을 세탁하듯이 원유도 세탁하는 게 아우에게도 이로울 걸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쯤 해두고 식사나 하러가세. 미리 준비해놓으라고 일렀으니 성찬은 못돼도 빈약하지는 않을 걸세.”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을 나섰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승지는 내심 카다피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발걸음 또한 경쾌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인 3월 17일 오전 9시 30분.

일행은 일박을 한 트리폴리 해안의 호텔에서 나와 리비아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아마르 카다피의 관저인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로 향하고 있었다.

승지가 마크 리치와 동승한 차안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니, 곳곳에 가다피의 초상화가 붙어 있어서 확실히 그의 위세를 알 수가 있었다. 트리폴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도 그의 초상화였다.

잠시 뒤에 차가 신호등에 걸려 정차를 했다. 앞서 있던 낡은 차는 시종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에 승지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가 대부분이었다.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고 있는데, 마크 리치가 말을 걸어왔다.

“무얼 그리 유심히 보고 있는 겐가?”

“차들이 대부분 낡은 것 같습니다.”

“중고차를 수입해서, 그것도 오래 타다보니 그런 것일세.”



승지가 내심 중고차를 수출하면 잘 팔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그가 물었다.

“곧 관저에 도착할 텐데, 기분이 어떤가?”

“워낙에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말 그대로 성정이 괴팍해서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일세. 그러니 언행에 각별히 조심하시게.”

“알겠습니다, 형님!”

“헌데, 카다피의 집무실이 몇 층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통상적으로 볼 때, 2층 내지 3층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일반인과는 달라. 1층에 있네. 내가 파악한 바로는, 높은 건물에 대한 심한 공포심이 있는 것 같아.”

“서방세계와의 마찰 때문이군요.”

“그래. 곳곳의 반군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까닭에 서방세력의 폭격을 받아서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니, 그런 공포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할 거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두 사람이 탄 차는 관저의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경계가 더욱 삼엄했다. 그래서 승지도 마음속에 경계심이 일고 있는데, 완전 무장을 갖춘 중령 계급장의 사내가 차로 다가왔다.

곧이어 그가 아랍어로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러자 마크 리치가 이탈리아어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자가 신통하게도 이탈리아 말을 알아들었다. 아니, 아주 유창하게 잘했다.

리비아가 이탈리아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은 때문인 듯했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마크 리치가 곤란한 표정으로 승지에게 말했다.

“카다피 원수는 이곳에 없다고 하는군. 지금 현재 벵가지 안가(安家)에 있는데, 그곳으로 오라면서 헬기를 보냈다는구만.”

“헬기를 보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렇지? 만약 차로 오라고 했으면 고생깨나 했을 터인데.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의 거리는 무려 1천 킬로미터가 넘어(1,024㎞). 만약 차로 간다면 시속 100㎞로 달려도 꼬박 10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일세.”



이때 밖에서 재촉하는 말과 제스처가 보여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쪽 차량에 타고 있던 양쪽 비서실장과 수행원들도 차에서 내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중령이 뭐라고 떠들어댔다.

곧이어 마크 리치가 이야기하기를, 7인승 헬리콥터라서 4인만 동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들도 3명이 타야 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결국 양쪽 비서실장만 동행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호텔로 돌아가도록 했다. 머지않아 일행은 중령의 안내로 아구스타웨스트랜드(AW) 사의 7인용 헬기에 탑승했다.

이내 헬기의 로터가 돌기 시작했다.



로터가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이야기하기가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마크 리치가 물었다.

“이 헬기가 어느 나라 제품인지 아나?”

“모릅니다.”

“이탈리아 산이야. 그만큼 이 나라는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은 관계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이탈리아와 가까워. 그래서 공사도 이탈리아에서 많이 수주했고, 필요 공산품도 그 나라에서 많이 수입하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대화는 계속 되었다. 비록 큰소리였지만.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일본, 영국 등이 리비아의 5대 무역국이야. 하지만 자국 석유수송을 위한 선박은 달라. 일본, 유고슬라비아, 스웨덴에서 유조선들을 사들이고 있지.”

일본 등의 3국에서 유조선을 사들이고 있다는 말에, 승지는 또 한 번 귀가 번쩍 뜨였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감정도 들었다.

“우리도 거대 조선소가 있어서 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는데, 아쉽군요.”

“정말인가?”

“그럼 형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높아진 언성 때문에 마크 리치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우, 진정 하시게. 사실은 나도 선박 건조 계획이 있어서 말이야.”

“정말입니까?”

“이 사람이. 하하하.”



똑같이 높아진 목소리에 끝내는 대소로 답한 마크 리치가 웃음의 여운이 남은 모습으로 말했다.

“우선은 유조선 2척과 벌크선 2척이 필요하네. 유조선이야 불요불급할 때 우리가 수송해주기 위함이고, 벌크선은 점차 광물 거래 비중이 높아지니 그에 대비한 것이지.”

“그럼 우리에게 건조를 맡기시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가능은 하지. 단, 내가 직접 조선소를 찾아가서 현장을 봐야겠네. 원유 거래야 돈만 왔다 갔다 하면 되지만, 유조선과 벌크선 건조는 문제가 달라. 솔직히 한국에서 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다는 게 나는 믿기지를 않네.”

“좋습니다. 특별히 바쁘신 일이 없으면 곧바로 한국으로 가시죠.”

“흐음… 특별히 바쁜 일은 없어. 직원들이 알아서 척척 잘해주니 말이야. 우리의 기업문화는 상당히 수평적이야. 그래서 직원들도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그리고 트레이더들에게 상당한 권한이 위임되어 있어.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구조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래 근무하는 사람이 많아.”



자신의 회사를 PR하는 데에 열심인 그를 보며 미소를 짓던 승지가 재촉을 했다.

“헌데 아직 확실한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만?”

“아우가 하는 거 봐서.”

“네?”

“하하하. 농담이고, 시간을 내기로 함세.”

“고맙습니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승지를 보고 마크 리치는 다시 한번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헬기는 수평고도를 유지하며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끊임없이 날아갔다.



* * *



항속거리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급유를 한 번 하고 4시간여를 날아간 헬기는 벵가지에 있던 대통령 안가의 푸른 잔디밭에 안착했다. 곧이어 일행은 이곳까지 안내해온 중령을 따라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정면의 2층 흰색 건물로 향했다.

해안 도시답게 간혹 심하게 부는 바람에 야자수가 부러질 듯 휘청거리는 가운데, 일행은 어느덧 현관에 도착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갔던 중령, 아지즈가 다시 나타나 말했다.

“두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두 분은 나와 함께 식당으로 갑시다.”

그러고 보니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승지와 마크 리치는 양복을 입은 사내를 따라 모처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젊은 카다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소로 마크 리치를 맞았다.

“이게 얼마만인가?”



마크 리치가 카다피가 내민 손을 잡으며 답했다.

“벌써 6개월은 된 것 같습니다, 각하!”

“벌써 그렇게 됐나?”

“네!”

마크 리치의 손을 놓은 카다피가 승지를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예지력이 뛰어나다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이번에 2차오일 쇼크가 발생하리라는 것도 석 달 전에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번에 오면서 다른 예측도 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언제?”

“내년 안에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 들으며, 승지는 카다피를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그의 이력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금년 38세. 방랑 생활을 하던 베두인족 유목민의 아들로서, 카다피는 리비아 사막의 한 천막에서 태어났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었으며, 1963년에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했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이자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일찍부터 이드리스 1세의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꾸준히 진급했던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동료 육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9년 9월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왕을 물러나게 한 뒤 정권을 잡았다. 이후 그는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또 리비아의 새로운 통치기구인 혁명평의회의장으로 뽑혔다.



1970년에 그는 리비아 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기지와 영국군 기지를 철수시켰다. 또 같은 해에 리비아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 공동체 대부분을 추방했다. 1973년에는 모든 외국인 소유의 석유 재산을 국유화했다.

한국과 리비아는 1970년대 이전부터 수교를 추진했으나, 양국 간에 정식으로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1978년 3월에 영사관계가 수립되면서부터이며, 1978년 5월 트리폴리에 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까지 막 떠올리던 승지는 주춤했다. 한 발 앞까지 다가온 카다피 때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인 시기를 알려줄 수는 없겠소?”

“내년 가을. 더 정확히는 9월쯤입니다.”

“흐흠…….”

생각에 잠기는 카다피를 바라보던 승지의 마음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자신을 두 사람이 마치 점쟁이 대하듯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뭔가를 건져가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그런 판국에 마크 리치는 한 술 더 뜨고 나왔다.

“사우디가 감산정책을 취할 거라는 예언도 했습니다.”

“흐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다피가 불쑥 승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의 장래도 예측할 수 있겠소?”

물론 그의 최후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먼 미래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하하하. 그러고 보니 우린 통성명도 안 했군. 나 무아마르 알 카다피요. 원래 내 이름은 더 길지만, 그 정도만 기억해도 될 것이오.”

그가 내민 손을 승지는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기업의 총수인 고승지라고 합니다.”



승지가 한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요것 봐라!’하는 표정이던 카디피가 질문을 던졌다.

“젊은 당신이 코리아에서 제일 큰 기업의 오너라고?”

“그렇습니다.”

“나도 젊은 나이에 혁명에 성공해 일찍 출세한 편이지만, 당신도 나 못지않군. 좋아요. 당신네 기업이 크다면 그 안에 건설사도 있소?”

“물론 있습니다.”

“조금 작은 공사기는 하지만 무척 빨리 완공해야 하는 공사 건이 하나 있는데, 가능하겠소?”

“무엇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대부분은 신용이 별로던데.”



혼자 중얼거리던 카다피가 이어서 말했다.

“가리우니스 의과대학이라고, 준공이 멀지 않았소. 그런데 뒤늦게 대학 내에 기숙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설계가 올라왔소. 따라서 9월 개학 시기에 맞추어 기숙사를 준공해주어야겠는데, 그게 가능하겠소?”

“가능합니다!”

승지의 단언에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기왕 말을 꺼낸 것이니, 마크 리치의 면을 보아서라도 당신에게 맡겨보겠소.”

“감사합니다.”

이때, 갑자기 마크 리치가 불쑥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