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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결실 및 회장취임(3)
취임연이 있은 다음날인 3월 13일 오전.
승지는 출근하자마자 기획조정실장 조민을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깍듯이 예를 갖추는 조민을 일별한 승지가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앉아요.”
“네, 회장님!”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승지가 말을 꺼냈다.
“어제 내가 행한 연설, 잘 들었지요?”
“네!”
“그걸 기초로 우리 그룹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한 달 내에 수립해서 보고해 주세요.”
“시간이 조금 빠듯…….”
승지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밤샘을 하더라도 한 달 내에 완성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차를 주문한 두 사람은 이후로 그룹의 발전방향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 * *
다음날인 3월 14일 밤 7시 30분.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승지는 효주의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효주는 딴에 아내라고 내일 유럽출장에 대비해 준비물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행에 필요한 속옷을 비롯해, 양말, 와이셔츠, 치약, 칫솔은 물론 비누까지 챙기는 어린 아내를 보며 승지가 말했다.
“칫솔은 몰라도 치약이나 비누 같은 건 안 챙겨도 돼.”
“그럼, 샴푸도?”
“물론이지.”
그때 갑자기 탁자 위에 있던 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이번에 새로 개통한 전화로, 1층과는 번호가 달랐다.
꼭 필요시에만 전화를 하도록 회사의 중역들에게만 알려준 전화번호였다.
“볼륨이 너무 크네.”
투덜거리면서 승지는 잠옷 바람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고승지입니다.”
[회장님, 접니다.]
“응? 건설 홍 사장?”
[네, 회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분이 좋아서 한 잔 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술을 먹고 전화했다는 말에 승지는 인상을 찡그리며 전화기의 볼륨을 조금 낮추었다.
아무래도 술을 먹으면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지는데다가, 그게 아니래도 볼륨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일이면 청약 마감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오늘까지 청약률이 50대 1이 넘었습니다. 업계 최고의 분양가임에도 말이죠. 그래서 매일 매일 들어오는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다보니 손에서도 돈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 무식하게 하세요. 그 정도면 주거래은행에 연락해 전담 행원을 하나 파견해달라고 해서 그쪽에 맡기지.”
[그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돈 세는 재미를 알게 되면 절대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게 됩니다. 하하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차제에 도곡동 땅도 곧바로 착공하고 싶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참, 그렇게 되면 두 곳이 거의 동시에 착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동시 발주가 되니, 규모가 커서 원가를 더 줄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할 직원인데, 빠듯하기는 해도 돌아갈 것 같기는 합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주세요.”
[네, 회장님! 충성!]
“뭡니까? 군대도 아니고.”
군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승지는 3대 독자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런 사유로 신검에서 이미 보충역에 편입된 상태였다.
참고로 이 당시에 2대독자는 6개월짜리 방위로 판정받아 복무를 해야 했다.
승지의 말에 홍 사장이 대소와 함께 말했다.
[하하하. 제 마음의 일단을 표현한 것입니다, 회장님!]
“끊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니 짐을 다 챙긴 효주가 물었다.
“건설사 사장이에요?”
“응.”
“근데… 나도 유럽에 함께 가고 싶다.”
“조만간 그럴 날도 오겠지.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그런 기회도 생길 거 아니겠어?”
“지금 한 말 잊으면 안 돼요?”
“알았어. 이만 잡시다. 헌데 오늘도 또 고통의 밤인가?”
“누가 참으래요?”
“우리 어린 신부를 위해.”
“고마워요.”
쪽!
어린 아내가 입술에 뽀뽀하는 정도는 용인해 주었기 때문에, 요즘은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 * *
다음날 오전 11시에 김포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12시간여의 비행 끝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곳에서 1시간의 대기 끝에 1시간 남짓의 비행을 해서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이렇게 총 14시간여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8시간의 시차로 인해 취리히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통관수속을 마치고 포터에게 짐을 들려 밖으로 나오니, 승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크 리치+Co AG사의 마크 리치 회장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반색하는 그에게 승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재미도 많이 봤지.”
“다행입니다.”
“회장 취임을 정식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본사로 가세.”
“네. 헌데 그전에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런가?”
승지는 이번에 동행한 정유사 이필구 사장을 보며 말했다.
“인사드리세요. 전에 제가 말한 바 있는 마크 리치 회장님이십니다.”
승지의 말에 이필구가 두 손을 내밀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필구라고 합니다.”
“정유사 사장이라면 나와도 연관이 깊으니 잘 지내봅시다.”
“네.”
“자, 고 회장은 내 차에 오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가져온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시죠.”
답을 하고 승지가 마크 리치의 고급승용차에 오르려고 하자, 소병규 비서실장은 순간 당황한 낯빛을 띠었다. 어느 차에 타야할지 헷갈리는 모양새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승지가 말했다.
“비서실장님도 다른 차에 타십시오. 단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승지가 차에 올라타서 문을 닫자마자, 이내 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취리히 공항을 벗어나니 계속해서 시골동네의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승지가 물었다.
“왜 본사를 금융 중심지인 월가도 아니고, 광물거래가 많은 런던도 아닌, 이곳 스위스에 두셨습니까?”
“두 곳보다 세금이 훨씬 싸기 때문이지. 그리고 위험한 거래를 많이 하다 보니, 힐링도 할 겸 이런 한적한 곳을 택하게 되었네.”
“그렇군요.”
“이번에 자네를 특별히 초청한 것은 물론 내가 싸게 산 원유를 고 회장에게 넘겨주고 싶은 욕심 외에도,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일세.”
“그게 누굽니까?”
“리비아의 카다피야.”
“네?”
“왜 이렇게 놀라는가?”
“서방 기업인이라면 모두 다 기피하는 위험인물이라서,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다는 말인가, 싫다는 말인가?”
자신의 물음에도 승지가 아무런 답이 없자, 마크 리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그를 소개시켜주려고 하는 이유는 원유 때문이 아니야. 그 나라에 곧 대규모 건설시장이 형성될 것일세.”
그의 말에 승지는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대수로 공사’가 떠오른 것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동아건설이 건설해서 크게 재미를 본, 당대 최고의 건설공사 중에 하나인 까닭이었다.
“좋습니다. 언제 만나는 것입니까?”
“허허, 이 사람이 왜이래? 좀 전에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달라붙는 것을 보니 좀 수상하기는 하지만, 자네 때문에 선물거래로 돈을 왕창 벌었으니 모두 용서해주지. 하하하.”
웃음을 멈추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일 출발할 걸세. 그래도 되지?”
“물론입니다.”
“좋아!”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차는 어느덧 바르(Baar)라는 조용한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세.”
“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지는 일대를 훑어보았다. 유리와 철근으로 둘러싸인 4층 건물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구불구불한 언덕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위스 초콜릿 포장지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이었다. 한국의 이발소에도 종종 걸려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승지는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는 걸 느꼈다.
“가세.”
“네.”
곧 두 사람과 일행은 하나가 되어 본사인 4층 건물로 향했다.
이내 그곳에 도착한 승지는 마크 리치의 안내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역시 상사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텔렉스와 타자기의 소음 속에, 원자재를 거래하기 위한 트레이더들과 매니저들의 고함 소리가 이쪽저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전화상으로 오가는 고함이었다.
그런 모습의 두 개 층을 둘러보고 4층 회장실로 안내된 승지는 마크 리치와 대좌했다. 승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둘만의 단독회담이었다.
“형님께서는 원유를 무척 싸게 사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야.”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우리 회사에게는 타사보다 조금 더 싸게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우 덕분에 대대적인 원유 선물거래로 톡톡히 재미도 보았고, 우리의 친분도 있으니 그 요청을 수용하도록 하겠네.”
“헌데 얼마나 싸게 주시겠습니까?”
“10%.”
“에이, 그건 싸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형님의 원유를 사면 이쪽저쪽으로 선적항구가 분산될 텐데, 선박 운임을 감안하면 안정적인 공급 쪽을 택하겠습니다.”
“흐흠… 그럼 20% 싸게 주지.”
“30% 싸게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도 형님께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는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이능(異能)의 재주가 있습니다. 간혹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데, 지금까지 그 꿈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 예측해 볼까요?”
“그래? 어디 한 번 예언해 보시게.”
“내년 연말이 가기 전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것입니다.”
“흐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크 리치가 말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후세인이라면 시아파교도가 다수인 이라크 국민을 이란의 호메이니가 선동할 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군.”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렇습니다. 또 하나, 사우디만은 다른 OPEC 회원국과는 달리 대대적인 감산 정책을 취할 것입니다.”
“유가가 오르는데 왜 감산을 택해? 비쌀 때 많이 팔아먹어야 되는데. 그건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세.”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우디만은 그런 정책을 취할 것입니다.”
이어서 승지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가격이 계속 오르면 석유 수입국들은 대체 에너지를 찾는 것은 물론, 에너지를 절약하여 결국엔 자국 및 석유생산국이 불리할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계산 때문입니다.”
“아무튼 좋네. 그 문제는 혼자서 깊이 생각해 보겠네. 헌데 얼마를 공급해주면 되겠는가?”
“우리 정유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양의 절반쯤이면 만족하겠습니다.”
“그게 얼만데?”
“400만 톤!”
“상당히 많은 물량이군.”
“이거 왜 이러십니까? 거래량의 십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텐데요.”
“좋아! 그렇게 하기로 하지.”
1979년에 한국이 수입을 예상하고 있던 원유량은 약 3천만 톤이었다. 그 중에서 1/4이 약간 넘는 800만 톤을 GL정유가 수입할 예정이었다.
취임연이 있은 다음날인 3월 13일 오전.
승지는 출근하자마자 기획조정실장 조민을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깍듯이 예를 갖추는 조민을 일별한 승지가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앉아요.”
“네, 회장님!”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승지가 말을 꺼냈다.
“어제 내가 행한 연설, 잘 들었지요?”
“네!”
“그걸 기초로 우리 그룹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한 달 내에 수립해서 보고해 주세요.”
“시간이 조금 빠듯…….”
승지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밤샘을 하더라도 한 달 내에 완성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차를 주문한 두 사람은 이후로 그룹의 발전방향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 * *
다음날인 3월 14일 밤 7시 30분.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승지는 효주의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효주는 딴에 아내라고 내일 유럽출장에 대비해 준비물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행에 필요한 속옷을 비롯해, 양말, 와이셔츠, 치약, 칫솔은 물론 비누까지 챙기는 어린 아내를 보며 승지가 말했다.
“칫솔은 몰라도 치약이나 비누 같은 건 안 챙겨도 돼.”
“그럼, 샴푸도?”
“물론이지.”
그때 갑자기 탁자 위에 있던 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이번에 새로 개통한 전화로, 1층과는 번호가 달랐다.
꼭 필요시에만 전화를 하도록 회사의 중역들에게만 알려준 전화번호였다.
“볼륨이 너무 크네.”
투덜거리면서 승지는 잠옷 바람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고승지입니다.”
[회장님, 접니다.]
“응? 건설 홍 사장?”
[네, 회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분이 좋아서 한 잔 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술을 먹고 전화했다는 말에 승지는 인상을 찡그리며 전화기의 볼륨을 조금 낮추었다.
아무래도 술을 먹으면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지는데다가, 그게 아니래도 볼륨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일이면 청약 마감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오늘까지 청약률이 50대 1이 넘었습니다. 업계 최고의 분양가임에도 말이죠. 그래서 매일 매일 들어오는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다보니 손에서도 돈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 무식하게 하세요. 그 정도면 주거래은행에 연락해 전담 행원을 하나 파견해달라고 해서 그쪽에 맡기지.”
[그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돈 세는 재미를 알게 되면 절대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게 됩니다. 하하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차제에 도곡동 땅도 곧바로 착공하고 싶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참, 그렇게 되면 두 곳이 거의 동시에 착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동시 발주가 되니, 규모가 커서 원가를 더 줄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할 직원인데, 빠듯하기는 해도 돌아갈 것 같기는 합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주세요.”
[네, 회장님! 충성!]
“뭡니까? 군대도 아니고.”
군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승지는 3대 독자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런 사유로 신검에서 이미 보충역에 편입된 상태였다.
참고로 이 당시에 2대독자는 6개월짜리 방위로 판정받아 복무를 해야 했다.
승지의 말에 홍 사장이 대소와 함께 말했다.
[하하하. 제 마음의 일단을 표현한 것입니다, 회장님!]
“끊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니 짐을 다 챙긴 효주가 물었다.
“건설사 사장이에요?”
“응.”
“근데… 나도 유럽에 함께 가고 싶다.”
“조만간 그럴 날도 오겠지.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그런 기회도 생길 거 아니겠어?”
“지금 한 말 잊으면 안 돼요?”
“알았어. 이만 잡시다. 헌데 오늘도 또 고통의 밤인가?”
“누가 참으래요?”
“우리 어린 신부를 위해.”
“고마워요.”
쪽!
어린 아내가 입술에 뽀뽀하는 정도는 용인해 주었기 때문에, 요즘은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 * *
다음날 오전 11시에 김포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12시간여의 비행 끝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곳에서 1시간의 대기 끝에 1시간 남짓의 비행을 해서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이렇게 총 14시간여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8시간의 시차로 인해 취리히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통관수속을 마치고 포터에게 짐을 들려 밖으로 나오니, 승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크 리치+Co AG사의 마크 리치 회장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반색하는 그에게 승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재미도 많이 봤지.”
“다행입니다.”
“회장 취임을 정식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본사로 가세.”
“네. 헌데 그전에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런가?”
승지는 이번에 동행한 정유사 이필구 사장을 보며 말했다.
“인사드리세요. 전에 제가 말한 바 있는 마크 리치 회장님이십니다.”
승지의 말에 이필구가 두 손을 내밀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필구라고 합니다.”
“정유사 사장이라면 나와도 연관이 깊으니 잘 지내봅시다.”
“네.”
“자, 고 회장은 내 차에 오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가져온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시죠.”
답을 하고 승지가 마크 리치의 고급승용차에 오르려고 하자, 소병규 비서실장은 순간 당황한 낯빛을 띠었다. 어느 차에 타야할지 헷갈리는 모양새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승지가 말했다.
“비서실장님도 다른 차에 타십시오. 단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승지가 차에 올라타서 문을 닫자마자, 이내 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취리히 공항을 벗어나니 계속해서 시골동네의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승지가 물었다.
“왜 본사를 금융 중심지인 월가도 아니고, 광물거래가 많은 런던도 아닌, 이곳 스위스에 두셨습니까?”
“두 곳보다 세금이 훨씬 싸기 때문이지. 그리고 위험한 거래를 많이 하다 보니, 힐링도 할 겸 이런 한적한 곳을 택하게 되었네.”
“그렇군요.”
“이번에 자네를 특별히 초청한 것은 물론 내가 싸게 산 원유를 고 회장에게 넘겨주고 싶은 욕심 외에도,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일세.”
“그게 누굽니까?”
“리비아의 카다피야.”
“네?”
“왜 이렇게 놀라는가?”
“서방 기업인이라면 모두 다 기피하는 위험인물이라서,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다는 말인가, 싫다는 말인가?”
자신의 물음에도 승지가 아무런 답이 없자, 마크 리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그를 소개시켜주려고 하는 이유는 원유 때문이 아니야. 그 나라에 곧 대규모 건설시장이 형성될 것일세.”
그의 말에 승지는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대수로 공사’가 떠오른 것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동아건설이 건설해서 크게 재미를 본, 당대 최고의 건설공사 중에 하나인 까닭이었다.
“좋습니다. 언제 만나는 것입니까?”
“허허, 이 사람이 왜이래? 좀 전에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달라붙는 것을 보니 좀 수상하기는 하지만, 자네 때문에 선물거래로 돈을 왕창 벌었으니 모두 용서해주지. 하하하.”
웃음을 멈추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일 출발할 걸세. 그래도 되지?”
“물론입니다.”
“좋아!”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차는 어느덧 바르(Baar)라는 조용한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세.”
“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지는 일대를 훑어보았다. 유리와 철근으로 둘러싸인 4층 건물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구불구불한 언덕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위스 초콜릿 포장지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이었다. 한국의 이발소에도 종종 걸려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승지는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는 걸 느꼈다.
“가세.”
“네.”
곧 두 사람과 일행은 하나가 되어 본사인 4층 건물로 향했다.
이내 그곳에 도착한 승지는 마크 리치의 안내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역시 상사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텔렉스와 타자기의 소음 속에, 원자재를 거래하기 위한 트레이더들과 매니저들의 고함 소리가 이쪽저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전화상으로 오가는 고함이었다.
그런 모습의 두 개 층을 둘러보고 4층 회장실로 안내된 승지는 마크 리치와 대좌했다. 승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둘만의 단독회담이었다.
“형님께서는 원유를 무척 싸게 사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야.”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우리 회사에게는 타사보다 조금 더 싸게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우 덕분에 대대적인 원유 선물거래로 톡톡히 재미도 보았고, 우리의 친분도 있으니 그 요청을 수용하도록 하겠네.”
“헌데 얼마나 싸게 주시겠습니까?”
“10%.”
“에이, 그건 싸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형님의 원유를 사면 이쪽저쪽으로 선적항구가 분산될 텐데, 선박 운임을 감안하면 안정적인 공급 쪽을 택하겠습니다.”
“흐흠… 그럼 20% 싸게 주지.”
“30% 싸게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도 형님께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는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이능(異能)의 재주가 있습니다. 간혹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데, 지금까지 그 꿈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 예측해 볼까요?”
“그래? 어디 한 번 예언해 보시게.”
“내년 연말이 가기 전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것입니다.”
“흐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크 리치가 말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후세인이라면 시아파교도가 다수인 이라크 국민을 이란의 호메이니가 선동할 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군.”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렇습니다. 또 하나, 사우디만은 다른 OPEC 회원국과는 달리 대대적인 감산 정책을 취할 것입니다.”
“유가가 오르는데 왜 감산을 택해? 비쌀 때 많이 팔아먹어야 되는데. 그건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세.”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우디만은 그런 정책을 취할 것입니다.”
이어서 승지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가격이 계속 오르면 석유 수입국들은 대체 에너지를 찾는 것은 물론, 에너지를 절약하여 결국엔 자국 및 석유생산국이 불리할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계산 때문입니다.”
“아무튼 좋네. 그 문제는 혼자서 깊이 생각해 보겠네. 헌데 얼마를 공급해주면 되겠는가?”
“우리 정유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양의 절반쯤이면 만족하겠습니다.”
“그게 얼만데?”
“400만 톤!”
“상당히 많은 물량이군.”
“이거 왜 이러십니까? 거래량의 십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텐데요.”
“좋아! 그렇게 하기로 하지.”
1979년에 한국이 수입을 예상하고 있던 원유량은 약 3천만 톤이었다. 그 중에서 1/4이 약간 넘는 800만 톤을 GL정유가 수입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