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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결실 및 회장취임(2)
세계 제일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 제시에 중역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가운데 승지의 표정이 갑자기 냉혹하게 변했다.
“이를 위해 저는 우선 각 계열사의 독립채산제를 제일 먼저 시행하고자 합니다. 독립채산제란 말 그대로 각 계열사 스스로 생존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적자가 나는 기업은 우리 그룹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부로, 적자가 나면 종전의 관행대로 그룹차원에서 지원해주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리십시오. 단언컨대 3년 연속 적자를 내는 기업은 확실하게 우리 그룹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승지는 잠시 연설을 중단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잠시 장내에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승지는 이를 무시한 채 곧바로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또 하나, 이를 위해 우리가 강력하게 실시할 것이 있으니, 바로 인재 제일주의입니다. 기업도 결국은 사람이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수한 인재들이 밑받침이 되었을 때, 우리는 거친 폭풍우에도 당당히 맞서 우리 기업을 세계 인류의 반열에 진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승지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이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부실장 재직 시부터 강력히 시행해, 올해 신입사원은 대대적인 광고 끝에 대한민국 최고의 연봉에 최고의 인재만을 엄선해 뽑았으니까요. 어찌됐든 이 정책은 앞으로도 강력하게 시행해 나갈 것입니다. 자! 일이란 백 마디 말보다는 실천, 실행이 앞서야 하는 법. 그러니 오늘은 이쯤 해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실내에 박수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진행을 맡았던 총무이사가 다시 단상에 섰다.
“2대 회장님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저녁 7시 정각에 GL호텔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따라서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은 내려가지 마시고, 예고해 드린 대로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그럼 이로써 2대 회장 취임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이때 단상 뒷자리에 함께 배석했던 소병규 비서실장이 옆자리에 있던 승지에게 말했다.
“상견례 겸 각 계열사 중역들과 인사를 나누시죠. 문 입구로 가셔서, 문을 나서는 사람마다 손을 잡아주시면 됩니다.”
“그럽시다.”
승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총무이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직은 회장님이 생소한 분도 많을 터. 문을 나서면서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회장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회장님부터 시행하시죠?”
“그럴까?”
곧이어 하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상견례가 차례로 진행되었고, 이 모든 것이 끝나자 승지는 회장실로 직행했다.
* * *
승지는 정식 퇴근 시간인 오후 6시보다 1시간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해서 할머니와 부모님께 막 인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효주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어머니, 정순덕이 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오늘 연회에 함께 참석한다고?”
“네, 엄마!”
“헌데 너무 어려 보여서 걱정이다만…….”
“헤헤헤. 걱정 마세요, 엄마.”
“잠깐. 이젠 결혼도 했으니 ‘엄마’ 말고 ‘어머니’라고 불렀으면 좋겠구나. 승지 너도 어머니라 부르고.”
“알겠습니다.”
“네, 어머님! 그런데 엄마, 아니 어머님. 어려 보일까봐 제가 가발도 준비해놨고요, 화장도 진하게 할 거에요.”
이 당시 여고생은 모두 단발머리였다. 그래서 틀어 올리지도 못하고 천생 나이가 들어 보이려면 가발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두발 및 교복이 자율화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올라가서 씻고 준비하렴.”
“어머님은 안 가세요?”
“나는 안 갈란다. 아들을 생각하면 좋은 자리지만, 네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자리거든.”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려가지고…….”
“괜찮다. 어서 올라가 봐라.”
“네, 어머님!”
곧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효주가 승지에게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들어.”
승지가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어린 신부가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2층 계단을 올라야겠어? 그래, 안 그래, 여봉~!”
끝에 가서는 코맹맹이 소리에 입술마저 가까이 왔기에, 승지는 얼른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들고 2층으로 향했다.
* * *
6시 40분.
승지는 예정 시간보다 20분 일찍 현장 부근에 도착했다.
소공동에 위치한 GL호텔을 수백 미터 앞둔 지점이었다.
GL호텔은 이전의 반도호텔을 부수고 새로 지어서 작년 3월 12일에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개업 1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승지가 효주와 함께 일찍 도착한 것은 혹시 일찍 도착할지도 모를 거물들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오늘 연회에는 정재계 거물들 대부분이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측에서는 신현확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를 비롯해 상공장관 등 각부 장관들이 상당수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정계의 인물로는 며칠 전인 3월 11자로 국회의장 임기가 끝난 정일권 씨는 물론, 차기 즉 10대 국회의장으로 내정된 백두진 씨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밖에 재계의 인물로는 정주연, 이병천, 김우종, 조성래 등 재계 서열 5위 안의 기라성 같은 총수들이 모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여타의 재벌 회장 등도 상당수 참석하기로 했다.
여기에 승지가 특별히 부회장을 보내 초청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었다.
승지가 호텔 정문에 도착해 보니, 각계에서 보내온 화환과 꽃다발 행렬이 양쪽으로 무려 50미터 이상이나 늘어서 있었다.
그만큼 재계서열 1위의 위용은 대단했다. 참고로 GL그룹은 간발의 차이로 아직은 재계서열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내부로 들어가 보니 내부 또한 화환과 꽃으로 뒤덮여 있다시피 했다.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승지는 곧장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2층에 위치한 그랜드 볼륨이 오늘의 연회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번거롭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도 없었다.
2층에 도착해 내부를 둘러보니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었다. 각 테이블마다 각종 술과 안주 및 컵 등이 세팅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식사도 할 수 있도록 한쪽 구석에는 뷔페식으로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쌍쌍이 춤도 출 수 있게끔 전면 무대 앞은 충분히 비워져 있었고, 10인조 악단도 대기하고 있었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승지는 다시 1층으로 향했다.
일층 로비에 선 승지는 효주와 함께 나란히 서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미래의 정주연 회장이었다.
깜짝 놀란 승지는 급히 앞으로 나가서 고개를 숙였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일찍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하하하, 우리가 남인가? 당연히 찾아와야지. 내부에서는 다툴지 몰라도, 외부에는 공동으로 대처해야 우리의 밥그릇을 챙길 수 있음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작년에는 GL그룹이 선방했어.”
“네?”
“우리가 재계서열 1위에 등극하는 줄 알았거든.”
“아, 네. 간신히 수성했죠.”
“하하하. 뭐 그렇다는 이야기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게.”
“네.”
“부친은 젊은 나이에 안 됐지만, 자네가 잘하리라 믿네.”
“감사합니다.”
“저기 조 회장도 오는구먼. 그럼 나 먼저 들어가 보겠네.”
“네, 그럼.”
연배 차이가 너무 나는 까닭에 승지는 그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주연 회장은 시종 그의 성정답게 호방한 웃음으로 승지를 대했다.
정 회장이 내부로 들어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샛별그룹의 조성래 회장이 다가와서 승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역시 2세 경영인이었다. 선친인 조홍제 회장이 197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본격적으로 주력 기업인 샛별물산, 동양나이론, 동양폴리에스터, 샛별중공업 등을 맡아서 경영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현확 부총리를 비롯해 각부 장관들, 그 뒤를 이어 정일권 전 국회의장과 차기 국회의장 등을 차례로 맞이하다 보니 어느덧 7시가 다 되었다.
소병규 비서실장이 승지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여기는 부회장님께 맡기고 2층으로 가보시죠.”
“그럽시다.”
곧이어 부회장 하준이 손님들을 맞고 승지는 2층으로 향했다.
* * *
총무이사의 안내로 마이크를 잡은 승지는 인사말을 시작했다.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함께 드시면서 좋은 친교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승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젊은 나이에 GL그룹이라는 거대기업의 총수가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만, 대한민국의 국부(國富)를 키우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룹을 보다 더 크게 키워, 보다 많은 종업원을 고용함으로써 경제 발전에도 기여토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잔칫날 음식을 앞에 두고 말이 많으면 눈총받기 십상이니, 제 말은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하하하!
짝짝짝!
웃음과 박수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총무이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 잔에 술을 따라주십시오. 술을 못하시는 분은 음료수라도 좋습니다. 하면 회장님께서 건배 제의를 할 것이고, 손님 여러분께서는 후창으로 ‘위하여’를 힘차게 외쳐주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후에 장내의 손님들이 모두 잔을 채우자 총무이사가 승지를 보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승지가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왕림하신 모든 분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위하여!”
하하하!
다시 한번 장내에 웃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GL그룹 2대 회장의 취임을 기념하는 연회가 화려한 막을 올렸다.
곧이어 친밀도와 이해관계에 따라 사교의 장이 펼쳐지는 와중에, 승지도 계속 자리를 이동하며 많은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그러면서 한창 주흥이 오르자, 사람들이 전면의 넓은 공간으로 나와 악단의 화려한 연주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장 2시간 동안 연회가 진행되었지만,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인사가 딱 두 명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이었다.
사실 이곳은 이들이 어울릴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로 인해 내년이면 정권을 잡게 될 1인자, 2인자와 미리 안면을 틀 기회는 이로써 좌절되었다.
하지만 참석지 않은 것을 핑계로 그들과 통교할 기회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승지는 더 이상 그들에 연연하지 않고 효주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어땠어?”
승지의 물음에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효주가 답했다.
“내내 즐거웠어요. 그런데 시종 당신보다 내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했어요.”
“그건 나도 느꼈어. 어쨌든 잘해줬어.”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한 번 참석하고 싶어요.”
“그렇게 좋았어?”
“모든 게 좋았어요. 호호호.”
“술도 한 잔 한 것 같은데?”
“마시려고 마신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음료수를 빙자해 술을 따라주었어요. 그렇게 해서 몇 모금 마신 술이 꽤 되네요.”
“이러다 마누라를 술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호호호, 저도 그렇게 될까봐 겁나네요.”
이렇게 두 사람은 정다운 모습을 연출하며 아름다운 봄날의 밤을 향유하고 있었다.
세계 제일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 제시에 중역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가운데 승지의 표정이 갑자기 냉혹하게 변했다.
“이를 위해 저는 우선 각 계열사의 독립채산제를 제일 먼저 시행하고자 합니다. 독립채산제란 말 그대로 각 계열사 스스로 생존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적자가 나는 기업은 우리 그룹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부로, 적자가 나면 종전의 관행대로 그룹차원에서 지원해주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리십시오. 단언컨대 3년 연속 적자를 내는 기업은 확실하게 우리 그룹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승지는 잠시 연설을 중단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잠시 장내에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승지는 이를 무시한 채 곧바로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또 하나, 이를 위해 우리가 강력하게 실시할 것이 있으니, 바로 인재 제일주의입니다. 기업도 결국은 사람이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수한 인재들이 밑받침이 되었을 때, 우리는 거친 폭풍우에도 당당히 맞서 우리 기업을 세계 인류의 반열에 진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승지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이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부실장 재직 시부터 강력히 시행해, 올해 신입사원은 대대적인 광고 끝에 대한민국 최고의 연봉에 최고의 인재만을 엄선해 뽑았으니까요. 어찌됐든 이 정책은 앞으로도 강력하게 시행해 나갈 것입니다. 자! 일이란 백 마디 말보다는 실천, 실행이 앞서야 하는 법. 그러니 오늘은 이쯤 해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실내에 박수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진행을 맡았던 총무이사가 다시 단상에 섰다.
“2대 회장님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저녁 7시 정각에 GL호텔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따라서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은 내려가지 마시고, 예고해 드린 대로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그럼 이로써 2대 회장 취임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이때 단상 뒷자리에 함께 배석했던 소병규 비서실장이 옆자리에 있던 승지에게 말했다.
“상견례 겸 각 계열사 중역들과 인사를 나누시죠. 문 입구로 가셔서, 문을 나서는 사람마다 손을 잡아주시면 됩니다.”
“그럽시다.”
승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총무이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직은 회장님이 생소한 분도 많을 터. 문을 나서면서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회장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회장님부터 시행하시죠?”
“그럴까?”
곧이어 하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상견례가 차례로 진행되었고, 이 모든 것이 끝나자 승지는 회장실로 직행했다.
* * *
승지는 정식 퇴근 시간인 오후 6시보다 1시간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해서 할머니와 부모님께 막 인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효주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어머니, 정순덕이 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오늘 연회에 함께 참석한다고?”
“네, 엄마!”
“헌데 너무 어려 보여서 걱정이다만…….”
“헤헤헤. 걱정 마세요, 엄마.”
“잠깐. 이젠 결혼도 했으니 ‘엄마’ 말고 ‘어머니’라고 불렀으면 좋겠구나. 승지 너도 어머니라 부르고.”
“알겠습니다.”
“네, 어머님! 그런데 엄마, 아니 어머님. 어려 보일까봐 제가 가발도 준비해놨고요, 화장도 진하게 할 거에요.”
이 당시 여고생은 모두 단발머리였다. 그래서 틀어 올리지도 못하고 천생 나이가 들어 보이려면 가발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두발 및 교복이 자율화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올라가서 씻고 준비하렴.”
“어머님은 안 가세요?”
“나는 안 갈란다. 아들을 생각하면 좋은 자리지만, 네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자리거든.”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려가지고…….”
“괜찮다. 어서 올라가 봐라.”
“네, 어머님!”
곧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효주가 승지에게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들어.”
승지가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어린 신부가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2층 계단을 올라야겠어? 그래, 안 그래, 여봉~!”
끝에 가서는 코맹맹이 소리에 입술마저 가까이 왔기에, 승지는 얼른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들고 2층으로 향했다.
* * *
6시 40분.
승지는 예정 시간보다 20분 일찍 현장 부근에 도착했다.
소공동에 위치한 GL호텔을 수백 미터 앞둔 지점이었다.
GL호텔은 이전의 반도호텔을 부수고 새로 지어서 작년 3월 12일에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개업 1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승지가 효주와 함께 일찍 도착한 것은 혹시 일찍 도착할지도 모를 거물들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오늘 연회에는 정재계 거물들 대부분이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측에서는 신현확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를 비롯해 상공장관 등 각부 장관들이 상당수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정계의 인물로는 며칠 전인 3월 11자로 국회의장 임기가 끝난 정일권 씨는 물론, 차기 즉 10대 국회의장으로 내정된 백두진 씨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밖에 재계의 인물로는 정주연, 이병천, 김우종, 조성래 등 재계 서열 5위 안의 기라성 같은 총수들이 모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여타의 재벌 회장 등도 상당수 참석하기로 했다.
여기에 승지가 특별히 부회장을 보내 초청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었다.
승지가 호텔 정문에 도착해 보니, 각계에서 보내온 화환과 꽃다발 행렬이 양쪽으로 무려 50미터 이상이나 늘어서 있었다.
그만큼 재계서열 1위의 위용은 대단했다. 참고로 GL그룹은 간발의 차이로 아직은 재계서열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내부로 들어가 보니 내부 또한 화환과 꽃으로 뒤덮여 있다시피 했다.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승지는 곧장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2층에 위치한 그랜드 볼륨이 오늘의 연회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번거롭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도 없었다.
2층에 도착해 내부를 둘러보니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었다. 각 테이블마다 각종 술과 안주 및 컵 등이 세팅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식사도 할 수 있도록 한쪽 구석에는 뷔페식으로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쌍쌍이 춤도 출 수 있게끔 전면 무대 앞은 충분히 비워져 있었고, 10인조 악단도 대기하고 있었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승지는 다시 1층으로 향했다.
일층 로비에 선 승지는 효주와 함께 나란히 서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미래의 정주연 회장이었다.
깜짝 놀란 승지는 급히 앞으로 나가서 고개를 숙였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일찍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하하하, 우리가 남인가? 당연히 찾아와야지. 내부에서는 다툴지 몰라도, 외부에는 공동으로 대처해야 우리의 밥그릇을 챙길 수 있음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작년에는 GL그룹이 선방했어.”
“네?”
“우리가 재계서열 1위에 등극하는 줄 알았거든.”
“아, 네. 간신히 수성했죠.”
“하하하. 뭐 그렇다는 이야기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게.”
“네.”
“부친은 젊은 나이에 안 됐지만, 자네가 잘하리라 믿네.”
“감사합니다.”
“저기 조 회장도 오는구먼. 그럼 나 먼저 들어가 보겠네.”
“네, 그럼.”
연배 차이가 너무 나는 까닭에 승지는 그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주연 회장은 시종 그의 성정답게 호방한 웃음으로 승지를 대했다.
정 회장이 내부로 들어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샛별그룹의 조성래 회장이 다가와서 승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역시 2세 경영인이었다. 선친인 조홍제 회장이 197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본격적으로 주력 기업인 샛별물산, 동양나이론, 동양폴리에스터, 샛별중공업 등을 맡아서 경영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현확 부총리를 비롯해 각부 장관들, 그 뒤를 이어 정일권 전 국회의장과 차기 국회의장 등을 차례로 맞이하다 보니 어느덧 7시가 다 되었다.
소병규 비서실장이 승지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여기는 부회장님께 맡기고 2층으로 가보시죠.”
“그럽시다.”
곧이어 부회장 하준이 손님들을 맞고 승지는 2층으로 향했다.
* * *
총무이사의 안내로 마이크를 잡은 승지는 인사말을 시작했다.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함께 드시면서 좋은 친교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승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젊은 나이에 GL그룹이라는 거대기업의 총수가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만, 대한민국의 국부(國富)를 키우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룹을 보다 더 크게 키워, 보다 많은 종업원을 고용함으로써 경제 발전에도 기여토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잔칫날 음식을 앞에 두고 말이 많으면 눈총받기 십상이니, 제 말은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하하하!
짝짝짝!
웃음과 박수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총무이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 잔에 술을 따라주십시오. 술을 못하시는 분은 음료수라도 좋습니다. 하면 회장님께서 건배 제의를 할 것이고, 손님 여러분께서는 후창으로 ‘위하여’를 힘차게 외쳐주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후에 장내의 손님들이 모두 잔을 채우자 총무이사가 승지를 보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승지가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왕림하신 모든 분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위하여!”
하하하!
다시 한번 장내에 웃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GL그룹 2대 회장의 취임을 기념하는 연회가 화려한 막을 올렸다.
곧이어 친밀도와 이해관계에 따라 사교의 장이 펼쳐지는 와중에, 승지도 계속 자리를 이동하며 많은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그러면서 한창 주흥이 오르자, 사람들이 전면의 넓은 공간으로 나와 악단의 화려한 연주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장 2시간 동안 연회가 진행되었지만,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인사가 딱 두 명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이었다.
사실 이곳은 이들이 어울릴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로 인해 내년이면 정권을 잡게 될 1인자, 2인자와 미리 안면을 틀 기회는 이로써 좌절되었다.
하지만 참석지 않은 것을 핑계로 그들과 통교할 기회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승지는 더 이상 그들에 연연하지 않고 효주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어땠어?”
승지의 물음에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효주가 답했다.
“내내 즐거웠어요. 그런데 시종 당신보다 내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했어요.”
“그건 나도 느꼈어. 어쨌든 잘해줬어.”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한 번 참석하고 싶어요.”
“그렇게 좋았어?”
“모든 게 좋았어요. 호호호.”
“술도 한 잔 한 것 같은데?”
“마시려고 마신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음료수를 빙자해 술을 따라주었어요. 그렇게 해서 몇 모금 마신 술이 꽤 되네요.”
“이러다 마누라를 술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호호호, 저도 그렇게 될까봐 겁나네요.”
이렇게 두 사람은 정다운 모습을 연출하며 아름다운 봄날의 밤을 향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