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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결실 및 회장취임(1)
1박 2일의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저녁나절 신랑신부는 승지의 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드린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효주는 새롭게 단장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와 함께 방을 둘러보던 승지는 안도했다. 책과 책상 등 그녀가 전에 쓰던 용품들이 방 한 편에 모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것도 있었다. 그건 더블침대였다.
그것도 서양인 부부도 쓸 수 있을 만한 대형 더블침대를 보고 승지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아무튼 이로써 두 사람의 소꿉장난 같은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 * *
다음날 오전 6시.
일어나자마자 승지는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이것은 고등학생 때부터 해온 그만의 루틴이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보지는 못할지라도,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전생과 이생을 거쳐 오래 산만큼 그의 인격도 성숙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고, 철저한 반성 속에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기 위한 그만의 각성제가 바로 찬물 수욕이었다.
15분에 걸쳐 빠르게 샤워를 끝낸 승지는 그길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정원 한쪽 구석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집의 북쪽 끝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비단잉어와 금붕어 등이 살고 있었고, 연꽃도 심겨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아버지, 고병윤은 시들어가는 연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념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음에도 아버지는 귀신 같이 승지를 알아차렸다.
“승지냐?”
“네.”
“신문은 이슬에 젖을까봐 들여다 놨다.”
“네.”
점점 작게만 보이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에 승지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승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던져진 신문들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할머니께 가서 아침 문안 겸 안마를 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2층에 있는 자신의 서재로 들어온 승지는 경향신문부터 펼쳐들었다. ‘公薦(공천) 윤곽 드러나’라는 머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12월 총선이 50일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어느 당에서 누굴 어느 지역구에 공천했다는 기사였다.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바로 옆의 기사에 눈을 주었다. 일본과 중공(中共)이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후속조치로서 비준서를 교환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일본을 방문한 등소평과 후쿠다 수상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다.
2면으로 넘기니 칼라TV 시판을 두고 아옹다옹하는 각계의 의견이 실려 있었다. 칼라방송은 아니더라도 칼라TV는 판매되어야한다는 재계의 목소리는 물론, 유관부처인 상공부와 문공부의 의견도 실려 있었다.
아직은 시판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결론보다 승지는 각 사의 생산대수에 더욱 주목했다. 대한전선 50만 대, 오성 30만 대, GL 20만 대, 한국내쇼날 10만 대 등으로, GL은 꼴찌에서 두 번째 순위였다.
게다가 국산화율 28%. 그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보고 승지는 TV의 심장에 해당하는 브라운관을 비롯해 주요 부품을 조기에 국산화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 * *
8시 50분 정각.
승지는 회장실로 출근을 했다. 여비서가 알아서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커피를 마신 승지는 이후 GL상사로 가서 원유선물 투자를 재촉했다.
이어 승지는 대치동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가보았다. 터파기가 한창인 것을 보고 승지는 만족한 표정으로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본사로 돌아온 승지는 전자 사장 강태구를 불러 칼라TV 브라운관 생산에 대해 물었다.
이미 50만 대 생산을 위한 공장건설에 들어갔다는 그의 말에 안심하고 승지는 다른 주요 부품도 국산화를 앞당기도록 주문했다. 이어 승지는 제과 사장 박찬수를 회장실로 불러들여 패스트푸드의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의 말인즉슨, 여러 종류의 제품을 시험 생산해가며 맛과 품질에 대한 평가를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소한 내년 초에는 출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승지는 이날의 업무를 마감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러 또 한 해가 저무는 12월 달이 되었다. 하지만 시절은 하 수상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 총회는 1979년 원유의 공식가격을 14.55달러로 인상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만해도 세계인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연말인 12월 27일이 되자, 세계 제2위의 석유수출 대국인 이란이 돌연 전면적인 대외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란의 이 같은 돌연한 수출중단 선언은 세계에 제1차 오일쇼크 이상의 충격과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곧 석유가격의 폭등으로 비화되었다.
배럴당 평균 12.6달러였던 석유가격이 연일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해가 바뀐 79년 1월 달에는 이미 20달러 선을 돌파했고, 3월 초가 되자 30달러 선마저 무너져버렸다.
2차 오일쇼크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 세계적인 재앙에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오로지 승지와 마크 리치만이 웃고 있었다. 원유 선물에 투자해 놓은 것이 뻥튀기 되어 돈으로 환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아파트 분양시장이었다.
터파기만 해도 분양을 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지라 분양광고를 냈지만, 전혀 반응이 없던 대치동 아파트였다.
그런데 20달러 선을 돌파한 1월 달이 되자 입질이 오기 시작했고, 2월 달이 되자 본격적인 청약 열기에 불이 붙었다.
이에 따라 평당 분양가가 72만 원으로서 주변의 68만 원보다 비싸 더욱 외면을 받았던 대치동 9천 세대의 청약률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마감 시한인 3월 15일을 앞두고서 말이다.
뿐만 아니었다. 원유팀이 특별상여금으로 200%를 받았다는 게 소문이 났다.
메이저사들이 대부분 미국계였기에 원유팀은 밤샘 근무가 필수였다.
이에 승지는 예상대로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그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200%의 특별상여금을 지급했었다. 이 사실이 그들의 자랑에 의해 주변으로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해, 이제는 전 사원이 알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 승지에 대한 그룹 내 이미지가 달라졌다. 젊은 놈이 회장 아들이랍시고 단번에 고위직에 오르더니 처음으로 행한 일이 그룹 내 구조조정. 이로 인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분양 건 및 원유 선물거래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은 졸지에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혜안을 칭송하는 소리들이 임원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지는 오래였고, 젊은 사원들조차도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술집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하루는 고병윤이 퇴근한 승지를 침실로 불렀다. 이제는 거동도 자유롭지 못해 누워 있는 날이 많은 그였다. 그런고로 주변 사람 모두가 입원을 권했지만, 고병윤은 한사코 이를 마다했다.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는 주의였다.
그로 인해 요즈음은 세브란스 병원의 주치의와 간호사가 수시로 집을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부름에 승지는 침실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승지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욱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사람. 하지만 눈만은 어느 고승보다도 맑고 갓난아기보다도 순진무구했다. 정말 생사를 초탈한 눈빛이었다.
승지는 그런 눈빛이 경이롭기보다는 오히려 슬펐다. 그래서 승지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고병윤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네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다. 수행 팀장이 때때로 들려주는 것은 물론, 부회장이나 여타 중역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네 소문을 전해주었는데, 모든 것이 긍정적이라 한시름 놓았다. 특히 요즈음 아파트 광풍이 불고, 원유 선물거래로 열 배 이상의 차익을 챙길 것이라는 전언에는 아비도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이제는 안심하고 회장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하시는 것 같아 중간에 끊으려다가 묵묵히 다 듣고 난 승지가 답을 했다.
“유럽이나 다녀와서…….”
“언제 가는데?”
“3월 15일 목요일부터입니다.”
“딱 일주일 남았구나.”
“그렇습니다.”
“헌데 내 생각은 다르다.”
“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기왕이면 회장 직함을 가지고 행하면 사업도 보다 순조로울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제 머리를 스스로 깎기에는 좀 부끄럽습니다.”
“그건 내가 부회장을 불러서 지시를 내릴 테니, 걱정 말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쿨럭, 쿨럭!”
“아버지!”
달려들려는 승지를 손을 저어 만류한 병윤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원기가 쇠해 그런 것이니.”
승지가 다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병윤이 말을 이었다.
“힘들구나……. 그만 나가봐라.”
“네.”
돌아선 승지는 방을 나오자마자 뛰었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입을 틀어막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 * *
부회장 하준의 주도 아래 3일 간의 준비 끝에 승지는 대회의실 단상에 섰다. 20여 개 각 계열사 사장은 물론 각사의 전무급 이상 중역만이 참석한 자리였다.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경기는 날로 악화되는 이 시점에, 아버님의 건강 악화로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취임을 한 이상, 저는 재계서열 1위의 아성을 굳게 지켜나갈 것이며, 더 나아가 세계 100대 기업을 지향해 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연설을 중단하고 잠시 장내를 훑어본 승지는 더욱 목소리 톤을 높여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 시점에서 세계 100대 기업에 진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꿈, 비전이 없는 개인이나 기업은 반드시 도태됩니다. 따라서 이상은 높게, 현실은 냉철하게 바라보며, 이 꿈을 위해 우리는 모두 힘을 모아 달려가야 합니다.”
승지의 연설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세상 일이 꿈만 꾼다고 이루어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기 계신 중역 여러분도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꿈에 걸맞은 정확한 세부 실천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세부 실천 목표를 저는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장내의 시선이 모두 승지에게로 뜨겁게 쏠렸다.
“첫째, 전자산업의 강력한 육성 드라이브 정책. 둘째, 자동차산업 진입. 셋째, 반도체사업 진출. 넷째, 금융 산업 진출. 다섯째, 고도의 정보통신산업 육성. 여섯째, 우주산업 진출. 일곱째, 로봇 및 헬스 케어를 비롯한 제반 사업 등. 이 일곱 가지 사업을 차례로 또는 병행하여 차근차근 육성해 나갈 때, 우리는 세계 100대 기업이 아니라 세계 1위의, 당당한 GL그룹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1박 2일의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저녁나절 신랑신부는 승지의 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드린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효주는 새롭게 단장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와 함께 방을 둘러보던 승지는 안도했다. 책과 책상 등 그녀가 전에 쓰던 용품들이 방 한 편에 모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것도 있었다. 그건 더블침대였다.
그것도 서양인 부부도 쓸 수 있을 만한 대형 더블침대를 보고 승지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아무튼 이로써 두 사람의 소꿉장난 같은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 * *
다음날 오전 6시.
일어나자마자 승지는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이것은 고등학생 때부터 해온 그만의 루틴이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보지는 못할지라도,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전생과 이생을 거쳐 오래 산만큼 그의 인격도 성숙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고, 철저한 반성 속에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기 위한 그만의 각성제가 바로 찬물 수욕이었다.
15분에 걸쳐 빠르게 샤워를 끝낸 승지는 그길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정원 한쪽 구석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집의 북쪽 끝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비단잉어와 금붕어 등이 살고 있었고, 연꽃도 심겨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아버지, 고병윤은 시들어가는 연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념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음에도 아버지는 귀신 같이 승지를 알아차렸다.
“승지냐?”
“네.”
“신문은 이슬에 젖을까봐 들여다 놨다.”
“네.”
점점 작게만 보이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에 승지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승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던져진 신문들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할머니께 가서 아침 문안 겸 안마를 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2층에 있는 자신의 서재로 들어온 승지는 경향신문부터 펼쳐들었다. ‘公薦(공천) 윤곽 드러나’라는 머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12월 총선이 50일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어느 당에서 누굴 어느 지역구에 공천했다는 기사였다.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바로 옆의 기사에 눈을 주었다. 일본과 중공(中共)이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후속조치로서 비준서를 교환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일본을 방문한 등소평과 후쿠다 수상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다.
2면으로 넘기니 칼라TV 시판을 두고 아옹다옹하는 각계의 의견이 실려 있었다. 칼라방송은 아니더라도 칼라TV는 판매되어야한다는 재계의 목소리는 물론, 유관부처인 상공부와 문공부의 의견도 실려 있었다.
아직은 시판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결론보다 승지는 각 사의 생산대수에 더욱 주목했다. 대한전선 50만 대, 오성 30만 대, GL 20만 대, 한국내쇼날 10만 대 등으로, GL은 꼴찌에서 두 번째 순위였다.
게다가 국산화율 28%. 그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보고 승지는 TV의 심장에 해당하는 브라운관을 비롯해 주요 부품을 조기에 국산화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 * *
8시 50분 정각.
승지는 회장실로 출근을 했다. 여비서가 알아서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커피를 마신 승지는 이후 GL상사로 가서 원유선물 투자를 재촉했다.
이어 승지는 대치동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가보았다. 터파기가 한창인 것을 보고 승지는 만족한 표정으로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본사로 돌아온 승지는 전자 사장 강태구를 불러 칼라TV 브라운관 생산에 대해 물었다.
이미 50만 대 생산을 위한 공장건설에 들어갔다는 그의 말에 안심하고 승지는 다른 주요 부품도 국산화를 앞당기도록 주문했다. 이어 승지는 제과 사장 박찬수를 회장실로 불러들여 패스트푸드의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의 말인즉슨, 여러 종류의 제품을 시험 생산해가며 맛과 품질에 대한 평가를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소한 내년 초에는 출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승지는 이날의 업무를 마감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러 또 한 해가 저무는 12월 달이 되었다. 하지만 시절은 하 수상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 총회는 1979년 원유의 공식가격을 14.55달러로 인상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만해도 세계인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연말인 12월 27일이 되자, 세계 제2위의 석유수출 대국인 이란이 돌연 전면적인 대외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란의 이 같은 돌연한 수출중단 선언은 세계에 제1차 오일쇼크 이상의 충격과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곧 석유가격의 폭등으로 비화되었다.
배럴당 평균 12.6달러였던 석유가격이 연일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해가 바뀐 79년 1월 달에는 이미 20달러 선을 돌파했고, 3월 초가 되자 30달러 선마저 무너져버렸다.
2차 오일쇼크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 세계적인 재앙에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오로지 승지와 마크 리치만이 웃고 있었다. 원유 선물에 투자해 놓은 것이 뻥튀기 되어 돈으로 환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아파트 분양시장이었다.
터파기만 해도 분양을 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지라 분양광고를 냈지만, 전혀 반응이 없던 대치동 아파트였다.
그런데 20달러 선을 돌파한 1월 달이 되자 입질이 오기 시작했고, 2월 달이 되자 본격적인 청약 열기에 불이 붙었다.
이에 따라 평당 분양가가 72만 원으로서 주변의 68만 원보다 비싸 더욱 외면을 받았던 대치동 9천 세대의 청약률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마감 시한인 3월 15일을 앞두고서 말이다.
뿐만 아니었다. 원유팀이 특별상여금으로 200%를 받았다는 게 소문이 났다.
메이저사들이 대부분 미국계였기에 원유팀은 밤샘 근무가 필수였다.
이에 승지는 예상대로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그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200%의 특별상여금을 지급했었다. 이 사실이 그들의 자랑에 의해 주변으로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해, 이제는 전 사원이 알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 승지에 대한 그룹 내 이미지가 달라졌다. 젊은 놈이 회장 아들이랍시고 단번에 고위직에 오르더니 처음으로 행한 일이 그룹 내 구조조정. 이로 인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분양 건 및 원유 선물거래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은 졸지에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혜안을 칭송하는 소리들이 임원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지는 오래였고, 젊은 사원들조차도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술집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하루는 고병윤이 퇴근한 승지를 침실로 불렀다. 이제는 거동도 자유롭지 못해 누워 있는 날이 많은 그였다. 그런고로 주변 사람 모두가 입원을 권했지만, 고병윤은 한사코 이를 마다했다.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는 주의였다.
그로 인해 요즈음은 세브란스 병원의 주치의와 간호사가 수시로 집을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부름에 승지는 침실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승지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욱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사람. 하지만 눈만은 어느 고승보다도 맑고 갓난아기보다도 순진무구했다. 정말 생사를 초탈한 눈빛이었다.
승지는 그런 눈빛이 경이롭기보다는 오히려 슬펐다. 그래서 승지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고병윤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네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다. 수행 팀장이 때때로 들려주는 것은 물론, 부회장이나 여타 중역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네 소문을 전해주었는데, 모든 것이 긍정적이라 한시름 놓았다. 특히 요즈음 아파트 광풍이 불고, 원유 선물거래로 열 배 이상의 차익을 챙길 것이라는 전언에는 아비도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이제는 안심하고 회장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하시는 것 같아 중간에 끊으려다가 묵묵히 다 듣고 난 승지가 답을 했다.
“유럽이나 다녀와서…….”
“언제 가는데?”
“3월 15일 목요일부터입니다.”
“딱 일주일 남았구나.”
“그렇습니다.”
“헌데 내 생각은 다르다.”
“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기왕이면 회장 직함을 가지고 행하면 사업도 보다 순조로울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제 머리를 스스로 깎기에는 좀 부끄럽습니다.”
“그건 내가 부회장을 불러서 지시를 내릴 테니, 걱정 말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쿨럭, 쿨럭!”
“아버지!”
달려들려는 승지를 손을 저어 만류한 병윤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원기가 쇠해 그런 것이니.”
승지가 다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병윤이 말을 이었다.
“힘들구나……. 그만 나가봐라.”
“네.”
돌아선 승지는 방을 나오자마자 뛰었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입을 틀어막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 * *
부회장 하준의 주도 아래 3일 간의 준비 끝에 승지는 대회의실 단상에 섰다. 20여 개 각 계열사 사장은 물론 각사의 전무급 이상 중역만이 참석한 자리였다.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경기는 날로 악화되는 이 시점에, 아버님의 건강 악화로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취임을 한 이상, 저는 재계서열 1위의 아성을 굳게 지켜나갈 것이며, 더 나아가 세계 100대 기업을 지향해 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연설을 중단하고 잠시 장내를 훑어본 승지는 더욱 목소리 톤을 높여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 시점에서 세계 100대 기업에 진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꿈, 비전이 없는 개인이나 기업은 반드시 도태됩니다. 따라서 이상은 높게, 현실은 냉철하게 바라보며, 이 꿈을 위해 우리는 모두 힘을 모아 달려가야 합니다.”
승지의 연설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세상 일이 꿈만 꾼다고 이루어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기 계신 중역 여러분도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꿈에 걸맞은 정확한 세부 실천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세부 실천 목표를 저는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장내의 시선이 모두 승지에게로 뜨겁게 쏠렸다.
“첫째, 전자산업의 강력한 육성 드라이브 정책. 둘째, 자동차산업 진입. 셋째, 반도체사업 진출. 넷째, 금융 산업 진출. 다섯째, 고도의 정보통신산업 육성. 여섯째, 우주산업 진출. 일곱째, 로봇 및 헬스 케어를 비롯한 제반 사업 등. 이 일곱 가지 사업을 차례로 또는 병행하여 차근차근 육성해 나갈 때, 우리는 세계 100대 기업이 아니라 세계 1위의, 당당한 GL그룹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