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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린 신부(2)





잠시 집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 단골 양복점 사장이 지체 없이 달려왔다. 이에 승지는 양복을 맞춘 후 어머니로부터 신신당부를 들었다. 아직 패물도 맞추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냐면서 효주네 집에 도착하는 대로 시간 약속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차를 몰고 나갔다. 도로에 나가니 벌써 퇴근시간 무렵이라 한남동에서 평창동으로 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부회장 집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

승지는 차에서 내려 인터폰을 눌렀다.



미래와는 달리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영상시스템이 아닌지라 안에서 누군가 물어왔다.

“누구세요?”

효주의 목소리였다.

“일찍 왔다?”

“아, 오빠!”

두 말 않고 인터폰이 끊어졌다. 그대로 달려 나오는 모양인 듯했다.

짐작대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방 쪽문이 열렸다.

“방과 후 공부는 안하고 너무 일찍 오는 것 아니냐?”

“그놈의 공부소리 좀 그만해요.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품으로 달려드는 효주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승지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뽀뽀.”

“뭐?”

품에서 떼어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효주는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뽀뽀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알밤을 주며 승지가 말했다.

“정신 차려. 고등학생이 어딜.”

“곧 결혼할 건데, 뭐가 어때서?”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설마… 나하고 결혼하고도 뽀뽀 안 하는 건 아니지?”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문 앞에서 이러고 서 있는 게 민망해서 승지가 재촉하는 데도 그녀는 약속을 강요했다.

“약속한 거다, 오빠!”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기나 하자.”

“앗싸!”

효주는 이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아니 비행체가 되어 양손을 벌린 채 정원을 날아다녔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먼저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며 승지가 물었다.

“부회장님은 퇴근하셨지?”

“부회장이 뭐야? 장인이라고 해야지.”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퇴근하셨어?”

“아니, 할머니만 계셔. 그나저나 오빠, 사람 눈 빠지게 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매일 시댁에 전화 걸었거든? 오빠 언제 오냐고. 선물은 사왔어?”

“아참, 가방을 안 들고 들어왔다. 네가 가서 트렁크 열고, 여행용 가방 좀 꺼내와. 키 여기 있다.”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차 키를 던져주자 효주가 냉큼 받으며 말했다.

“선물이라도 사왔으니 용서해준다. 결혼하고 나서는 절대 나를 종 부리듯 하면 안 돼.”

“알았다, 알았어.”

효주와 있으면 승지는 항상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곧이어 효주가 트렁크를 들고 오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것을 일부러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모양새라니. 게다가 효주는 한 술 더 떴다.

트렁크를 잔디에 내려놓더니 ‘에고, 힘들다!’라면서 나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승지가 고함을 질렀다.

“빨리 안 와!”

“오빠는 남자가 돼가지고 들어줄 생각은 않고.”

여전히 양손으로 낑낑거리며 가방을 들고 오는 효주였다. 하지만 속도는 종전보다 조금은 빨라졌다. 보다 못한 승지가 다가가서 가방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장모님 보러가자.”

“정말?”

“결혼하기 전에 한 번 뵈어야 할 거 아냐. 식장에도 못 오실 텐데.”

“아이고, 착해라, 우리 아기. 잘 생각했어.”



등까지 두드려주며 하는 말에 승지는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 내…….”

“아이고, 우리 아기. 배고프지? 어서 들어가자. 이 엄마가 저녁 챙겨줄게.”

“갖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돌려놔라.”

“호호호. 재밌다, 재밌어. 어서 들어가요, 오빠!”

효주가 팔짱까지 척 끼며 하는 말에, 승지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부엌에서 나오던 가정부가 승지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네.”

간단하게 답한 승지가 할머니 방으로 향하는데, 오십대 중반의 가정부가 그에게 물었다.

“저녁 드시고 가실 거죠?”

“네.”

“아가씨 때문에 매일 1인분씩 저녁을 더 해뒀어요.”

쓸데없는 말까지 하며 가정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입을 가리고 소리죽여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 사람이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할머니! 오빠 왔어요.”

“오,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네, 할머니!”

승지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는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를 단정히 빗고 계셨다.

할머니가 돌아앉으며 물었다.

“외국으로 출장을 갔었다며?”

“네, 할머니! 간 김에 할머니 선물도 좀 사왔는데.”

할머니가 궁금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물었다.

“뭔데?”

“인삼제품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건강에 좋다는 인삼인데 마다할 리가 있니?”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헌데 결혼식에는 오실 거죠?”

“암, 가야지. 우리 집안의 장녀요, 첫 경사인데.”



가방에서 홍삼엑기스 두 박스를 꺼내며 승지가 말했다.

“하나는 장인어른 거.”

그걸 냉큼 받아들며 효주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내 건?”

“화장품 사왔어. 결혼 예물 겸.”

“참! 우린 반지도 안 맞춰요?”

“아, 맞춰야지. 안 그래도 어머니가 신신당부를 하셨어. 가는대로 시간약속 잡으라고.”

“너무 늦었구나.”



할머니의 말에 승지가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정 뭐하면 그 자리에서 손가락에 맞는 걸로 사죠 뭐.”

“오빠는 꼭 저렇다니까. 결혼에는 정말이지 신경도 안 쓰고. 나 처음 결혼하는 거거든요? 일생일대에 한 번 하는 결혼인데, 남자가 저렇게 무관심해서야 원.”

효주의 쇳소리 나는 푸념에 승지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해줄게.”

“정말이죠?”

“그럼, 내 색시인데.”

“호호호, 좋아요! 그 말로 모든 걸 용서해주겠어요.”

“아이고, 너희들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한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구나. 갓 혼인했을 때가 떠올라.”



할머니의 말에 승지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할머니 돈 내세요.”

“왜?”

“공짜로 젊은 시절로 돌아갔으니까요.”

“호호호. 공짜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도 힘이 드는구나.”

할머니의 유식한(?) 말에 승지와 효주의 눈이 마주쳤다.

이때,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가정부의 목소리에 할머니가 한 마디를 하셨다.

“애비 오거들랑 같이 먹지 않고서?”

“매일 늦게 퇴근하시는데 언제 기다려요. 오늘은 엄마 병문안도 하고, 패물도 맞춰야 된단 말이에요.”

효주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할머니.”

“그럼 우선 너희 둘만 먹거라. 나는 애비 오거든 먹으련다.”

“흥! 할머니는 아빠밖에 몰라.”

효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먼저 방을 나섰다.

그 모습에 할머니는 어이가 없는지 ‘저게, 저게’라는 말만 거듭했다.

그때였다. 효주가 돌아서서 혀를 내밀고는 ‘메롱~!’하며 방긋 웃자, 할머니도 표정이 풀리며 어설픈 미소를 지으셨다.



* * *



식사를 끝내고 승지가 디저트로 나온 사과와 배를 먹고 있는 동안, 효주는 전화통에 매달렸다.

“엄마!”

친엄마가 아니라, 지금 효주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호칭하고 있었다.

[오, 효주냐?]

“네. 혹시 잊으신 것 없으세요?”

[있지. 승지 그놈 때문에 미처 네 패물도 마련치 못했구나.]

“오빠한테 전해 들었어요.”

[그래. 시간만 잡거라. 장소는 명동의 금옥당이다.]

“그럼 8시에 거기서 봬요, 엄마.”

[그래. 우리 효주는 언제나 딸처럼 살가워서 좋아.]

“아빠한테도 전화해야 돼서 끊어야겠네요, 엄마.”



[그래, 이따가 보자. 참, 바깥사돈이 직접 나오시는 거니?]

“그래야지 어쩌겠어요. 종합병동인 사람이 나올 수는 없으니…….”

[안사돈 때문에 걱정이구나.]

“그러려니 해야죠. 이제 와서.”

[말하는 걸 보니 이젠 효주도 다 컸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새삼스럽게. 내일 모레면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안겨줄 며느리한테.”

[호호호. 효주랑 얘기하고 있으면 항상 재미있어, 즐겁기도 하고.]

“예쁘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끊을 게요.”

[그래라.]

이후 효주는 부회장에게도 연속해서 전화를 걸어 8시 약속을 잡았다.



* * *



신촌 세브란스병원.

효주의 어머니는 4층 입원실 중에서도 독방을 사용하고 계셨다. 그녀는 효주를 낳고는 자궁에 혹이 생겨 자궁 전체를 들어냈다. 혹을 그냥 두면 암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말에 자궁 전체를 들어낸 것이었다.

그 결과 효주 외에는 자식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40대 이후에 만성신부전이 발생했고, 이후에도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 고관절수술 등의 여러 질병에 차례로 걸려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50대 이후로는 장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병원을 찾지 않으면 효주도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

“안녕하세요?”

두 사람의 인사에 효주의 어머니가 환한 웃음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오늘은 같이 왔구나?”

“네, 장모님!”

“호호호. 승지 입에서 장모님 소릴 들으니, 이젠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는 말을 해도!”

효주의 뾰족한 음성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승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갈수록 인물이 훤해지는구나! 효주는 좋겠다. 저런 미남을 신랑으로 둬서.”

“얼굴 뜯어먹고 사남?”

“그런데 네 눈은 왜 승지에게서 떠나질 못하니?”

“호호호. 추남보다는 미남이 낫지. 엄마, 다리 주물러드릴까? 오늘은 부기 좀 빠졌어?”

“됐다, 이것아! 그나저나 식장에 가보지 못해 어쩌지…….”

“그래서 미리 찾아왔습니다.”



승지의 답변에 효주의 어머니, 정순덕 여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다리만 괜찮아도 반드시 가야되는 건데.”

어느새 정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효주가 급히 병상의 어머니에게 달려들더니,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오빠도 엄마한테 잘할 거예요. 그러니 오래 오래나 사세요.”

“아무렴, 오래 오래 살아서 외손자도 보고 외손녀 낳는 것도 봐야지.”

“좋았어! 그 정신 잊지 말아요, 엄마!”

“물론이지.”



그 순간, 승지는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를 보고 정 여사가 말했다.

“너희들 다른 약속 있니?”

“응, 패물 맞추려고. 박 여사님하고 아버지도 나오시기로 했어.”

“박 여사?”

“시어머니 될 사람인데 성도 모르면 어떡해?”

“사돈은 내 이름 안다더냐?”

승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모르십니다.”

“거봐. 그나저나 사위 패물정도는 내가 챙겨줘야 되는 건데.”

“아빠가 오시기로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나 때문에 네 아빠가 고생이 너무 많아. 새장가를 가라고 해도 안 가고.”

“막상 가봐. 눈에서 불이 날 걸.”

“호호호, 그건 그래.”



이후로 5분을 더 병실에서 머문 두 사람은 정 여사의 재촉에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명동으로 향한 두 사람은 귀금속 가게에서 각자의 패물을 맞췄다.

그래서 맞춘 패물이, 효주의 것은 1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와 루비가 박힌 다섯 돈의 금목걸이, 다섯 돈의 금팔찌였다. 승지는 단지 석 돈의 금에 5부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하나만을 맞추었다.

이로써 대충 결혼 준비가 끝나자 승지는 세 사람과 함께 귀금속 가게를 나왔다.

거리를 걸으며 승지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생에나 지금이나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별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