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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어린 신부(1)





아이아코카의 말대로 파산 직전의 크라이슬러사라면 은행도 분명 대출을 꺼릴 것이다. 아니 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각지 않으려 해도 승지가 생각날 터였다.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한 승지가 말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 벌써 가려고?”

“네.”

“오늘 비록 처음 만났지만, 십년지기 같은 사람을 그냥 보낼 수야 있나. 함께 점심식사라도 하고 가시오.”

“아닙니다. 다음 일정이 잡혀 있어서.”



다음 일정이 잡혀 있다는 말은 빈말이었다. 더 이상 머무는 것이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일정을 핑계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다음 일정이 잡혀 있다는 말에는 아이아코카도 승지를 놓아주어야 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음에도 미국에 들르면 꼭 나를 만나고 가시게.”

“그러겠습니다.”

승지는 아이아코카의 배웅을 받으며 그의 집을 나섰다.



* * *



곧장 벨 에어 호텔로 돌아온 승지는 자신의 방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호텔보다도 넓은 창이 특색인 이 호텔의 객실 창을 통해 금빛 잔디를 바라보고 있자니,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한국 생각이 났다.

돌아가면 곧 결혼식을 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생각에 잠시 많은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승지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승지가 문 쪽으로 시선을 주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병규입니다, 부실장님!”

“들어오세요.”

“네.”

이내 문을 열고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들어왔다. 다른 한 사람은 전자 사장 강태구였다.



그를 향해 승지가 물었다.

“실리콘 밸리는 둘러보셨습니까?”

“네, 부실장님!”

“사무실은요?”

“적당한 곳으로 세 군데를 봐뒀는데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이라도 결정해서 계약을 하세요. 내일은 돌아갈 예정이니까. 그리고 명색이 독립 법인이기는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요즘 트랜드라든가, 인재 확보, 더 나아가 첨단 기술 확보에 초점을 맞춘 법인이니, 열 명 내외로 인원을 두고, 전자 쪽에서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를 다섯 명만 파견하세요. 나머지는 상사원으로 충원해 정보를 모으는 역할을 하도록 할 테니까요. 내 말 이해하십니까?”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시선을 소병규 비서실장에게 돌린 승지가 말했다.

“상사원 다섯 명은 미국 지사장에게 일임하여 그가 선임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하세요. 아무래도 미국 실정에 밝은 사람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미국주재 상사원이 부족하다면 본국에서 더 충원해주는 것으로 하고요.”

“알겠습니다, 부실장님.”

“그럼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식사나 하러 갑시다.”

“네.”

승지가 나가자 두 사람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 * *



13시간에 걸친 비행과 LA와의 16시간에 이르는 시차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니 꼬박 하루를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결혼날짜가 미국에 있을 때에만 해도 나흘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삼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귀국 인사를 하기 위해 승지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인 할머니의 방부터 찾았다.

노크를 하고 유일하게 미닫이 문인 할머니의 방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반색을 하며 승지를 반겼다.

“아이고, 우리 손자! 나는 혼인하기 싫어서 도망간 줄 알았다.”



할머니는 75세지만 백발이 아닌 반백이었다. 거기에 쪽진 머리를 해서 비녀를 꽂고 계신 모습이 더욱 정갈해 보였다.

그런 할머니의 말씀에 승지는 어이없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도 참!”

“그래, 잘 다녀왔고?”

“누가 누구 안부를 묻는 거예요.”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 같은 손주인데, 누가 먼저 안부 인사를 전하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할머니의 손주 사랑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승지는 할머니의 무한 사랑에 감사하며 얼른 준비한 선물을 전해드렸다.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산 홍삼제품이었다.

“할머니. 홍삼인데요, 잡숫고 오래오래 사세요.”

“인삼을 많이 먹으면 죽을 때 고생한다는 말도 있던데…….”

“다 낭설이에요. 설령 그렇다 해도 일단은 건강히 오래 사셔야죠.”

“그건 그렇다만. 점심은 먹었니?”

“기내식으로 해결했어요.”

“그건 그렇고, 저녁은 효주네 집에 가서 먹거라.”

“무슨 일 있어요?”

“효주한테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단다. 오빠가 왜 빨리 안 돌아오느냐고 걱정이 대단했어.”

“하하하. 그래서 할머니가 도망 운운하셨던 거군요.”



“그래. 자, 이제 이 할미는 됐고, 아비랑 어미에게도 인사드려야지?”

“네, 할머니. 그전에 조금만 주물러 드리고 나갈게요.”

“안 그래도 아비가 준 이번 달 용돈이 그대로 다 남아 있구나.”

“하하, 이젠 안 주셔도 돼요. 잡수고 싶은 게 있으시면 돈 아끼지 마시고,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그렇지 않아도 아비로부터 네 얘기는 들었다. 내가 준 용돈을 한 푼도 허투루 안 쓰고, 그 돈을 다 모아서 땅을 사놓은 게 수백 배의 차익을 남겼다며?”

“다 할머니 덕분이에요.”

“아니다. 네가 그만큼 알뜰히 모았기 때문이지. 나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주고 싶었단다.”

“고마워요, 할머니.”



승지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보료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신 할머니의 어깨부터 주물러드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시원하다! 아이고, 시원해! 아, 거긴 너무 아파! 살살.”

“네, 할머니.”

10분간에 걸쳐 할머니를 주물러드린 승지는 이어 아버지가 계신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고병윤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승지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다. 괜스레 인생이 무상한 생각이 들어서. 별 탈은 없었고?”

“네. 계획대로 모두 이루어져서 만족스러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러나 저러나 이젠 결혼식이 삼일밖에 안 남았으니, 준비를 해야지?”

“제가 뭐 준비할 게 있나요. 머리나 단정히 깎으면 되지.”

“그래, 머리도 단정히 깎아야지. 참, 양복은?”

“양복이야 입던 걸 그대로…….”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결혼식인데 그러면 되겠니?”



“맞추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늦긴 뭘 늦어? 당장 내 단골 양복점에 전화해서 사장을 부를 테니 지금이라도 맞춰.”

“가봉 시간도 있고…….”

“다 가능하니 걱정 말고 맞추라면 맞춰.”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식이 끝나면 피로연은 집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피로연도 개최해요?”

“그래. 우리 집의 대들보가 장가를 가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그래도 낭비 같아서…….”

“그리 생각할 줄 알았다. 그래서 사회자도 의미 있는 사람으로 골랐어.”

“누군데요?”

“너도 작년 이리역 폭발사고 기억하지?”

“그럼요. 얼마나 큰 사고였는데요.”



이리역 폭발사고는 작년, 그러니까 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다이너마이트용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 30여 톤을 실고 역에 정차해 있던 한국화약 소속의 화물열차가 폭발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1,158명이 다쳤다. 또한 반경 500미터 안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파괴돼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사고는 이때까지 발생한 폭발 사고 중에 최악으로 꼽혔다.



“그날 이리에서 공연 중에 사고가 난 와중에도 가수 하춘화를 업고 나온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있다. 아직 무명이기는 해도 이런 의리의 사내라면 꼭 불러서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피로연 사회자로 내정한 거야.”

‘이주일이 아직은 무명이었구나.’

전생의 기억 속에서 그는 이미 대스타였기 때문에, 승지는 그가 아직 무명이라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 외에도 유명 대중가수는 물론이고 판소리의 대가랑 명창도 대거 불렀다.”

“그때면 전 신혼여행을 가고 있을 테니 그건 뭐 알아서…….”

“신혼여행지는 결정했니?”

“제주도로 1박 2일을 다녀오려고요.”

“너무 짧지 않아?”

“고삐리 데리고 뭐하게요?”



퉁명스러운 아들의 말에 고병윤은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전 이만 엄마한테 가볼게요.”

말과 함께 등을 돌리는 아들을 향해 고병윤은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아! 선물은 없어?”

“면역력에 좋다는 홍삼제품을 사왔으니 할머니랑 나눠 드세요.”

그래도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 홍삼제품을 사왔다고 하니, 외국산 선물이 아니라고 타박하려다가 병윤은 꿀꺽 말을 삼켰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안방으로 들어온 승지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엄마, 보고 싶었어!”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칫! 다른 집 같았으면 엄마가 먼저 아들을 껴안았을 거야.”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뭐 정 그렇다면 이만 떨어집시다.”

이내 포옹을 푼 승지가 어머니를 보고는 입에 발린 칭찬을 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더 젊어지셨는데?”



승지의 말대로 어머니는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서 광택이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갈하게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에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이, 누가 봐도 귀티가 나는 미인 형이었다. 게다가 계속 가꾸어서 그런지, 그의 어머니 박옥분은 최소 5년은 더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흰소리 그만하고. 그나저나 내일모레가 결혼식인데 양복도 준비 안하고 뭐했니.”

“아버지가 단골 양복점 사장을 불러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나저나 효주는 준비를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잘하고 있겠죠 뭐.”

“살림집은 2층에 꾸몄다. 누나들이 살던 방을 이번에 전부 말끔히 수리했어. 치울 것도 치우고, 도배며 장판이며 모두 다 갈았다.”

“누나들이 좀 서운해 하겠는데요. 둘 다 시집가기 전에 그대로 둬달라고 그랬잖아요.”

“이젠 치울 때도 됐지. 그러고 이제는 네 동생이 1층으로 내려와 살 거야. 아무래도 신혼인데 같이 2층에 거주하면 불편할 것 같아서.”

“뭐 효주 입장에서는 시누이와 자주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죠.”

“그래, 그래서 그렇게 한 거야.”

“그리고 어머니 선물은 프랑스제 향수와 화장품을 사왔으니 그런 줄 아세요.”

“안 그래도 다 떨어져서 사려고 했는데 잘 됐네.”



이때,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저건 문도 안 열어 보고 인사를 하는구나.”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에요?”

“하긴. 누굴 닮아서 저런지, 계집애가 살가운 맛이 없어. 선머슴아 같으니 원…….”

“보경아!”



승지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모두 경사 경(慶) 자를 돌림자로 지으셨다. 그래서 큰 누나의 이름은 진경, 둘째누나는 혜경이었다.

“아, 오빠 왔어?”

비로소 안방 문을 열어보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승지가 타박을 했다.

“요즘 뭐 하고 돌아다니기에 얼굴 보기가 힘드냐?”

“누가 할 소릴 누가 하고 있대?”

“그런가?”

“오빠, 그런데 선물 없어?”

“화장품 사왔으니까 알아서 챙겨가.”

“고마워. 그나저나 나이 어린 올케를 언니라고 부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네.”

“그래서 불만이냐?”

“당연하지. 불편하거든.”

“아무리 그래도 예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말에 보경이 퉁명스럽게 답을 했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저것은 툭하면 알아서 한다네.”

“나도 성인이거든요. 효주도 시집을 가는 판에.”

“너도 시집가고 싶다는 거야, 뭐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모녀의 설전에 승지가 끼어들었다.

“선물 드릴게요. 나가시죠.”

“그래? 그럼 어디 어떤 선물인지 좀 볼까.”



곧이어 세 사람은 거실로 나왔다. 승지가 트렁크에서 두 사람의 선물을 꺼내주는데 보경이 물었다.

“저 남은 건 누구 거야?”

“효주네 할머니, 어머니, 부회장님. 그리고 효주 것.”

“벌써부터 처갓집 챙기는 거야?”

누이동생의 말에 승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데, 어머니가 역성을 들고 나섰다.

“그럼, 챙기지 않으면 나 몰라라 하란 말이냐? 오빠는 너랑 달라?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지.”

“아무튼 할머니나 엄마나 모두 오빠 편만 든다니까. 이만 올라갈게요.”

“일요일부터는 1층에 내려와서 사는 거 알고 있지?”

“알았어요. 벌써 몇 번째 말하는 거예요. 귀에 못이 다 박히겠네.”

투덜거리며 보경은 2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