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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미국에서의 활약(3)





승지의 손을 굳게 맞잡고 있던 그가 승지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헌데 은행가로서 대출용도를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랄까. 그의 물음에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승지가 정색을 하자, 그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어렸을 때 나는 25센트의 용돈을 아버지로부터 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전출납부를 작성해야만 했소. 그런 소싯적부터의 훈련 때문이기도 하고, 은행가로서…….”



승지는 이쯤에서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과감히 그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고 늙어갈수록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임을 전생을 통해 잘 알고 있던 까닭에, 그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듣고자 청한 것이었다.

“회장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허허,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곧장 시작된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 유명한 존 록펠러의 손자였던 데이비드 록펠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돈을 사용하는 법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매주 25센트의 용돈을 주었고, 토요일마다 금전출납부를 제출토록 해서 확인했다.

그래서 지출이 엉터리이고 돈을 쓴 명목이 좋지 않으면 5센트를 회수해 갔고, 지출처가 좋고 정확하게 잘 기록했을 경우에는 5센트를 보너스로 더 줬다.

그리고 용돈 사용에 있어서 두 가지의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로 모든 수입의 10퍼센트는 저금할 것.

둘째로 다른 10퍼센트는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 등이었다.

그는 25센트의 용돈을 받을 때부터 아버지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그는 실패하지 않은 경영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위대한 사업가이자 존경받는 기업가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를 순간적으로 캐치한 승지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훈련을 통해, 오늘날의 위대한 사업가이자 존경받는 기업가가 될 수 있었군요.”

“하하하! 눈치도 비상하니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 같소.”



이때 미국 지사장 한동채가 다가오더니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는 쭈뼛쭈뼛했다.

이를 보고 록펠러가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잠시 후 대화합시다.”

“감사합니다.”

그가 마크 리치와 어울리자 승지가 한동채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방금 당직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LA지점장이 리 아이아코카로부터 승낙을 받아냈다는 내용인데, 편할 때 언제든 방문을 한다면 환영하겠노라는 답변을 들었답니다.”

“감사한 일이군요. 알았습니다.”

“그럼.”



한동채가 목례를 하고 물러가자, 승지는 다시 빈 잔을 채우고는 록펠러와 리치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아직 승리한 것도 아니니, 대출용도는 제가 승리를 확정한 후에 말씀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 그럽시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록펠러가 즉시 동의를 하자, 갑자기 화제가 요즘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라이슬러사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승지는 곧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참석해준 다른 VIP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 * *



다음날.

뉴욕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고 판단한 승지는 곧장 LA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숙취가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 늦은 비행기 편을 예약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LA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 뉴욕의 시간으로 따지면 밤 10시여야 맞았다. 하지만 6시간을 비행하고 나니, 동서의 시간대 차이로 3시간이 줄어서 7시가 된 것이었다.

일행은 마중 나온 LA지점장 최승국이 제공한 고급승용차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가는 도중에 옆자리에 앉은 최승국이 말했다.

“오늘은 너무 늦은 시간인지라 방문하기가 곤란할 것 같아, 아이아코카의 저택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벨 에어 호텔을 예약해 놨습니다, 부실장님!”

“잘 하셨습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찾아뵙는 것으로 하죠.”

“네, 부실장님!”

이후로 차는 서부의 부촌이라는 벨 에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오전 10시.

지점장 최승국의 안내로 네 사람은 아이아코카의 저택에 도착했다. 최승국 외에도 비서실장 소병규와 수행비서 민영민이 동행했다.

승지가 차에서 내리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돌로 쌓은 담장이었는데, 마치 육중한 고대 성곽을 보는 듯해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승지는 그런 마음을 떨쳐냈다. 그런 와중에 최승국이 벨을 누르자 쪽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내 일행은 정원사로 보이는 늙은 흑인을 따라 드넓은 잔디밭을 지나 아이아코카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흑인과 민영민이 알아서 자릴 벗어나자, 한국 나이로 금년 55세인 리 아이아코카가 일행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자리를 권했다.

이에 중앙에 있던 의자에 앉은 리 아이아코카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승지가 우측에는 최승국과 소병규가 나란히 앉았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아이아코카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나에게 자동차에 대한 조언을 구한 사람이오. 당신인가?”

아이아코카가 지목한 사람은 세 사람 중에 가장 연장자인 소병규였다.

이에 소병규가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 분은 바로 앞의 분으로,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의 차기 총수가 되실 분입니다.”

“그래요? 헌데 조언을 듣고 싶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자동차 회사를 하나 차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요?”



놀란 눈으로 반문하던 그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소?”

한국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걸 지금 지적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승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아이아코카의 말에 답을 했다.

“큰 회사만 해도 세 곳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GM의 합작사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쨌거나 좋소. 구체적으로 자동차에 대해 무얼 배우고 싶다는 게요?”

“우선은 회장님의 경험담을 듣고 싶습니다.”

“하하하! 젊은이가 생각보다 똑똑하군.”



경험담을 듣고 싶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아코카는 승지를 칭찬하는가 싶더니 꼬았던 다리를 풀고는 입을 뗐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머스탱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포드자동차 회사에서 승승장구 했소. 그런데 그 대가로 돌아온 보답은 오너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은 것이었소. 그것도 의도적이고 공개적인 모욕과 함께.”

이 대목에서 지금도 분한지 한 차례 부르르 떨기까지 한 그는 억눌린 말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포드자동차는 퇴임하는 임원에게 3개월 동안 준비기간을 주는 게 통례요. 그런데 최고경영자를 8년이나 한 나에게는 창고에 책상 하나만 달랑 내줍디다. 그것도 만 54세 생일에 창고에 딸린 사무실에 달랑 책상 하나만 내주니, 그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소. 하지만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소. 왜냐.”



잠시 말을 멈추고 세 사람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준 교훈이 있기 때문이오. ‘지난달에는 무슨 걱정을 했지? 작년에 한 걱정은? 거 봐, 기억 안 나지? 당장은 큰일이라도 난 것 같겠지만,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닌 거야. 우리 잊어버리자. 그리고는 내일을 향해 달리는 거야.’ 이런 아버지의 말씀이 돌아서던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에, 내가 태연하게 포드사를 등질 수 있었던 것이오.”

“앞으로의 계획은 있으십니까?”



승지의 물음에 그가 곧장 답을 했다.

“당연하지. 아직 젊은 나이에 놀 수는 없지 않겠소. 무엇이든 해야지. 문제는 다시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것이오. 그래서 경영대학원장에 항공사 사장까지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소.”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생기는 겁니까?”

승지의 질문에 아이아코카가 망설이지 않고 즉답을 했다.

“알라나 모르겠는데, 지금 크라이슬러사의 야적장에 가보면 금방 출고된 차 10만 대가 줄줄이 서 있소. 안 팔려서 재고로 쌓인 차들이지. 그런 그들인 까닭에 포드사에서 큰 성과를 낸 나를 조만간 최고경영자로 모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오. 하하하!”

“제가 생각해도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올해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고, 내년에는 크라이슬러사의 CEO가 되어 당당히 수만 종업원을 호령하는 모습으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하하하! 자네라는 사람은 홀딱 벗겨서 길거리에 내놓아도 절대 굶지는 안겠어.”



그의 말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승지가 말했다.

“야적장에 10만 대의 재고가 쌓여있다면, 조만간 크라이슬러사가 시장에서 퇴출당하지 않겠습니까?”

승지의 말에 그가 고개까지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거요. 왜냐하면 항공이나 철도 등도 연방에서 구제한 적이 있으니까. 빅 쓰리 중에 하나인 크라이슬러가 쓰러진다면, 그야말로 미국 자동차 시장은 일본 놈들의 차로 넘쳐날 테니까 말이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1975년 외국차의 미국 시장(신차) 점유율은 18퍼센트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3분이 1이 유럽 차, 3분의 2가 일본차였다.

그러던 것이 1977년 외국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1퍼센트로 늘었다. 그런데 유럽 차의 점유율은 6퍼센트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일본차의 점유율이 15퍼센트로 뛰었다.

이렇게 미국 땅에서 일본과 독일의 싸움이 고조되던 1978년에 들어서는 미국은 자동차를 70만 대 수출한 반면, 수입은 300만 대에 이르게 된다. 이런 판국에 크라이슬러사가 없어진다면 그 자리를 일본차가 메울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일본차는 왜 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까요?”

“미국차와 품질이 거의 대등한데다가 연비가 좋소. 그들이 수출하는 차들이 주로 소형차들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더하지.”

“만약 일본보다 훨씬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보유한 한국의 차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면, 더한 경쟁력이 생기겠군요.”

“문제는 품질 아니겠소? 일본만큼의 품질을 보장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오.”

“미국이 기술 지도를 해준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야 그럴 테지. 하지만 크라이슬러사를 예로 든다면 곤란할 거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파악한 바로는, 크라이슬러사가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을 24%나 갖고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외국 소형차를 크라이슬러의 상표로 판다해도, 그 대상은 미쓰비시가 될 것이고, 한국에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오.”

“그렇군요…….”



내심 그런 욕심을 갖고 있던 승지로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이내 마음을 수습하고는 승지가 말했다.

“회장님의 능력이라면 능히 크라이슬러사의 최고경영자가 되고도 남으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크라이슬러사에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아, 그래요? 파산직전이라서 은행도 대출을 꺼리는 판인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라도 있소?”

“회장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하하하! 여기서 지기를 만날 줄은 몰랐군.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우리 어린 친구부터 제일 먼저 찾는 것으로 하지. 그래서 정식으로 투자를 받아내도록 하겠소.”

“약속하신 겁니다?”

“물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승지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