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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미국에서의 활약(2)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거래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번에 상사를 확대 강화하면서 원유라든가 비철금속 쪽의 거래도 대폭 늘리기로 했으니 소규모 거래는 아닐 것입니다.”
승지의 유창한 영어에 소병규가 놀라는 가운데 마크 리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승지는 어려서부터 원어민으로부터 회화공부를 해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어 하나만은 유창하게 하기 위해 힘써온 결과가 오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규모 거래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거래를 원하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달려갑니다. 거래의 크기 유무는 따지지 않습니다.”
“부를 크게 이루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부담이 한결 덜어졌습니다.”
“하하하! 오늘 비록 처음 만나지만, 좋은 만남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제가 선물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승지의 말에 마크 리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3캐럿의 다이아몬드라도 그런 종류의 선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나로서는 거래차원의 선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남다른 면모가 있으십니다. 제가 준비한 선물도 그런 것입니다. 으음…….”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승지가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앞으로의 유가 동향을 어떻게 예측하고 계십니까?”
“당분간 12달러 선에서 횡보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약간은 실망한 투로 승지가 말했다.
“범인과 똑같은 예측을 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특별한 변화가 없으니까요.”
“이란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을 등에 업은 팔레비가 계속 정권을 유지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란 혁명이 성공해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유가에도 큰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최소 지금보다 배는 뛸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크게 놀란 듯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리치가 말했다.
“설령 젊은 회장님의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그에 대비해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내 예측처럼 횡보를 거듭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대규모 선물 투자를 해보렵니다.”
그의 말에 승지가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름이 없죠. 반드시 반대급부를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반대급부는, 회장님이 원유를 거래하실 때 우리 그룹도 동참시켜주시되 많은 양을 할당해 주시고, 다른 원자재 또한 그런 혜택을 베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저 없이 마크 리치가 답을 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죠. 어차피 매입을 하면 팔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거래방식이니 은혜를 갚는다고 볼 수도 없겠는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하하. 나는 내심 과한 것을 원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그 정도면 저도 부담을 덜 수 있겠습니다.”
“이거 괜히 내 요구조건을 일찍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말해서 부담을 좀 드릴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농담도 참 잘하시는군요.”
“회장님의 사업방식이 늘 위험을 동반하고 있어 말씀드립니다만,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나에 대해 매우 자세히 파악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아무튼 충고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세상사는 모르는 일. 혹여 회장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면, 꼭 저와 통화를 하고 결정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걱정해서 하는 말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께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비록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10년 이상 사귄 친구 이상의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말씀 하시죠.”
“전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가 싫습니다. 오후 일정은 직원들에게 말해서 처리하게 할 테니, 가능하시다면 회장님도 나에게 시간을 좀 할애해주시죠. 술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사내끼리는 술을 함께 나누어봐야 진정한 친구가 되고, 더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저도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은 채 끝내지 못한 식사에 이어 술자리도 함께 하게 되었다.
이후로 가진 술자리에서 둘은 호형호제를 하기로 약속했다. 연배 순으로 마크 리치가 형이 되고, 승지가 아우가 되었다.
그 와중에 승지가 잔을 든 채 말했다.
“긴급으로 10억 달러의 자금이 필요한데, 코리아가 어디 붙어있느냐는 등의 반문을 하며 미국 은행들이 시큰둥하다더군요.”
“흐흠, 10억 달러라…….”
잠시 고민을 하던 마크 리치가 다시 입을 뗐다.
“물론 나에게도 그만한 여유자금은 충분히 있지만, 이미 그 돈은 선물투자를 하기로 약속이 되었으니 좀 그렇고. 우리의 주거래 은행인 체이스맨해튼 행장을 내가 소개시켜주지. 이것이 내가 아우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니 양해해 주게.”
“그 정도만 해주셔도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한국 속담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별로 연고가 없다보니, 그 정도만 해주셔도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 아우의 수완을 좀 보자고.”
“하하하!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테니 두고 보십시오.”
“나는 그런 아우의 패기가 부럽네.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어갈수록 그런 패기가 줄어드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네.”
“형님보다 세상을 겁 없이 산 사람도 드물 겁니다. 나는 형님의 그런 면을 매우 존경합니다.”
“아우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구먼. 좋은 쪽은 아니니, 배울 생각은 말라고. 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의 술자리는 이후에도 장장 4시간이나 이어졌다.
* * *
이날 오후 5시.
위스키를 곁들여 장장 4시간 동안이나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승지는 오늘 일정을 마친 제과 사장 박찬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비서실장 소병규가 배석한 가운데 승지가 박찬수를 보며 물었다.
“둘러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작년에 국민소득이 1천 달러를 넘어섰으니 우리나라도 장차 패스트푸드 사업이 번창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고 다녔는데, 한동안의 실험을 거친다면 비슷하게 맛을 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가 아니라 더 좋은 맛을 내야죠. 아니면 로열티를 주는 방식으로라도 그들의 체인점을 국내에 들여오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정 안되면 그때는 어떠한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좋아요! 내년 초에 1호점을 내는 것을 목표로 정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실장님!”
그들 옆에서는 소병규 비서실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다. 그런 소병규 비서실장을 바라보던 승지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그에게 말했다.
“지금처럼 메모하는 습관은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메모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확인치 못하는 것이 있으면 비서실장님의 지시 하에 반드시 지시사항을 체크해 보고, 제게 다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고 일일이 메모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요. 윗사람이 되어서 지시만 해놓고 확인치 않는다면, 리더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죠. 따라서 반드시 지시사항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병규 실장은 더 이상의 사족은 달지 않고 복명하는 자세를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있는 동안은 꼼꼼히 더 둘러보도록 하시고, 시간이 남으면 더 좋은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도록 다른 매장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네, 부실장님!”
이후 승지는 제과 사장이 있는 자리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저녁을 시켰다.
잠시 후, 흑인 소년이 네모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돈을 지불하고 그 내용물을 풀어보니, 핫도그와 샌드위치는 물론 햄버거와 피자, 심지어 종이컵에 든 스프와 콜라도 있었다.
“자, 식사합시다.”
“감사합니다.”
제과 사장인 자신을 위한 메뉴에 박찬수는 감사를 표했다.
* * *
다음날 저녁 7시.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2층 홀에서는 미국 지사에서 초청한 사람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파티가 열렸다.
그 중에는 생각지도 못한 거물들도 있었다. 승지가 지나가듯이 말한 오늘의 파티를 기억하고 있다가 모든 일정을 미루고 참석해준 마크 리치를 비롯해, 이사 정도가 참석할 줄 알았던 미국 지사의 주거래 은행인 체이스맨해튼에서는 총재인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까지 참석해주어 파티가 더욱 빛을 발했다.
그 밖의 손님으로는 거래 은행 중에 하나인 케미컬 부은행장을 비롯해 듀폰사의 고위 임원, 섬유 및 전자 등 거래처의 사장들까지, 30여 명 이상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 지사가 초라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사원 전부가 참석한 것은 물론, 인근의 지점장까지 모두 참석하여 실내는 완전히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참석자들은 비즈니스 파티이기 때문에 부부동반이 아닌 단독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승지는 참석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다가 마크 리치의 손에 이끌려 록펠러 총재 앞으로 갔다.
60대 초반에 흰머리가 더 많은, 온화한 노인의 모습인 록펠러 앞에 서서 마크 리치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한 사람을 소개시켜 드리죠. 일전에 전화상으로 한 번 부탁드린 바 있는, 코리아 넘버원 기업의 회장 승지 고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손을 내미는 록펠러의 표정은 말과는 달리 떨떠름한 모습이었다. 한국의 넘버원 기업의 회장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너무 젊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속내가 은연중에 드러나 보이는 태도였다.
승지는 이를 인지하지 못할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승지가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총재님과 한 가지 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호! 그래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승부사 기질이 있듯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까닭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고 승지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총재님께 하나 묻겠습니다. 내년 2월의 유가를 얼마 정도로 전망하고 계십니까?”
“횡 보합! 12달러 선 내외일 것이라고 보오. 크게 올라도 13달러 정도.”
“저는 20달러 이상에 걸겠습니다.”
“오, 그래요? 전혀 예상치 못한 가격에 점점 구미가 동하는군요. 그래, 무슨 내기를 할까요?”
“여기에 케미컬 부은행장님도 와계십니다만, 만약 제가 질 경우에는 주거래 은행을 체이스맨해튼 은행으로 단일화하겠습니다. 그 대신 총재님께서 지실 경우에는 10억 달러를 신용으로 저에게 대출해주시는 겁니다.”
“질 경우의 대가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사이의 신분을 감안하면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내기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내기의 증인은 여기 있는 마크 리치이고요. 하여튼 내가 왜 이 내기에 순순히 응하느냐 하면, 어느 고위인사를 만나도 당신과 같은 예측을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 그런 예측을 해서 그게 맞는다면, 당신의 예지력은 실로 범인을 훨씬 뛰어넘는 귀재라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그런 사람이라면 능히 그 이상도 빌려줄 만합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손을 한 번 더 잡는 것으로 내기의 성립을 리치 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으로 할까요?”
“못할 것도 없죠.”
반백의 노인은 원하던 장난감을 얻어서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승지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거래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번에 상사를 확대 강화하면서 원유라든가 비철금속 쪽의 거래도 대폭 늘리기로 했으니 소규모 거래는 아닐 것입니다.”
승지의 유창한 영어에 소병규가 놀라는 가운데 마크 리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승지는 어려서부터 원어민으로부터 회화공부를 해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어 하나만은 유창하게 하기 위해 힘써온 결과가 오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규모 거래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거래를 원하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달려갑니다. 거래의 크기 유무는 따지지 않습니다.”
“부를 크게 이루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부담이 한결 덜어졌습니다.”
“하하하! 오늘 비록 처음 만나지만, 좋은 만남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제가 선물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승지의 말에 마크 리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3캐럿의 다이아몬드라도 그런 종류의 선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나로서는 거래차원의 선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남다른 면모가 있으십니다. 제가 준비한 선물도 그런 것입니다. 으음…….”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승지가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앞으로의 유가 동향을 어떻게 예측하고 계십니까?”
“당분간 12달러 선에서 횡보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약간은 실망한 투로 승지가 말했다.
“범인과 똑같은 예측을 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특별한 변화가 없으니까요.”
“이란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을 등에 업은 팔레비가 계속 정권을 유지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란 혁명이 성공해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유가에도 큰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최소 지금보다 배는 뛸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크게 놀란 듯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리치가 말했다.
“설령 젊은 회장님의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그에 대비해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내 예측처럼 횡보를 거듭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대규모 선물 투자를 해보렵니다.”
그의 말에 승지가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름이 없죠. 반드시 반대급부를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반대급부는, 회장님이 원유를 거래하실 때 우리 그룹도 동참시켜주시되 많은 양을 할당해 주시고, 다른 원자재 또한 그런 혜택을 베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저 없이 마크 리치가 답을 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죠. 어차피 매입을 하면 팔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거래방식이니 은혜를 갚는다고 볼 수도 없겠는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하하. 나는 내심 과한 것을 원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그 정도면 저도 부담을 덜 수 있겠습니다.”
“이거 괜히 내 요구조건을 일찍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말해서 부담을 좀 드릴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농담도 참 잘하시는군요.”
“회장님의 사업방식이 늘 위험을 동반하고 있어 말씀드립니다만,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나에 대해 매우 자세히 파악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아무튼 충고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세상사는 모르는 일. 혹여 회장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면, 꼭 저와 통화를 하고 결정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걱정해서 하는 말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께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비록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10년 이상 사귄 친구 이상의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말씀 하시죠.”
“전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가 싫습니다. 오후 일정은 직원들에게 말해서 처리하게 할 테니, 가능하시다면 회장님도 나에게 시간을 좀 할애해주시죠. 술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사내끼리는 술을 함께 나누어봐야 진정한 친구가 되고, 더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저도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은 채 끝내지 못한 식사에 이어 술자리도 함께 하게 되었다.
이후로 가진 술자리에서 둘은 호형호제를 하기로 약속했다. 연배 순으로 마크 리치가 형이 되고, 승지가 아우가 되었다.
그 와중에 승지가 잔을 든 채 말했다.
“긴급으로 10억 달러의 자금이 필요한데, 코리아가 어디 붙어있느냐는 등의 반문을 하며 미국 은행들이 시큰둥하다더군요.”
“흐흠, 10억 달러라…….”
잠시 고민을 하던 마크 리치가 다시 입을 뗐다.
“물론 나에게도 그만한 여유자금은 충분히 있지만, 이미 그 돈은 선물투자를 하기로 약속이 되었으니 좀 그렇고. 우리의 주거래 은행인 체이스맨해튼 행장을 내가 소개시켜주지. 이것이 내가 아우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니 양해해 주게.”
“그 정도만 해주셔도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한국 속담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별로 연고가 없다보니, 그 정도만 해주셔도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 아우의 수완을 좀 보자고.”
“하하하!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테니 두고 보십시오.”
“나는 그런 아우의 패기가 부럽네.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어갈수록 그런 패기가 줄어드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네.”
“형님보다 세상을 겁 없이 산 사람도 드물 겁니다. 나는 형님의 그런 면을 매우 존경합니다.”
“아우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구먼. 좋은 쪽은 아니니, 배울 생각은 말라고. 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의 술자리는 이후에도 장장 4시간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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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5시.
위스키를 곁들여 장장 4시간 동안이나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승지는 오늘 일정을 마친 제과 사장 박찬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비서실장 소병규가 배석한 가운데 승지가 박찬수를 보며 물었다.
“둘러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작년에 국민소득이 1천 달러를 넘어섰으니 우리나라도 장차 패스트푸드 사업이 번창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고 다녔는데, 한동안의 실험을 거친다면 비슷하게 맛을 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가 아니라 더 좋은 맛을 내야죠. 아니면 로열티를 주는 방식으로라도 그들의 체인점을 국내에 들여오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정 안되면 그때는 어떠한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좋아요! 내년 초에 1호점을 내는 것을 목표로 정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실장님!”
그들 옆에서는 소병규 비서실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다. 그런 소병규 비서실장을 바라보던 승지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그에게 말했다.
“지금처럼 메모하는 습관은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메모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확인치 못하는 것이 있으면 비서실장님의 지시 하에 반드시 지시사항을 체크해 보고, 제게 다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고 일일이 메모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요. 윗사람이 되어서 지시만 해놓고 확인치 않는다면, 리더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죠. 따라서 반드시 지시사항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병규 실장은 더 이상의 사족은 달지 않고 복명하는 자세를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있는 동안은 꼼꼼히 더 둘러보도록 하시고, 시간이 남으면 더 좋은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도록 다른 매장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네, 부실장님!”
이후 승지는 제과 사장이 있는 자리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저녁을 시켰다.
잠시 후, 흑인 소년이 네모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돈을 지불하고 그 내용물을 풀어보니, 핫도그와 샌드위치는 물론 햄버거와 피자, 심지어 종이컵에 든 스프와 콜라도 있었다.
“자, 식사합시다.”
“감사합니다.”
제과 사장인 자신을 위한 메뉴에 박찬수는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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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저녁 7시.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2층 홀에서는 미국 지사에서 초청한 사람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파티가 열렸다.
그 중에는 생각지도 못한 거물들도 있었다. 승지가 지나가듯이 말한 오늘의 파티를 기억하고 있다가 모든 일정을 미루고 참석해준 마크 리치를 비롯해, 이사 정도가 참석할 줄 알았던 미국 지사의 주거래 은행인 체이스맨해튼에서는 총재인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까지 참석해주어 파티가 더욱 빛을 발했다.
그 밖의 손님으로는 거래 은행 중에 하나인 케미컬 부은행장을 비롯해 듀폰사의 고위 임원, 섬유 및 전자 등 거래처의 사장들까지, 30여 명 이상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 지사가 초라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사원 전부가 참석한 것은 물론, 인근의 지점장까지 모두 참석하여 실내는 완전히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참석자들은 비즈니스 파티이기 때문에 부부동반이 아닌 단독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승지는 참석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다가 마크 리치의 손에 이끌려 록펠러 총재 앞으로 갔다.
60대 초반에 흰머리가 더 많은, 온화한 노인의 모습인 록펠러 앞에 서서 마크 리치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한 사람을 소개시켜 드리죠. 일전에 전화상으로 한 번 부탁드린 바 있는, 코리아 넘버원 기업의 회장 승지 고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손을 내미는 록펠러의 표정은 말과는 달리 떨떠름한 모습이었다. 한국의 넘버원 기업의 회장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너무 젊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속내가 은연중에 드러나 보이는 태도였다.
승지는 이를 인지하지 못할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승지가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총재님과 한 가지 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호! 그래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승부사 기질이 있듯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까닭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고 승지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총재님께 하나 묻겠습니다. 내년 2월의 유가를 얼마 정도로 전망하고 계십니까?”
“횡 보합! 12달러 선 내외일 것이라고 보오. 크게 올라도 13달러 정도.”
“저는 20달러 이상에 걸겠습니다.”
“오, 그래요? 전혀 예상치 못한 가격에 점점 구미가 동하는군요. 그래, 무슨 내기를 할까요?”
“여기에 케미컬 부은행장님도 와계십니다만, 만약 제가 질 경우에는 주거래 은행을 체이스맨해튼 은행으로 단일화하겠습니다. 그 대신 총재님께서 지실 경우에는 10억 달러를 신용으로 저에게 대출해주시는 겁니다.”
“질 경우의 대가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사이의 신분을 감안하면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내기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내기의 증인은 여기 있는 마크 리치이고요. 하여튼 내가 왜 이 내기에 순순히 응하느냐 하면, 어느 고위인사를 만나도 당신과 같은 예측을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 그런 예측을 해서 그게 맞는다면, 당신의 예지력은 실로 범인을 훨씬 뛰어넘는 귀재라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그런 사람이라면 능히 그 이상도 빌려줄 만합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손을 한 번 더 잡는 것으로 내기의 성립을 리치 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으로 할까요?”
“못할 것도 없죠.”
반백의 노인은 원하던 장난감을 얻어서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승지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