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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국에서의 활약(1)





호텔 지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조찬을 마친 승지는 곧 두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전자의 강태구 사장과 제과의 박찬수 사장이 그들이었다.

승지가 제과 사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방미 길에 동행을 요청한 대로, 국내에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맥도날드와 피자헛 등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수행원과 함께 뉴욕에 산재해 있는 두 회사의 점포들을 둘러보도록 하세요.”

“네, 부실장님!”

“전자 사장님!”

“네, 부실장님!”



자신의 부름에 곧장 답을 한 강태구 사장을 직시하며 승지가 말했다.

“내가 이번 길에 동행한 목적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에서는 실리콘 밸리 내에 별도 법인을 설립해, 그곳의 최신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 유능한 인재들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가 미국의 회사보다도 먼저 스카우트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즉시 서부로 날아가 마땅한 곳을 물색하고, 이에 필요한 인원도 돌아가는 대로 선발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부실장님!”

“나도 지사를 둘러봐야 하니 함께 일어납시다.”

“네, 부실장님!”



승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곧이어 두 사람이 수행원들과 함께 떠나자, 승지도 자신을 모시러온 지사장 한동채를 앞세워 지사로 향했다. 이 일행에는 비서실장 소병규를 비롯해 일곱 명의 비서실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 *



미국 지사는 5번가 동쪽 50블럭에, 낡은 24층 건물의 7층 일부를 세내어 사용하고 있었다. 일행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내려 오른쪽으로 꺾으니 정면에 접수대가 보였다. 그리고 벽면에는 GL상사라는 큼지막한 휘장이 걸려있었다.

접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금발미녀를 지나쳐 그들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안내자인 지사장 한동채가 먼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승지가 따라 들어가니, 우선은 넓은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500평쯤 되어 보이는 넓은 실내에는 각 부분별로 사원들의 책상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현지 채용인을 포함하여 100여 명은 될 듯한 사원들은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자신의 업무에만 열중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전화를 받거나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현지 채용인들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일행에게 시선을 주는 자들도 있었다.



잠시 실내를 둘러보던 승지가 둥글고 굵은 셀룰로이드 테를 두른 로이드안경을 써서 조금은 교만해 보이는 지사장 한동채를 향해 말했다. 실제로 그는 프린스턴 대학 출신으로서 교만할 만한 스펙을 지닌 사람이었다.

“지사장실로 갑시다.”

“네, 부실장님!”



이내 한동채는 뒤로 돌아서서 ‘지사장실’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는 칸막이 방의 문을 열었다. 블라인드 커튼이 드리워진 유리창 앞으로는 지사장용의 커다란 집무용 책상이 보였다. 또한 그 앞에는 탁자를 중심으로 양쪽에 기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승지를 필두로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는데, 지사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블라인드 커튼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본 승지 또한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전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부신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돔과 함께 높이 치솟아 있는 장엄한 빌딩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에 승지가 옆에 서있던 지사장에게 물었다.

“꽤 높은데, 저 건물은 뭡니까?”

“크라이슬러 빌딩으로 77층입니다.”

“아! 저게 말입니까?”

“네, 부실장님.”

“정말 아름답군요.”

“그렇습니다. 아르데코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 지금도 뉴욕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건물입니다. 헌데 그러면 뭐합니까? 지금은 크라이슬러사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매물로 나와 있으니, 비운의 건물이라고나 할까요?”

“얼마에 나왔습니까?”

“6억2천만 달러입니다.”

“상당한 거금이군요.”

“그렇습니다. 한국의 현 환율로 치면 3천억 원 남짓하니까요.”



작년, 즉 77년 한국의 정부예산은 2조 6,750억 원이었다. 그러니 그 금액의 10분의 1이 넘는 거금 중에 거금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승지가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자 지사장 한동채도 따라와 맞은편에 앉았다.

이에 비서실장 이하 세 명의 간부들도 한동채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머지 비서실 직원 네 명은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마크 리치와의 약속시간은 내일 몇 시죠?”

“12시 정각에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리 아이아코카의 소재는 파악했습니까?”

“네. 로스앤젤레스의 벨 에어(Bel Air) 자택에 칩거 중입니다.”

“그와도 한 번 만났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한국의 자동차 산업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다고 청하면 가능할 듯도 싶은데요.”

“LA지점도 있으니 그곳 지점장을 통해 시도해 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네.”

“그리고 10억 달러 대출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동채가 곧 부연설명을 했다.

“퍼스트 내셔널 시티은행, 케미컬 은행, 체이스맨해튼 은행 등 몇 곳을 쫓아 다녀봤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한국의 재계서열 1위 기업이라고 설명을 해도, 코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 나라냐고 묻는 통에 앞뒤 발 다 든 상태입니다.”

“흐음…….”

침음성을 토하며 생각에 잠겼던 승지가 말했다.

“그 문제는 제가 직접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신 빠른 시일 내에 우리와 관계가 있는 모든 거래처를 초청해 파티를 열도록 합시다. 그래서 미국 지사의 비즈니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실장님!”



조금이나마 교만한 빛이던 한동채의 얼굴이 감사함으로 빛나는 가운데, 승지가 다시 입을 열어 지사장에게 물었다.

“지사장님은 이곳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2년 전부터 아내와 아들을 데려와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댁에서 먹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연락해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사장뿐만 아니라 해외근무자들의 고충을 듣고 싶어서 마련하는 자리이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부실장님.”

“이후로는 시내 관광을 좀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때 소병규 비서실장이 나서며 말했다.

“저와 수행비서만 부실장님을 모시고, 나머지 비서실 직원들은 미국 지사의 주요거래처를 돌아보게 하고 싶습니다. 저도 런던 지사장을 해봐서 잘 압니다만, 외국 주재 상사원들이야말로 고생이 무척 심합니다. 따라서 비서실 직원들도 간접 체험을 하며 공부를 시키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네요.”

승지의 허락에 이후의 스케줄이 결정되었다.



* * *



승지 일행이 탄 차는 지사원이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는 수행비서 민영민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뒷좌석에는 승지를 비롯해 지사장 한동채와 비서실장 소병규가 나란히 앉아서 뉴욕거리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부실장님! 지금 달리고 있는 거리가 5번가입니다. 맨해튼의 중심가로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구겐하임 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의 번영과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죠.”

승지가 연신 좌우를 살피면서 말했다.

“이곳만 보아도 미국이 왜 세계 최강 국가인지 알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도 영국은 물론 미국 주재원 생활을 해보아서 잘 압니다만, 유럽인들과 뉴요커들은 전혀 다릅니다. 유럽인들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익스큐즈 미, 파든이라고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들은 예의가 없지요. 그 대신 스피디하고 열정정인 비즈니스가 매력입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기도 한 소병규의 말에 승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차는 5번가를 크게 돌아 타임스퀘어 한 모퉁이에 멈춰 섰다. 그러자 한동채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구경하시죠.”

일행은 차에서 내려서 점심때까지 도보로 시내 관광을 했다.



* * *



이날 저녁.

승지는 오후에 특별한 일정이 없어 호텔에서 푹 쉬었다. 그러다가 오후 6시가 되자 비서실장 소병규와 수행비서 민영민이 승지의 방으로 찾아왔다. 미국 지사장 한동채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모시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모두 외출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동채가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가시죠.”

“네.”



일행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대기시켜 놓은 지사장의 차에 올라타고는 그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일행은 퀸즈의 잭슨하이츠 아파트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15층 정도의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내린 아파트만 5층이라서 초라해 보였다.

새삼 상사원들이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며 고생이 많다는 말을 절감하면서 승지는 한동채의 안내로 그들이 거주하는 302호로 들어섰다. 그러자 4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차린 것도 없는데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이렇게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대표로 승지가 감사 인사를 하고는 일행은 곧장 식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에 김과 김치가 차려져 있는 가운데 곧이어 준비된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된장찌개가 가장 먼저 나오고, 계란찜, 꽁치조림, 쇠고기 무국이 차례로 나왔다.

그 다음으로 한 공기씩의 밥이 날라졌고, 마지막으로 남편의 밥까지 퍼다 주며 한동채의 아내가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같이 드시죠?”

“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아들과 함께 먹을 게요.”

“아이는……?”

“저기, 베란다에 혼자서 놀고 있어요.”

부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가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한동채의 말에 승지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잘 먹겠습니다.”

“부족하면 뭐든 말씀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곧이어 식사가 시작되었고, 몇 숟갈을 뜬 승지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모두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있군요.”

“제가 회장님 사모님께 물어서 알려드렸습니다.”

소병규의 말에 승지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티타임을 가지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승지가 부인을 보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이 좀 이리로 불러주시죠.”

“네.”

이내 베란다에서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아이가 좀 이상했다. 쭈뼛쭈뼛하는 건 낯설어 그렇다 쳐도, 뭔가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였다.

승지는 100달러 지폐 한 장을 내밀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 엄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

그제야 아무 말도 없이 겨우 손을 내밀어 돈을 받으며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을 보며 한동채가 말했다.

“너무 큰돈을 주셨습니다. 그나저나 상사원들에게는 아이들 교육도 큰 문제입니다. 한인학교가 없어서 일반학교에 보냈더니 백인아이들이 ‘옐로’니 뭐니 하면서 많이 놀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내성적으로 변하고, 혼자만 놀려고 합니다.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자폐증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저런, 저런!”

상사원의 비애를 잘 알고 있던 소병규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승지 또한 느끼는 점이 많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열악하지만, 사세가 번창하는 대로 상사원들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줄 터이니, 가일층 노력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동채가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부인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남들은 외국생활을 한다고 하면 모두 부러워하지만, 현실은 부실장님이 느끼신 그대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이를 헤아려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드린 말은 꼭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와중에 아이는 한쪽 구석에서 자동차 모형조립에 열심이었다.



* * *



다음날 12시 정각.

승지는 호텔 지하 레스토랑에서 마크 리치와 마주했다.

그는 사십대 초반이지만 벌써부터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어서 긴 얼굴이 더욱 길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