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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원유 선물에 몰방(2)





“미국 지사장이 마크 리치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그가 운영하고 있는 ‘마크 리치+Co AG’ 스위스 본사에 문의해보니, 원유를 사준다면 미국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낼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답니다. 부실장님께서 왜 그를 만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원유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는 판에 굳이 그를 만날 이유가 있으신지 의문입니다.”

“그에게서 원유를 사준다 해도 대량 구매는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기존 원유거래의 패턴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렇게 답한 승지는 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승지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마크 리치는 세상을 바꾼 엄청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모두 무시한 ‘석유왕(King of Oil)’이었다.

1934년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태어난 리치는 7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상품을 매매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실물자산에 눈을 뜬 리치는 대학을 다니다가 필립 브러더스에 입사해 금속(metals) 딜러로 일하면서, 자원은 많지만 가난한 제3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평생을 같이했던 파트너와 함께 1974년 ‘마크 리치+Co AG’를 스위스에 설립한 리치는 원유시장에 뛰어들면서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원유시장은 소규모 현물(spot)거래 자체는 없고, 메이저 석유회사의 대형장기계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물보다 선물시장에 의존도가 높았던 원유시장을 현재의 모습으로 바꾼 이가 바로 마크 리치였다.

소규모 현물거래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회사를 상품매매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키워낸 리치는 제3세계 국가의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는 이후 무역금수조치를 어기고, 인종차별정책으로 제재를 받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쿠바의 카스트로, 리비아의 카다피, 칠레의 피노체트,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와 거래를 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막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제재 때문에 늘 돈이 부족했던 독재자로부터 원자재를 싸게 사들여, 이를 자신이 만든 현물시장에서 잘게 쪼개서 파는 것이 그의 사업방식이었다.

그런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훗날 그에게서 대량의 싼 원유를 공급받기 위해 사전 포석을 행하려는 것이 승지의 계획이었다. 승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최종욱은 내심 감탄하며 이제는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정 필요하시면 그들의 본사가 있다는 스위스에서 만나면 되지, 굳이 미국에서 만날 필요가…….”

“누가 뭐래도 미국이 세계 최강 아닙니까? 그런 미국을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차제에 미국을 한 번 둘러보고, 우리 지사의 모습도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말로는 이렇게 포장했지만 그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현재 파산 직전의 재정난을 겪고 있는 크라이슬러사의 일정지분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승지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면에는 그의 경영 비전과도 관계가 있었다.

한국의 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가 아버지 즉 회장에게도 역설한 바가 있던 일본식 모델을 채용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즉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빼앗아온 전자,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의 기술집약적인 사업으로 회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동차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대한조선공사가 경영하던 옥포조선소 인수 건을 타진하기 한 달 전에 이미 새한자동차를 대영그룹이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자동차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 때는 경영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실기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요즘 외신란에 자주 등장하는 크라이슬러사의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만간 미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마크 리치도 그쪽에서 만났으면 했던 것이다.



“제가 직접 모시고 출장을 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다, 제게는 비서실 직원이 있지를 않습니까?”

“아! 그렇지요.”



최 사장이 차기 오너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강한 리액션을 취하고 있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며 여비서가 말했다.

“비서실장님이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어오시라고 해.”

“네, 사장님!”

그녀가 나가자마자 비서실장 소병규가 안으로 들어섰다.

“부실장님! 저희들을 피해 다니시는 겁니까? 왜 비서실에는 안 들르시고.”



승지가 그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입을 열었다.

“출근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는 놈이 벌써 회장이라도 된 양 비서실에 드나드는 것이, 중역들의 눈에는 좋게 비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벌써부터 중역들의 눈치를 보고 다녀서야, 어떻게 일국의 성주 노릇을 온전히 할 수 있겠습니까? 두둑한 배짱을 갖고 중역들을 종 부리듯 해도 시원찮을 판에 말입니다.”



승지를 일국의 성주로 비유하며 다그치는 그의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의 충성심을 익히 알고 있던 승지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그래서 승지가 조용히 말했다.

“좋습니다. 눈총을 사건 말건, 어차피 제가 이용할 조직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밤샘 근무를 하게 만들어드리죠. 자, 갑시다.”

“모시겠습니다.”

종전과는 달리 허리를 굽혀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그를 보면서 승지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사장실을 벗어났다.

이내 회장실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조용한 실내에서는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렸다.



이내 커피 잔을 내려놓은 승지가 소병규를 직시하며 말했다.

“미국 출장을 준비해주세요.”

“네? 미국은 갑자기 왜……?”

“나뿐만 아니라 여직원을 제외한 비서실 직원 전원의 여권을 마련해 놓으세요.”

“아직 출장 사유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만……?”

“내가 요즘 몇 가지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승지는 자신이 요즘 추진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 조성 사업부터, 원유 선물 거래. 더 나아가 자동차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 크라이슬러사의 일정 지분을 획득하려는 계획, 그리고 마크 리치를 만나 친분을 다지려는 이유까지 상세히 전했다.



승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동공이 확장될 대로 확장된 소병규가 말했다.

“대부분의 계획이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난다는 전제 하에 움직이고 있으니, 너무 위험한 도박 아닙니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룹에 크게 손실을 입히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마뜩치 않다는 표정의 그를 보며 승지가 말했다.

“과제를 하나 드리죠. 미국에서 최소 10억 달러를 차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주세요.”

“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승지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한국보다는 미국이 달러 차입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이자도 훨씬 싸고요. 어쨌거나 현재 미국 은행들은,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벌어들인 돈을 처분할 길이 마땅치 않아 맡겨진, 중동의 오일 달러를 대거 유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결과가 현재 어떻습니까? 지금 그들은 적당한 대출처를 찾지 못해 위험부담이 큰 중남미에 대거 대출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들보다 안전하다는 것만 증명하면 충분히 대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국내에 앉아 있으면서도 국제정세는 물론 경제동향까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어린 차기 총수에게 소병규는 내심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노파심에서 자신은 주로 제어하는 쪽의 발언을 하지만 말이다.

“일단 현지 미국지사에 지시해 현지 사정을 알아보고 회장님의 지시대로 행하겠습니다. 그 전에 10억 달러의 용처를 알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예 자신을 차기 회장으로 못 박으며 한결 공손해진 그를 보면서 승지가 말했다.

“종전에 내가 말한 바 있는 크라이슬러사의 지분 인수대금입니다.”

“흐흠… 크라이슬러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파악해야겠군요.”

“파악해봐야 그들이 재정난에 봉착해 파산직전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헌데 그런 위험한 회사의 지분을 굳이 왜 인수하려 하십니까?”

“크라이슬러사가 어디 보통 회사입니까? 미국 자동차 회사 빅 쓰리 중에 한 곳 아닙니까? 만약 그런 회사가 파산한다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신도 크게 깎일 것입니다. 따라서 연방정부가 지원을 해서라도 절대 파산은 면하게 될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그런고로 가장 주가가 낮을 때 인수해두면 이 기회에 우리가 자동차 업종에 진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설령 훗날 양도한다 하더라도 큰 차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장님은 벌이는 사업마다 외줄타기 식으로 위험천만하군요.”

“리스크가 큰 곳에 큰 이익이 남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저를 믿고 그대로 시행해주세요.”

“일단 알겠습니다. 미국 지사에 지시해 대출 건에 대해 알아보라 하고, 우리도 나름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한 가지만 더 지시를 내려주세요. 리 아이아코카 전 포드자동차 사장의 소재지를 파악해 놓으라고 하세요.”

“그는 왜……?”

“그를 만나서 자동차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배 경영자들을 만나서 조언을 듣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소병규 비서실장에게 한 말과는 달리 승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밝히고 싶지는 않아서 일반론만 말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사업에 대해서도 수시로 모니터링을 해서 보고해 주세요.”

“수시로 챙겨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단, 모든 업무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비서실 전 직원과 함께 회식을 하는 것으로 합시다.”

“직원들이 엄청 좋아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출근을 하지 않으시니 모두 붕 떠 있었는데, 회식도 하고 이제부터는 활기차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아한다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죠, 하하하.”

모처럼만에 대소를 터트리며 승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이날 저녁.

승지는 비서실 직원들과 소주에 삼겹살 파티를 했다. 시내버스 요금 50원, 자장면 한 그릇에 200원 하던 시절에 삼겹살 파티는 누구나 원하는 회식이었다.

소주와 삼겹살을 원하는 만큼 사주며 승지는 그들의 고충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직원상도 말했다.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술이 취하자 돌아가면서 탁자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주변인들 중에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 조금 더 잘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아직은 개인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살 만한 세상이었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