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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10배의 차익을 남기다(2)
“쓸려면 통 크게 쓰시오. 시쳇말로 줄려면 홀딱 벗고 주랬다고……. 배달사고는 절대 안 날 테니 걱정 말고. 음…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접대를 받아본 경험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소. 아직은 조그마한 중소기업인데, 그 건설사도 형질 변경을 해주었소. 한데 그가 우리에게 준 금액이 얼마인줄 아시요?”
“그야 모르죠.”
강 상무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장 국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큰 평수가 아닌지라 1천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는 자그마치 그 열 배가 넘는 1억을 배팅합디다. 그래서 나는 물론이고 부하직원들까지도 크게 놀란 일이 있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기업은 조만간 큰 기업이 되지 않을까 싶소.”
승지는 그 기업이 어디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사람은 로비로 기업을 일구다시피 한 사람으로서,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10배 이상의 뇌물을 제공해서 받는 사람마다 큰 액수에 놀랐다는 설이 전해지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그 사람이 기업사에 다시 등장할지 안 할지 현재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대치동 땅이 그가 살 예정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승지가 선수를 쳐서 그 땅을 모두 사놓았기 때문에, 그 부지에 은마 아파트를 지어서 졸지에 대기업 반열에 든 그가 그런 행운을 또다시 거머쥘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10억을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승지의 말에 장 국장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10억을 주면 주는 거지, 조건은 또 뭐요?”
“기왕이면 도곡동 전답 40만 평도 주거용도로 변경해주시죠?”
“거참… 너무 박하게 나오는 것 아니오?”
“그 대신 정년 후에는 저희 그룹으로 모셔서, 사모님으로부터 ‘뒷방 늙은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젊은 사람이 별 걸 다 알고 있구먼. 남자가 직장 그만 두고 집안에서 빌빌 거리면, 그때는 정말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당하는 거지 별 수 있나. 그래서 자고로 사내는 눈 뜨면 밖으로 돌아야 돼.”
절반의 승낙은 한 것 같은데 아직 확답이 없어서 승지가 계속해 그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자, 장 국장이 다시 입을 뗐다.
“내 퇴직 후까지 보장한다고 하니, 보험 들어놓는 셈치고 이번 건에 한해서는 내가 양보하리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승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데 반해 접대에 이골이 난 강 상무는 그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역시 국장님은 화끈하십니다. 덕분에 차기 총수에게 찍히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내며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는 듯이 강 상무가 승지를 바라보았다. 승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 국장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두 사람은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정작 로비를 성공시키고도 승지는 소태를 씹은 듯이 입 안이 썼다.
이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 아니 개발독재가 한창 시행되고 있던 대한민국의 현주소였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접대는 끝까지 확실히 해야 했기에 승지가 장 국장을 보며 물었다.
“이젠 아이들을 들이시죠?”
“헌데… 돈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줄 거요?”
일을 확실하게 하려는 장 국장에게 강 상무가 핀잔을 주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급히 술잔을 비운 그가 다시 말했다.
“차명 계좌에 한꺼번에 입금해서 도장과 통장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해드릴 시간과 장소는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암, 그러면 틀림없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었다면, 기밀유지를 위해 현금이 가득 담긴 사과박스를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10억이면 다섯 상자 정도. 한 상자에 1만 원 권을 가득 담으면 2억 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강 상무의 말대로 차명계좌에 입금해서 통장과 도장을 건네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짝 짝!
장 국장 자신이 먼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마담이 들어왔다.
“아이들 들여!”
장 국장이 호기롭게 말하자 강 상무가 덧붙였다.
“이 집에서 제일 예쁜 애들로만. 알지?”
“물론이죠. 그런 아이들로만 미리 뽑아서 대기시켜놓았습니다.”
“좋아. 그럼 어서 들이지.”
그녀가 공손히 절을 하고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미녀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직접 지시해 자리 배치를 했다. 누가 주빈인지를 잘 아는 까닭에 장 국장 옆에 제일 예쁜 아이를 앉히고, 승지와 강 상무 순으로 인물배치를 했다.
곧이어 세 미녀가 달려들어 아양을 떨면서 술잔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흥이 도도해지자 이번에는 4인조 실내악단까지 등장해 술판을 더욱 흥겹게 만들었다. 노래도 부르고 춤까지 추면서.
* * *
다음날 승지는 부회장을 만나 전후사정을 고하고 10억 원을 받아냈다. 이를 경리과 직원을 통해 차명 통장에 입금시킨 승지는 이를 또 강 상무에게 전달했다.
그로부터 5일 후.
80만 평의 전답이 주거지로 용도 변경 되었다. 대치동은 물론 도곡동의 40만 평까지도.
그러자 승지는 곧장 부회장을 만나서 담판에 들어갔다.
“고속버스터미널이 건설되고 있는 반포동 땅값이 요즘 얼마인 줄 아십니까?”
승지의 물음에 부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평당 70만 원 합니다.”
“그렇게나 비싸? 무교동만 해도 싼 곳은 40만 원 선이면 사는데.”
“무교동도 비싼 곳은 90만 원 선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를 많이 했군. 그래, 얼마를 원하는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평당 30만 원!”
승지가 딱 잘라 말하자, 고개부터 저은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4만 원에서 5만 원 하던 곳을 6, 7배나 뻥튀기한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전답뿐이잖은가.”
“이미 사통팔달의 도로가 뚫려 있어서 조만간 가격이 대폭 상승할 것입니다.”
승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설 용지 부근으로 영동5로(현 삼성로), 영동6로(현 영동대로), 남부순환로가 이미 건설되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동6로는 왕복 10차선에서 14차선 도로로서(70여 미터),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 다음으로 넓은 도로가 이미 조성되어 있어서 차가 별로 없던 당시로서는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질타를 받고 있었다.
물론 10년 후면 이 도로마저도 교통체증이 발생하지만 말이다.
“더하여 명문 중고등학교들이 이전을 마치는 대로, 그곳 주변에 학원가가 조성되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것입니다.”
“부실장 말대로 된다 해도 그건 훗날의 일이고, 분양가가 너무 높으면 분양해먹기 힘들 것이니, 이를 참조해주기 바라네.”
“좋습니다. 그럼, 25만 원으로 하시죠.”
“그것도 비싸. 요즘 분양가가 평당 65만 원으로 알고 있는데, 땅값으로 거의 절반이나 주고나면 어떻게 아파트를 짓겠나?”
“분양가는 평당 70만 원을 받으면 됩니다. 명품 아파트라는 광고를 앞세워서 말입니다.”
“그래도 그 가격에는 매입이 어려워. 가만. 그러고 보니 건설을 맡겠다는 게, 자네가 매입해 놓은 땅을 팔아먹기 위함이었나? 정작 회사는 남는 것도 별로 없고?”
이렇게까지 나오니 승지는 입지가 옹색해졌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며 대폭적인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럼, 평당 20만 원만 내십시오, 대신 모두 현찰로 주세요.”
“그만한 자금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재무 쪽을 불러서 알아보죠.”
“그럴까?”
곧이어 재무 쪽의 최고 중역인 심정찬 전무가 호출되어 왔다.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부회장이 물었다.
“현재 800억 원 정도의 현금을 융통할 수 있나?”
“그 정도로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외국에도 드물 것입니다.”
“여러 소리 말고 지금 보유한 현금이 얼마나 되나?”
부회장의 강경한 톤에 심정찬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마지못해 답을 했다.
“90억 원 정도 있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으니, 분양 후에 정산하면 안 되겠나?”
부회장의 물음에 승지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돈으로는 다른 사업을 해야 합니다. 정 그러시면 형질 변경된 땅을 담보로 제공해서 대출을 받는 것으로 하시죠?”
“자네 말대로 오일쇼크가 일어나면 금리도 폭등할 텐데, 이자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분양 후 들어오는 현금으로 즉시 상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터파기만 해놓아도 분양은 가능하니 일리가 있는 말일세.”
일단 승지의 말을 수긍한 부회장 하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심 전무를 향해 말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은 그 쪽이 더 밝을 테니, 금번에 주거지로 형질 변경된 대치동 땅 40만 평을 담보로…….”
이 부분에서 승지가 즉시 끼어들었다.
“이번에 건축할 20만 평에 한해서 대출을 받는 것으로…….”
“그건 은행 문턱이 높아서 곤란해. 그러니 분양되는 대로 즉시 갚는다는 조건으로 이번에는 자네가 양보하시게.”
“그 대신 이번에 접대비로 나간 10억 원도 분양 후 갚는 것으로 해주시죠?”
“허허, 800억 원이 수중에 들어오는 데도 그깟 10억 원까지 조건을 붙이나?”
“긴급하게 투자할 곳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디다 투자하는지는 몰라도 투자는 항상 조심해야 하네.”
“네, 부회장님!”
노파심에서 한 마디를 던진 하 부회장이 이번에는 심 전무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네, 부회장님!”
“자세한 건 여기 있는 고 상무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하고, 즉시 시행하도록 하게.”
“네, 부회장님!”
심 전무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부회장이 빠르게 표정을 굳히며 승지에게 말했다.
“이런 거래는 이번 한 번이면 족해.”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인사를 하고 심 전무와 함께 부회장실을 빠져나오는 승지의 표정은 희희낙락 그 자체였다. 평균 2만 원(평당)도 안 되는 가격에 사서 10배 이상의 차익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80억 원을 투자해 800억 원으로 10배나 뻥튀기를 했으니, 연신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다음에 투자할 곳을 생각하면 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승지가 심 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함께 주거지로 형질 변경된 도곡동 땅 40만 평도 함께 대출을 받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이미 말씀이 계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투기 목적이라면 조심하십시오.”
전생에서 이 사람 역시도 그룹, 아니 고가(高家)의 금고지기로서 끝까지 그 직분에 충실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류에 떠밀려 끝내는 사퇴를 하고야 말았지만, 그의 충성심만은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50대 초반의 강퍅하게 생긴 그를 보며 승지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으니,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내 주세요.”
“기왕에 대출을 받을 것이라면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 것이 제 소임이기도 하죠.”
“믿음직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바라보며 승지는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 * *
그로부터 5일 후에 승지는 통장으로 1천2백억 원이라는 거금을 입금 받았다.
대치동 20만 평을 그룹에 판 대금에, 도곡동 땅 40만 평을 담보로 대출받은 400억 원이 그 돈이었다. 모두 차명으로 여러 개의 통장에 분산 예치되어 있었다.
“쓸려면 통 크게 쓰시오. 시쳇말로 줄려면 홀딱 벗고 주랬다고……. 배달사고는 절대 안 날 테니 걱정 말고. 음…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접대를 받아본 경험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소. 아직은 조그마한 중소기업인데, 그 건설사도 형질 변경을 해주었소. 한데 그가 우리에게 준 금액이 얼마인줄 아시요?”
“그야 모르죠.”
강 상무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장 국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큰 평수가 아닌지라 1천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는 자그마치 그 열 배가 넘는 1억을 배팅합디다. 그래서 나는 물론이고 부하직원들까지도 크게 놀란 일이 있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기업은 조만간 큰 기업이 되지 않을까 싶소.”
승지는 그 기업이 어디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사람은 로비로 기업을 일구다시피 한 사람으로서,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10배 이상의 뇌물을 제공해서 받는 사람마다 큰 액수에 놀랐다는 설이 전해지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그 사람이 기업사에 다시 등장할지 안 할지 현재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대치동 땅이 그가 살 예정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승지가 선수를 쳐서 그 땅을 모두 사놓았기 때문에, 그 부지에 은마 아파트를 지어서 졸지에 대기업 반열에 든 그가 그런 행운을 또다시 거머쥘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10억을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승지의 말에 장 국장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10억을 주면 주는 거지, 조건은 또 뭐요?”
“기왕이면 도곡동 전답 40만 평도 주거용도로 변경해주시죠?”
“거참… 너무 박하게 나오는 것 아니오?”
“그 대신 정년 후에는 저희 그룹으로 모셔서, 사모님으로부터 ‘뒷방 늙은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젊은 사람이 별 걸 다 알고 있구먼. 남자가 직장 그만 두고 집안에서 빌빌 거리면, 그때는 정말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당하는 거지 별 수 있나. 그래서 자고로 사내는 눈 뜨면 밖으로 돌아야 돼.”
절반의 승낙은 한 것 같은데 아직 확답이 없어서 승지가 계속해 그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자, 장 국장이 다시 입을 뗐다.
“내 퇴직 후까지 보장한다고 하니, 보험 들어놓는 셈치고 이번 건에 한해서는 내가 양보하리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승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데 반해 접대에 이골이 난 강 상무는 그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역시 국장님은 화끈하십니다. 덕분에 차기 총수에게 찍히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내며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는 듯이 강 상무가 승지를 바라보았다. 승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 국장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두 사람은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정작 로비를 성공시키고도 승지는 소태를 씹은 듯이 입 안이 썼다.
이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 아니 개발독재가 한창 시행되고 있던 대한민국의 현주소였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접대는 끝까지 확실히 해야 했기에 승지가 장 국장을 보며 물었다.
“이젠 아이들을 들이시죠?”
“헌데… 돈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줄 거요?”
일을 확실하게 하려는 장 국장에게 강 상무가 핀잔을 주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급히 술잔을 비운 그가 다시 말했다.
“차명 계좌에 한꺼번에 입금해서 도장과 통장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해드릴 시간과 장소는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암, 그러면 틀림없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었다면, 기밀유지를 위해 현금이 가득 담긴 사과박스를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10억이면 다섯 상자 정도. 한 상자에 1만 원 권을 가득 담으면 2억 원 정도가 들어가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강 상무의 말대로 차명계좌에 입금해서 통장과 도장을 건네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짝 짝!
장 국장 자신이 먼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마담이 들어왔다.
“아이들 들여!”
장 국장이 호기롭게 말하자 강 상무가 덧붙였다.
“이 집에서 제일 예쁜 애들로만. 알지?”
“물론이죠. 그런 아이들로만 미리 뽑아서 대기시켜놓았습니다.”
“좋아. 그럼 어서 들이지.”
그녀가 공손히 절을 하고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미녀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직접 지시해 자리 배치를 했다. 누가 주빈인지를 잘 아는 까닭에 장 국장 옆에 제일 예쁜 아이를 앉히고, 승지와 강 상무 순으로 인물배치를 했다.
곧이어 세 미녀가 달려들어 아양을 떨면서 술잔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흥이 도도해지자 이번에는 4인조 실내악단까지 등장해 술판을 더욱 흥겹게 만들었다. 노래도 부르고 춤까지 추면서.
* * *
다음날 승지는 부회장을 만나 전후사정을 고하고 10억 원을 받아냈다. 이를 경리과 직원을 통해 차명 통장에 입금시킨 승지는 이를 또 강 상무에게 전달했다.
그로부터 5일 후.
80만 평의 전답이 주거지로 용도 변경 되었다. 대치동은 물론 도곡동의 40만 평까지도.
그러자 승지는 곧장 부회장을 만나서 담판에 들어갔다.
“고속버스터미널이 건설되고 있는 반포동 땅값이 요즘 얼마인 줄 아십니까?”
승지의 물음에 부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평당 70만 원 합니다.”
“그렇게나 비싸? 무교동만 해도 싼 곳은 40만 원 선이면 사는데.”
“무교동도 비싼 곳은 90만 원 선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를 많이 했군. 그래, 얼마를 원하는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평당 30만 원!”
승지가 딱 잘라 말하자, 고개부터 저은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4만 원에서 5만 원 하던 곳을 6, 7배나 뻥튀기한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전답뿐이잖은가.”
“이미 사통팔달의 도로가 뚫려 있어서 조만간 가격이 대폭 상승할 것입니다.”
승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설 용지 부근으로 영동5로(현 삼성로), 영동6로(현 영동대로), 남부순환로가 이미 건설되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동6로는 왕복 10차선에서 14차선 도로로서(70여 미터),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 다음으로 넓은 도로가 이미 조성되어 있어서 차가 별로 없던 당시로서는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질타를 받고 있었다.
물론 10년 후면 이 도로마저도 교통체증이 발생하지만 말이다.
“더하여 명문 중고등학교들이 이전을 마치는 대로, 그곳 주변에 학원가가 조성되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것입니다.”
“부실장 말대로 된다 해도 그건 훗날의 일이고, 분양가가 너무 높으면 분양해먹기 힘들 것이니, 이를 참조해주기 바라네.”
“좋습니다. 그럼, 25만 원으로 하시죠.”
“그것도 비싸. 요즘 분양가가 평당 65만 원으로 알고 있는데, 땅값으로 거의 절반이나 주고나면 어떻게 아파트를 짓겠나?”
“분양가는 평당 70만 원을 받으면 됩니다. 명품 아파트라는 광고를 앞세워서 말입니다.”
“그래도 그 가격에는 매입이 어려워. 가만. 그러고 보니 건설을 맡겠다는 게, 자네가 매입해 놓은 땅을 팔아먹기 위함이었나? 정작 회사는 남는 것도 별로 없고?”
이렇게까지 나오니 승지는 입지가 옹색해졌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며 대폭적인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럼, 평당 20만 원만 내십시오, 대신 모두 현찰로 주세요.”
“그만한 자금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재무 쪽을 불러서 알아보죠.”
“그럴까?”
곧이어 재무 쪽의 최고 중역인 심정찬 전무가 호출되어 왔다.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부회장이 물었다.
“현재 800억 원 정도의 현금을 융통할 수 있나?”
“그 정도로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외국에도 드물 것입니다.”
“여러 소리 말고 지금 보유한 현금이 얼마나 되나?”
부회장의 강경한 톤에 심정찬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마지못해 답을 했다.
“90억 원 정도 있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으니, 분양 후에 정산하면 안 되겠나?”
부회장의 물음에 승지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돈으로는 다른 사업을 해야 합니다. 정 그러시면 형질 변경된 땅을 담보로 제공해서 대출을 받는 것으로 하시죠?”
“자네 말대로 오일쇼크가 일어나면 금리도 폭등할 텐데, 이자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분양 후 들어오는 현금으로 즉시 상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터파기만 해놓아도 분양은 가능하니 일리가 있는 말일세.”
일단 승지의 말을 수긍한 부회장 하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심 전무를 향해 말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은 그 쪽이 더 밝을 테니, 금번에 주거지로 형질 변경된 대치동 땅 40만 평을 담보로…….”
이 부분에서 승지가 즉시 끼어들었다.
“이번에 건축할 20만 평에 한해서 대출을 받는 것으로…….”
“그건 은행 문턱이 높아서 곤란해. 그러니 분양되는 대로 즉시 갚는다는 조건으로 이번에는 자네가 양보하시게.”
“그 대신 이번에 접대비로 나간 10억 원도 분양 후 갚는 것으로 해주시죠?”
“허허, 800억 원이 수중에 들어오는 데도 그깟 10억 원까지 조건을 붙이나?”
“긴급하게 투자할 곳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디다 투자하는지는 몰라도 투자는 항상 조심해야 하네.”
“네, 부회장님!”
노파심에서 한 마디를 던진 하 부회장이 이번에는 심 전무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네, 부회장님!”
“자세한 건 여기 있는 고 상무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하고, 즉시 시행하도록 하게.”
“네, 부회장님!”
심 전무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부회장이 빠르게 표정을 굳히며 승지에게 말했다.
“이런 거래는 이번 한 번이면 족해.”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인사를 하고 심 전무와 함께 부회장실을 빠져나오는 승지의 표정은 희희낙락 그 자체였다. 평균 2만 원(평당)도 안 되는 가격에 사서 10배 이상의 차익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80억 원을 투자해 800억 원으로 10배나 뻥튀기를 했으니, 연신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다음에 투자할 곳을 생각하면 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승지가 심 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함께 주거지로 형질 변경된 도곡동 땅 40만 평도 함께 대출을 받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이미 말씀이 계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투기 목적이라면 조심하십시오.”
전생에서 이 사람 역시도 그룹, 아니 고가(高家)의 금고지기로서 끝까지 그 직분에 충실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류에 떠밀려 끝내는 사퇴를 하고야 말았지만, 그의 충성심만은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50대 초반의 강퍅하게 생긴 그를 보며 승지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으니,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내 주세요.”
“기왕에 대출을 받을 것이라면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 것이 제 소임이기도 하죠.”
“믿음직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바라보며 승지는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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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일 후에 승지는 통장으로 1천2백억 원이라는 거금을 입금 받았다.
대치동 20만 평을 그룹에 판 대금에, 도곡동 땅 40만 평을 담보로 대출받은 400억 원이 그 돈이었다. 모두 차명으로 여러 개의 통장에 분산 예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