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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돈 벼락(2)
승지는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데 급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사람은 승지에게 호통부터 쳤다.
“아무리 바빠도 사원이 중역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되지.”
“아, 네.”
다투기 싫어서 수긍하는 척을 하며 승지는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는 마치 씨름선수 같은 체형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목덜미가 굵고 손발도 큼직큼직한 것이, 웬만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상이었다. 그의 시비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젊은 놈이 버릇이 없군. 어딜 위아래로 훑어?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정도면 그룹의 중역 아니겠어? 하면 다른 계열사 사원이라도 조심하는 맛이 있어야지. 안 그래?”
“헌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뭐?”
그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수긍을 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지게 자신의 신분을 묻다니.
“나 개발의 홍성기 사장이다.”
“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승지가 깍듯이 사과를 하자 의외로 단순한 인물인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모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데 18층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건가?”
“부회장님 좀 뵈려고요.”
“부회장님은 왜?”
이때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멎었다.
“다음에는 조심하라고.”
“네, 사장님!”
승지가 깍듯이 예우를 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이동해 18층에 멎었다.
18층에서 내린 승지는 지금은 텅 비어 있는 회장실을 지나쳐 부회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여비서가 그를 맞았다.
“실례지만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부회장님 좀 뵈려고 왔습니다.”
“그게 아니고,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눈을 상큼하게 치켜 올리기까지 하며 물으니, 예쁜 얼굴이었지만 제법 무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승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고승지입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 의문부호가 피어올랐을 때였다. 부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너라.”
“안녕하십니까.”
곧이어 승지가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멍한 표정이던 비서가 곧장 그를 따라 들어왔다. 승지가 자신이 권하는 대로 응접실 소파에 앉자, 하준이 승지를 건네다 보며 물었다.
“뭐로 들겠나? 커피?”
“네.”
승지의 대답에 하준이 여비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었지?”
“네, 부회장님!”
돌아선 여비서의 등에다 대고 승지가 말했다.
“커피믹스로 부탁해요.”
“네.”
커피믹스는 76년 동서식품에서 처음 출시한 인스턴트커피 즉 봉지커피를 말하는 것이었다.
“네 이야기는 새벽에 회장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다. 우선 건설과 상사 쪽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네.”
“헌데 내 생각은 다르다.”
“네?”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니? 그룹의 전반적인 일을 취급하는 곳이니, 경영수업에는 제일 적합한 부서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글쎄요…….”
“적(籍)은 그곳에 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해봐.”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직위는 부실장 정도로 하고. 실장이 전무급이니 말이야.”
“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타당하면 가능한 한 들어주는 쪽으로 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하하하. 장인 소릴 들으니 좋긴 한데, 여긴 엄연히 회사니 공식적인 직함으로 불러주시게.”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승지의 대답에 엷은 미소를 짓던 하준이 다시 입을 떼려는데, 여비서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비서가 탁자에 커피 잔을 내려놓자, 하준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 여기 이 친구는 회장님의 유일한 독자로, 경영수업을 받으러 온 고승지라고 하네. 그러니 앞으로는 실수 없도록.”
“네? 아, 네!”
깜짝 놀랐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는데, 상당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표정을 수습하며 승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직함을 불러야 하는데 알 수가 없어서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이를 눈치 채고는 하준이 말했다.
“기획조정실 부실장이고 상무이사로 발령 낼 거야.”
“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럼 나가서 일보게.”
“네, 부회장님!”
그녀가 나가자 하준이 승지에게 물었다.
“아파트사업을 하겠다고?”
“네. 우선 용도변경부터 신청해야 하는데, 쉽게 허락이 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손을 써야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승지가 두 손을 모으자 하준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은 로비부터 배우는 것이 어떻겠나? 사업을 하다보면 필수불가결한 요소야.”
“실탄만 준비해주시면 얼마든지 해보이겠습니다.”
“좋았어! 그 대신, 그룹이 지급할 토지대금에서 상계할 걸세.”
“당연하죠.”
“좋아!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으음… 이만 들고 일어나세. 기획조정실의 실장 이하 직원들을 소개해줄 테니.”
“네, 부회장님!”
답을 하고 승지는 아직 채 식지 않은 커피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 모습에 하준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거 성질 한 번 급하군.”
하준도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지도 일어나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하준이 잠시 멈추어 서더니 승지에게 말했다.
“회장님은 이제 경영에서 손을 떼신다 하니, 경영수업을 마치는 대로 자네가 회장이 될 게 아니겠나? 그러니 회장 비서실의 직원들도 필요하면 데려다 쓰도록 하게.”
“너무 과분한 대우 아닙니까?”
“놀리면서 봉급 주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부회장님께서 활용하시죠?”
고개를 저으며 하준이 말했다.
“나에게는 이미 비서들이 배당되어 있으니 자네가 활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장실을 상무실로 바꾸어서 써도 되네. 이 역시 노는 공간을 활용하자는 취지이니, 대우 운운하지는 말고.”
“네.”
“그 역시 경영수업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네.”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해 17층에 도착하자, 하준은 곧장 기획조정실장이라는 표찰이 붙은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부회장의 등장에 정면으로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를 승지는 예리하게 훑었다. 중간키에 여리여리한 체형.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창백한 안색.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참모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전생에서 이미 봤던 사람이었기에 승지는 소개받지 않고도 그를 알고 있었다. 조갈량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조민(趙敏). 아버지 사후, 하씨네에 붙어 자신을 배반한 자였다.
그런 그가 하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아,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서 말이네.”
가볍게 답을 하고 하준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사 나누시게.”
“네, 부회장님!”
승지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서는가 싶더니 한 손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승지라고 합니다.”
“아……! 어디서 뵌 것 같다 했더니, 회장님의 독자셨군요. 회장님의 자당 어르신 회갑연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그러실 겁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부회장보다 승지에게 먼저 자리를 권하는 그의 태도에 하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순식간에 평온을 회복했다.
곧이어 조민이 권하는 대로 두 사람은 응접용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여비서를 불러 차를 주문한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는 경영수업을 받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떠보는 듯한 조민의 태도가 불쾌해 승지가 입을 다물고 있자, 하준이 대신 답을 했다.
“그래서 소개하려고 온 것일세. 기획조정실 부실장부터 시작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게.”
“아, 네!”
일단 답부터 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업무 전반에 대해 브리핑을 할까요?”
“아닙니다. 오늘은 인사차 들른 것이니,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먼저겠지요.”
승지의 말에 그가 곧장 동의하며 말했다.
“그도 그렇습니다. 차 한 잔 마시는 대로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하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는 분명 자네가 상관 아닌가. 과공은 비례라는 말을 명심하시게.”
“네, 부회장님!”
답은 분명히 했지만 곤란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의 모습을 보며, 승지는 내심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불쑥 물었다.
“기업은 분명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 맞죠?”
“그야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분명 그리해야 합니다.”
“한데, 만약 그 조직이 조직원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으로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응당 구조조정을 단행해 적정한 인원으로 꾸려가야 하겠죠.”
“내가 어느 부서의 상사라 해도, 자신의 조직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예산과 인원배당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조직에는 군살이 붙고, 종당에는 이윤추구가 아닌 조직원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으로 변질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깜짝 놀라던 표정이던 하준은 종내에는 감탄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직 내에 묻혀 있다 보니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부회장이 그럴 진데, 조민은 더욱 놀라서 연신 맞장구를 쳐댔다.
“구조조정을 넘어,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군살이 찌는 것을 방지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사내(社內)의 긴장감도 유지되고.”
“명심하겠습니다. 당장 올해의 구조조정 계획부터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승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보자, 그가 미소 띤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나조차도 조직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생각지 못한 발상일세.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군살이 찌는 것을 방지하고, 그룹 내 긴장감도 유지하도록 하세.”
“네, 부회장님!”
답변은 조민이 했다.
이때 차가 나왔기에 승지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녹차의 향기를 음미했다.
차를 다 마신 세 사람은 곧 그곳을 나와 인접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지만 생경한 풍경이기도 했다. 백여 명의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통화를 하면서 웃고 떠들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주목!”
자신의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직원들이 일제히 업무를 멈추고 주시하자, 조민이 말했다.
“새로 부실장님이 오셨다. 직접 소개해 주시죠.”
실장이 사원이라 해도 좋을 젊은이를 깍듯이 예우하는 것을 보며 모두 놀라는 가운데, 승지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당분간 여러분과 호흡을 맞출 부실장 고승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 씨? 그럼 혹시……?”
조용한 가운데 한 사람이 내뱉은 말에 직원들 모두가 더욱 눈에 힘을 모으자, 하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짐작들 하는 그대로 회장님의 독자로서, 머지않아 우리 그룹의 회장이 되실 분이다. 그러니 다들 젊다고 해서 예의를 잃지 않도록 조심들 하게.”
“네, 부회장님!”
모두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가운데, 승지가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
“또 뵙겠습니다.”
“아, 네!”
일부가 얼떨결에 답하는 것을 들으며 승지는 곧장 몸을 돌렸다.
조민과도 헤어진 두 사람은 다시 18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승지의 청으로 두 사람은 부회장실이 아닌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비서 혼자 비서실을 지키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부회장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부회장님!”
“다른 사람들은?”
“실장님 이하 회의 중입니다.”
“회의실에서?”
“네, 부회장님!”
여비서의 말에 하준은 곧장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는 긴 탁자를 중심으로 십여 명의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 소병규가 정중앙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준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전생의 기억으로 익히 알고 있던 비서실장 소병규. 넓적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 오십대 초반에 벌써 반백의 머리. 평소에는 온화하나 한 번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하는 의리의 사내.
모두가 자신을 배신했어도 오직 두 사람만이 끝까지 자신을 지지하고 따랐다. 그 둘 중에 한 사내.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되자, 승지는 왈칵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승지는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데 급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사람은 승지에게 호통부터 쳤다.
“아무리 바빠도 사원이 중역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되지.”
“아, 네.”
다투기 싫어서 수긍하는 척을 하며 승지는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는 마치 씨름선수 같은 체형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목덜미가 굵고 손발도 큼직큼직한 것이, 웬만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상이었다. 그의 시비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젊은 놈이 버릇이 없군. 어딜 위아래로 훑어?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정도면 그룹의 중역 아니겠어? 하면 다른 계열사 사원이라도 조심하는 맛이 있어야지. 안 그래?”
“헌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뭐?”
그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수긍을 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지게 자신의 신분을 묻다니.
“나 개발의 홍성기 사장이다.”
“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승지가 깍듯이 사과를 하자 의외로 단순한 인물인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모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데 18층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건가?”
“부회장님 좀 뵈려고요.”
“부회장님은 왜?”
이때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멎었다.
“다음에는 조심하라고.”
“네, 사장님!”
승지가 깍듯이 예우를 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이동해 18층에 멎었다.
18층에서 내린 승지는 지금은 텅 비어 있는 회장실을 지나쳐 부회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여비서가 그를 맞았다.
“실례지만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부회장님 좀 뵈려고 왔습니다.”
“그게 아니고,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눈을 상큼하게 치켜 올리기까지 하며 물으니, 예쁜 얼굴이었지만 제법 무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승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고승지입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 의문부호가 피어올랐을 때였다. 부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너라.”
“안녕하십니까.”
곧이어 승지가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멍한 표정이던 비서가 곧장 그를 따라 들어왔다. 승지가 자신이 권하는 대로 응접실 소파에 앉자, 하준이 승지를 건네다 보며 물었다.
“뭐로 들겠나? 커피?”
“네.”
승지의 대답에 하준이 여비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었지?”
“네, 부회장님!”
돌아선 여비서의 등에다 대고 승지가 말했다.
“커피믹스로 부탁해요.”
“네.”
커피믹스는 76년 동서식품에서 처음 출시한 인스턴트커피 즉 봉지커피를 말하는 것이었다.
“네 이야기는 새벽에 회장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다. 우선 건설과 상사 쪽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네.”
“헌데 내 생각은 다르다.”
“네?”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니? 그룹의 전반적인 일을 취급하는 곳이니, 경영수업에는 제일 적합한 부서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글쎄요…….”
“적(籍)은 그곳에 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해봐.”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직위는 부실장 정도로 하고. 실장이 전무급이니 말이야.”
“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타당하면 가능한 한 들어주는 쪽으로 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하하하. 장인 소릴 들으니 좋긴 한데, 여긴 엄연히 회사니 공식적인 직함으로 불러주시게.”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승지의 대답에 엷은 미소를 짓던 하준이 다시 입을 떼려는데, 여비서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비서가 탁자에 커피 잔을 내려놓자, 하준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 여기 이 친구는 회장님의 유일한 독자로, 경영수업을 받으러 온 고승지라고 하네. 그러니 앞으로는 실수 없도록.”
“네? 아, 네!”
깜짝 놀랐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는데, 상당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표정을 수습하며 승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직함을 불러야 하는데 알 수가 없어서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이를 눈치 채고는 하준이 말했다.
“기획조정실 부실장이고 상무이사로 발령 낼 거야.”
“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럼 나가서 일보게.”
“네, 부회장님!”
그녀가 나가자 하준이 승지에게 물었다.
“아파트사업을 하겠다고?”
“네. 우선 용도변경부터 신청해야 하는데, 쉽게 허락이 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손을 써야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승지가 두 손을 모으자 하준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은 로비부터 배우는 것이 어떻겠나? 사업을 하다보면 필수불가결한 요소야.”
“실탄만 준비해주시면 얼마든지 해보이겠습니다.”
“좋았어! 그 대신, 그룹이 지급할 토지대금에서 상계할 걸세.”
“당연하죠.”
“좋아!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으음… 이만 들고 일어나세. 기획조정실의 실장 이하 직원들을 소개해줄 테니.”
“네, 부회장님!”
답을 하고 승지는 아직 채 식지 않은 커피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 모습에 하준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거 성질 한 번 급하군.”
하준도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지도 일어나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하준이 잠시 멈추어 서더니 승지에게 말했다.
“회장님은 이제 경영에서 손을 떼신다 하니, 경영수업을 마치는 대로 자네가 회장이 될 게 아니겠나? 그러니 회장 비서실의 직원들도 필요하면 데려다 쓰도록 하게.”
“너무 과분한 대우 아닙니까?”
“놀리면서 봉급 주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부회장님께서 활용하시죠?”
고개를 저으며 하준이 말했다.
“나에게는 이미 비서들이 배당되어 있으니 자네가 활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장실을 상무실로 바꾸어서 써도 되네. 이 역시 노는 공간을 활용하자는 취지이니, 대우 운운하지는 말고.”
“네.”
“그 역시 경영수업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네.”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해 17층에 도착하자, 하준은 곧장 기획조정실장이라는 표찰이 붙은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부회장의 등장에 정면으로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를 승지는 예리하게 훑었다. 중간키에 여리여리한 체형.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창백한 안색.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참모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전생에서 이미 봤던 사람이었기에 승지는 소개받지 않고도 그를 알고 있었다. 조갈량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조민(趙敏). 아버지 사후, 하씨네에 붙어 자신을 배반한 자였다.
그런 그가 하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아,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서 말이네.”
가볍게 답을 하고 하준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사 나누시게.”
“네, 부회장님!”
승지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서는가 싶더니 한 손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승지라고 합니다.”
“아……! 어디서 뵌 것 같다 했더니, 회장님의 독자셨군요. 회장님의 자당 어르신 회갑연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그러실 겁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부회장보다 승지에게 먼저 자리를 권하는 그의 태도에 하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순식간에 평온을 회복했다.
곧이어 조민이 권하는 대로 두 사람은 응접용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여비서를 불러 차를 주문한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는 경영수업을 받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떠보는 듯한 조민의 태도가 불쾌해 승지가 입을 다물고 있자, 하준이 대신 답을 했다.
“그래서 소개하려고 온 것일세. 기획조정실 부실장부터 시작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게.”
“아, 네!”
일단 답부터 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업무 전반에 대해 브리핑을 할까요?”
“아닙니다. 오늘은 인사차 들른 것이니,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먼저겠지요.”
승지의 말에 그가 곧장 동의하며 말했다.
“그도 그렇습니다. 차 한 잔 마시는 대로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하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는 분명 자네가 상관 아닌가. 과공은 비례라는 말을 명심하시게.”
“네, 부회장님!”
답은 분명히 했지만 곤란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의 모습을 보며, 승지는 내심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불쑥 물었다.
“기업은 분명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 맞죠?”
“그야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분명 그리해야 합니다.”
“한데, 만약 그 조직이 조직원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으로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응당 구조조정을 단행해 적정한 인원으로 꾸려가야 하겠죠.”
“내가 어느 부서의 상사라 해도, 자신의 조직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예산과 인원배당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몇 년이 지나다 보면 조직에는 군살이 붙고, 종당에는 이윤추구가 아닌 조직원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으로 변질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깜짝 놀라던 표정이던 하준은 종내에는 감탄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직 내에 묻혀 있다 보니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부회장이 그럴 진데, 조민은 더욱 놀라서 연신 맞장구를 쳐댔다.
“구조조정을 넘어,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군살이 찌는 것을 방지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사내(社內)의 긴장감도 유지되고.”
“명심하겠습니다. 당장 올해의 구조조정 계획부터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승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보자, 그가 미소 띤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나조차도 조직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생각지 못한 발상일세.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군살이 찌는 것을 방지하고, 그룹 내 긴장감도 유지하도록 하세.”
“네, 부회장님!”
답변은 조민이 했다.
이때 차가 나왔기에 승지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녹차의 향기를 음미했다.
차를 다 마신 세 사람은 곧 그곳을 나와 인접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지만 생경한 풍경이기도 했다. 백여 명의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통화를 하면서 웃고 떠들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주목!”
자신의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직원들이 일제히 업무를 멈추고 주시하자, 조민이 말했다.
“새로 부실장님이 오셨다. 직접 소개해 주시죠.”
실장이 사원이라 해도 좋을 젊은이를 깍듯이 예우하는 것을 보며 모두 놀라는 가운데, 승지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당분간 여러분과 호흡을 맞출 부실장 고승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 씨? 그럼 혹시……?”
조용한 가운데 한 사람이 내뱉은 말에 직원들 모두가 더욱 눈에 힘을 모으자, 하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짐작들 하는 그대로 회장님의 독자로서, 머지않아 우리 그룹의 회장이 되실 분이다. 그러니 다들 젊다고 해서 예의를 잃지 않도록 조심들 하게.”
“네, 부회장님!”
모두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가운데, 승지가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
“또 뵙겠습니다.”
“아, 네!”
일부가 얼떨결에 답하는 것을 들으며 승지는 곧장 몸을 돌렸다.
조민과도 헤어진 두 사람은 다시 18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승지의 청으로 두 사람은 부회장실이 아닌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비서 혼자 비서실을 지키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부회장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부회장님!”
“다른 사람들은?”
“실장님 이하 회의 중입니다.”
“회의실에서?”
“네, 부회장님!”
여비서의 말에 하준은 곧장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는 긴 탁자를 중심으로 십여 명의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 소병규가 정중앙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준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전생의 기억으로 익히 알고 있던 비서실장 소병규. 넓적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 오십대 초반에 벌써 반백의 머리. 평소에는 온화하나 한 번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하는 의리의 사내.
모두가 자신을 배신했어도 오직 두 사람만이 끝까지 자신을 지지하고 따랐다. 그 둘 중에 한 사내.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되자, 승지는 왈칵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