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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차라리 건물주(3)
다음날인 9월 10일.
병윤은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 양성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상속부터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윤은 그룹의 변호사를 자택으로 호출했다.
오전 10시.
호출된 고문 변호사 김양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때 거실에는 아버지 고병윤은 물론 어머니, 심지어 할머니까지 모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승지까지도. 다만 여동생은 아침 일찍 외출해 집안에 없었다. 가족이 총출동해 있다시피 한 것을 보고 김양기 변호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회장님?”
“있지. 일단 앉으시게.”
“네, 회장님.”
그는 네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 좋아하지?”
“네, 회장님.”
손님이 오면 으레 차를 내와야 되는 것이 상례이기에, 주방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가정부가 즉시 주방으로 향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런 관계로 상속에 대해 구술할 테니, 내 말 그대로를 공증해주시게.”
“아직은 수(壽)가 많이 남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야… 물론이죠.”
“그래서, 내 지분의 80%를 여기 앉아있는 아들놈의 명의로 해주시게.”
“하옵시면 분쟁의 소지가…….”
“딸들한테서는 내가 모두 동의서를 받아놓을 테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세부적인 사항은 재무 쪽과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게.”
“네.”
그때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마시며 두 사람의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걸 지켜보며 승지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일단 자신이 원하던 바가 한 가지는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승지는 이제부터 부회장의 지분 중에서 반 이상을 받아내기 위해 진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승지는 이날 오후 자신의 차를 손수 운전해서 부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 차는 승지가 어머니를 졸라서 겨우 얻어낸 것이다.
비록 국산 소형차였지만, 자신의 승용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는 가급적 차를 몰고 가지 않았다.
굳이 위화감을 조성하고 싶지가 않았고,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또한 남들이 알아봐야 주변에 똥파리들만 들끓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관계로 친한 친구들도 그를 그냥 잘 사는 집안의 아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어온 여자 친구 김윤진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평창동 부회장의 집 앞에 도착한 승지는 차에서 내려 인터폰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니 효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오빠.”
간단한 대답에 효주의 상기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문 열어드릴게요.”
“응.”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쪽문이 열리며 효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얼굴에 오동통한 몸매의 소유자. 그런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승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빠!”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니?”
보자마자 나온 ‘공부’소리에 질색한 효주는 품에서 떨어져나가며 톡 쏘아붙였다.
“오빠도 공부타령이야!”
“네 나이에 공부 말고 할 게 뭐가 있는데?”
“오빠랑 연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자.”
“결혼하기 전에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뭘 더 알아봐?”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진 효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부회장님은?”
효주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답을 했다.
“안에 계셔요.”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
“응.”
“할머니는?”
“둘째 작은아버지 집에 며칠 계셨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시다고 어제 저녁에 오셨어.”
“들어가자. 가서 인사드려야지.”
“오케이!”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효주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잔디밭을 누볐다.
곧 그녀를 따라 승지는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승지가 말했다.
“할머니부터 뵙자.”
“알았어요.”
그녀가 앞장서 가더니 거실 한쪽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단정히 보료 위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서는 승지를 보고는 반색하며 말했다.
“어서 오너라! 못 본 사이에 더욱 헌앙해진 것 같네.”
할머니의 칭찬에 승지가 웃으며 물었다.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
“보다시피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다리가 좀 아픈 것 외에는 크게 불편한 곳은 없구나.”
그녀의 말처럼 할머니는 비만한 편이었다.
척 보기에도 부잣집 맏며느리 상으로, 풍채도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체중이 많이 나가 관절에 무리가 가서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그나저나 효주를 얼른 데려가야지?”
할머니의 말에 승지는 씩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아비도 오늘은 모처럼만에 집에 있는 것 같던데?”
“바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죠.”
“그래, 그래. 어서 가보거라.”
“네, 할머니.”
곧 두 사람은 할머니의 방을 나와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는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하준이 두 사람을 맞았다.
“왔니? 게 앉거라.”
“네.”
승지가 하준의 말에 티 탁자 앞에 있던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그를 제지하며 팔짱을 끼고는 효주가 말했다.
“우리 어때요? 잘 어울려요?”
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하준은 역정을 냈다.
“아비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잘 어울리냐고 묻지도 못해요?”
“허허, 거 참…….”
실소를 흘리던 하준이 포기한 듯이 물었다.
“그렇게 좋냐?”
“네, 죽고 못 살죠.”
“네 생각이 그러니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나 우리 그룹을 위해서라도 내 지분의 절반을 너희 부부에게 상속시키고, 조만간 식을 올리도록 하자.”
“정말이죠, 아빠?”
말과 함께 갑자기 하준에게 달려든 효주는 그의 볼에 기습 뽀뽀를 했다. 싫지는 않은지 미소 띤 표정으로 볼을 쓰다듬으며 하준이 말했다.
“침 묻었잖아, 이놈아!”
“호호호, 그래도 좋으시죠? 모처럼만에 딸의 뽀뽀를 받으니.”
“암, 당연하지. 우리 모처럼만에 함께 저녁식사나 하러 갈까?”
“할머니는 어쩌고요?”
효주의 물음에 하준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을 했다.
“당연히 모시고 가야지.”
“알았어요. 그럼 할머니 모시고 나올 게요.”
“그래라.”
효주가 먼저 서재를 빠져나가자, 하준과 승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하준이 먼저 입을 떼었다.
“효주를 데려가거든 마음고생 시키지 말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네.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하지만 심성은 고운 아이니까.”
“당연하죠. 평생 속 썩이지 않고 잘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자네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만. 그나저나 이제는 후계자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형님의 수도 1년이 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중간고사만 끝나면 정식으로 출근해 업무를 배워볼까 합니다. 이번 시험만 끝나면 사실상 모든 학사 일정이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학기말 시험은 논문으로 대체할 테고, 그 안에도 취업해 나가는 학생들이 많아서 수업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같아서는 어디 중간고사나 제대로 치르겠나? TV를 보면 유신헌법을 철폐하라고 연일 학내 시위가 난리던데.”
“아닌 게 아니라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학내가 온통 쓰레기장이고 공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휴강을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때, 효주가 할머니를 모시고 나오자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는 곧 서재를 나섰다. 이후 네 사람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한정식 집에 들러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 * *
그로부터 3일 후.
양가 합의 하에 고승지와 하효주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속전속결이었다. 그 날짜는 10월 22일 일요일로, 한 달하고도 일주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양가는 결혼식에 가까운 친인척만 참석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승지에게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김윤진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그녀였다. 이후 그녀를 줄곧 쫓아다니다 그녀가 마음을 받아준 이래로, 두 사람은 약 4년간 꾸준히 사귀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승지는 잘 가던 시내의 모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무슨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어? 심각한 표정인데?”
“응, 그럴 일이 있어. 그보다, 취업 결정은 했니?”
“난 교사가 될 거잖아. 그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니, 실망인데…….”
“그건 아니고, 요즘에 내 심정이 복잡하다보니 그래.”
“그럼 승지 씨는?”
“나는 벌써 결정됐지. GL그룹이라고… 학과장 추천으로.”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윤진은 축하를 해주었다.
“GL그룹이면 재계서열 1위 기업이잖아. 잘 됐네. 축하해!”
“고마워.”
기계적으로 답은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헤어질 때라고. 그런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변죽만 울렸다.
“그런데 교사는 근무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지 않나?”
“맞아. 그래서 나는 고향인 울산으로 신청했어.”
“그렇게 되면 만나기 힘들겠다.”
“내가 주말에 종종 올라올게. 너도 기회 되면 내려오고.”
윤진의 말에 승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힘들 것 같아.”
“왜?”
“나 곧 결혼해.”
“뭐? 조선시대도 아니고, 벌써 무슨 결혼?”
경악한 표정인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승지는 힘겹게 입을 뗐다.
“사실은 어릴 때 혼약을 맺은 처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어.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혼인하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
자신의 신분만 빼놓고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셈이었다. 승지의 말에 윤진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되니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이 장내를 지배했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승지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도……. 미안하지만 식장에는 못갈 것 같아.”
“이해해. 이만… 나갈까?”
“응.”
승지는 식은 커피를 급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윤진은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윤진도 마음을 정리했는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승지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다방에서 나온 둘은 이렇게 대학 4년간의 추억만을 남긴 채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다음날인 9월 10일.
병윤은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 양성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상속부터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윤은 그룹의 변호사를 자택으로 호출했다.
오전 10시.
호출된 고문 변호사 김양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때 거실에는 아버지 고병윤은 물론 어머니, 심지어 할머니까지 모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승지까지도. 다만 여동생은 아침 일찍 외출해 집안에 없었다. 가족이 총출동해 있다시피 한 것을 보고 김양기 변호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회장님?”
“있지. 일단 앉으시게.”
“네, 회장님.”
그는 네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 좋아하지?”
“네, 회장님.”
손님이 오면 으레 차를 내와야 되는 것이 상례이기에, 주방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가정부가 즉시 주방으로 향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런 관계로 상속에 대해 구술할 테니, 내 말 그대로를 공증해주시게.”
“아직은 수(壽)가 많이 남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야… 물론이죠.”
“그래서, 내 지분의 80%를 여기 앉아있는 아들놈의 명의로 해주시게.”
“하옵시면 분쟁의 소지가…….”
“딸들한테서는 내가 모두 동의서를 받아놓을 테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세부적인 사항은 재무 쪽과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게.”
“네.”
그때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마시며 두 사람의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걸 지켜보며 승지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일단 자신이 원하던 바가 한 가지는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승지는 이제부터 부회장의 지분 중에서 반 이상을 받아내기 위해 진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승지는 이날 오후 자신의 차를 손수 운전해서 부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 차는 승지가 어머니를 졸라서 겨우 얻어낸 것이다.
비록 국산 소형차였지만, 자신의 승용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는 가급적 차를 몰고 가지 않았다.
굳이 위화감을 조성하고 싶지가 않았고,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또한 남들이 알아봐야 주변에 똥파리들만 들끓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관계로 친한 친구들도 그를 그냥 잘 사는 집안의 아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귀어온 여자 친구 김윤진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평창동 부회장의 집 앞에 도착한 승지는 차에서 내려 인터폰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니 효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오빠.”
간단한 대답에 효주의 상기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문 열어드릴게요.”
“응.”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쪽문이 열리며 효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얼굴에 오동통한 몸매의 소유자. 그런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승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빠!”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니?”
보자마자 나온 ‘공부’소리에 질색한 효주는 품에서 떨어져나가며 톡 쏘아붙였다.
“오빠도 공부타령이야!”
“네 나이에 공부 말고 할 게 뭐가 있는데?”
“오빠랑 연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자.”
“결혼하기 전에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뭘 더 알아봐?”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진 효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부회장님은?”
효주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답을 했다.
“안에 계셔요.”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
“응.”
“할머니는?”
“둘째 작은아버지 집에 며칠 계셨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시다고 어제 저녁에 오셨어.”
“들어가자. 가서 인사드려야지.”
“오케이!”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효주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잔디밭을 누볐다.
곧 그녀를 따라 승지는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승지가 말했다.
“할머니부터 뵙자.”
“알았어요.”
그녀가 앞장서 가더니 거실 한쪽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단정히 보료 위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서는 승지를 보고는 반색하며 말했다.
“어서 오너라! 못 본 사이에 더욱 헌앙해진 것 같네.”
할머니의 칭찬에 승지가 웃으며 물었다.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
“보다시피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다리가 좀 아픈 것 외에는 크게 불편한 곳은 없구나.”
그녀의 말처럼 할머니는 비만한 편이었다.
척 보기에도 부잣집 맏며느리 상으로, 풍채도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체중이 많이 나가 관절에 무리가 가서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그나저나 효주를 얼른 데려가야지?”
할머니의 말에 승지는 씩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아비도 오늘은 모처럼만에 집에 있는 것 같던데?”
“바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죠.”
“그래, 그래. 어서 가보거라.”
“네, 할머니.”
곧 두 사람은 할머니의 방을 나와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는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하준이 두 사람을 맞았다.
“왔니? 게 앉거라.”
“네.”
승지가 하준의 말에 티 탁자 앞에 있던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그를 제지하며 팔짱을 끼고는 효주가 말했다.
“우리 어때요? 잘 어울려요?”
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하준은 역정을 냈다.
“아비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잘 어울리냐고 묻지도 못해요?”
“허허, 거 참…….”
실소를 흘리던 하준이 포기한 듯이 물었다.
“그렇게 좋냐?”
“네, 죽고 못 살죠.”
“네 생각이 그러니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나 우리 그룹을 위해서라도 내 지분의 절반을 너희 부부에게 상속시키고, 조만간 식을 올리도록 하자.”
“정말이죠, 아빠?”
말과 함께 갑자기 하준에게 달려든 효주는 그의 볼에 기습 뽀뽀를 했다. 싫지는 않은지 미소 띤 표정으로 볼을 쓰다듬으며 하준이 말했다.
“침 묻었잖아, 이놈아!”
“호호호, 그래도 좋으시죠? 모처럼만에 딸의 뽀뽀를 받으니.”
“암, 당연하지. 우리 모처럼만에 함께 저녁식사나 하러 갈까?”
“할머니는 어쩌고요?”
효주의 물음에 하준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을 했다.
“당연히 모시고 가야지.”
“알았어요. 그럼 할머니 모시고 나올 게요.”
“그래라.”
효주가 먼저 서재를 빠져나가자, 하준과 승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하준이 먼저 입을 떼었다.
“효주를 데려가거든 마음고생 시키지 말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네.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하지만 심성은 고운 아이니까.”
“당연하죠. 평생 속 썩이지 않고 잘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자네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만. 그나저나 이제는 후계자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형님의 수도 1년이 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중간고사만 끝나면 정식으로 출근해 업무를 배워볼까 합니다. 이번 시험만 끝나면 사실상 모든 학사 일정이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학기말 시험은 논문으로 대체할 테고, 그 안에도 취업해 나가는 학생들이 많아서 수업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같아서는 어디 중간고사나 제대로 치르겠나? TV를 보면 유신헌법을 철폐하라고 연일 학내 시위가 난리던데.”
“아닌 게 아니라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학내가 온통 쓰레기장이고 공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휴강을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때, 효주가 할머니를 모시고 나오자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는 곧 서재를 나섰다. 이후 네 사람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한정식 집에 들러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 * *
그로부터 3일 후.
양가 합의 하에 고승지와 하효주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속전속결이었다. 그 날짜는 10월 22일 일요일로, 한 달하고도 일주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양가는 결혼식에 가까운 친인척만 참석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승지에게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김윤진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그녀였다. 이후 그녀를 줄곧 쫓아다니다 그녀가 마음을 받아준 이래로, 두 사람은 약 4년간 꾸준히 사귀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승지는 잘 가던 시내의 모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무슨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어? 심각한 표정인데?”
“응, 그럴 일이 있어. 그보다, 취업 결정은 했니?”
“난 교사가 될 거잖아. 그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니, 실망인데…….”
“그건 아니고, 요즘에 내 심정이 복잡하다보니 그래.”
“그럼 승지 씨는?”
“나는 벌써 결정됐지. GL그룹이라고… 학과장 추천으로.”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윤진은 축하를 해주었다.
“GL그룹이면 재계서열 1위 기업이잖아. 잘 됐네. 축하해!”
“고마워.”
기계적으로 답은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헤어질 때라고. 그런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변죽만 울렸다.
“그런데 교사는 근무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지 않나?”
“맞아. 그래서 나는 고향인 울산으로 신청했어.”
“그렇게 되면 만나기 힘들겠다.”
“내가 주말에 종종 올라올게. 너도 기회 되면 내려오고.”
윤진의 말에 승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힘들 것 같아.”
“왜?”
“나 곧 결혼해.”
“뭐? 조선시대도 아니고, 벌써 무슨 결혼?”
경악한 표정인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승지는 힘겹게 입을 뗐다.
“사실은 어릴 때 혼약을 맺은 처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어.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혼인하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
자신의 신분만 빼놓고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셈이었다. 승지의 말에 윤진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되니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이 장내를 지배했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승지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도……. 미안하지만 식장에는 못갈 것 같아.”
“이해해. 이만… 나갈까?”
“응.”
승지는 식은 커피를 급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윤진은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윤진도 마음을 정리했는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승지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다방에서 나온 둘은 이렇게 대학 4년간의 추억만을 남긴 채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