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차라리 건물주(2)





전생에도 이랬었다. 그때도 아버지의 강요로 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효주와 조혼을 해야 했다. 물론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후 승지는 큰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승지는 효주가 무남독녀인지라 장인의 지분 20%를 그의 사후에 받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씨 네가 가진 40%의 지분 중에 장인이 가지고 있던 20% 전체를 말이다.

하지만 그 지분은 장인의 형제들인 네 동생에게 각각 5%씩 갔고, 승지의 몫으로는 하나도 남겨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60%의 지분 중에 승지에게는 40%만 넘겨주고, 나머지는 출가한 세 누이와 여동생에게 각각 5%씩 떼어주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승지는 이후 경영의 방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장인의 형제들 및 누이들이 합작 반란을 일으켜 그는 그룹에서 축출되었다.

그 이후는 더욱 비참했다. 효주와 이혼한 것은 물론, 남은 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용렬한 자신이었다. 아버지의 상속분만 해도 그랬다. 이 당시의 민법상으로는 장자에게 1/2의 지분만 있었다. 그렇다면 더 많이 남겨준 셈인데도 불구하고 원망만 했으니…….



어찌됐든 다시 그 출발점에 선 승지였다. 비록 후회로 점철된 전생이기는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승지는 더 많이 얻어내고 싶은 욕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승지의 욕심은 전혀 모른 채,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덧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헌데 각하께서 왜 자넬 부르신 겐가?”

“대한조선공사를 우리보고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실 덩어리를?”

깜짝 놀라 반문하는 병윤을 향해 하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부산은 말고, 지금 한창 확장 중인 옥포조선소만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도중에, 재계서열 1위이면서도 우리 그룹이 중화학공업에 투자한 게 무엇이 있느냐는 힐난도 계셨습니다.”

“흐흠…….”

“헌데, 3일의 말미를 달라고 하고 나오는 도중에 들은 김장렴 비서실장의 귀띔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무어라 했기에?”

“우리 그룹이 거절하면 이 건을 대영그룹에 타진할 것이고, 만약 그쪽에서 승낙하는 날이면, 우리 그룹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거라고…….”

“허허, 이런 변이 있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놀라는 부친을 바라보던 승지가 불쑥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인수하죠.”

“뭐라고? 네 녀석이 뭘 안다고 나서? 부실덩어리란 말이다, 부실덩어리!”

아버지의 고함에도 승지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도 인수해야죠. 박통의 노여움을 사서 우리 그룹이 풍비박산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끙…….”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병윤이 아들에게 물었다.

“대통령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인수하는 것 외에, 기업적 가치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아들의 경영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물은 것이었지만, 병윤은 곧 후회했다. 아들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지는 바로 답을 했다.

“박통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첫째고, 으음…….”

승지가 계속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박통’이라고 부르자, 하준이 큰소리로 승지를 나무랐다.

“큰일 날 소리! 박통이 뭐야, 박통이!”

“세간에서는 다 그렇게 부르잖아요?”

“쯧쯧, 철딱서니 없기는.”



혀를 차는 아버지의 말에 잠시 주춤했던 승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 물었다.

“우리 그룹의 중화학분야라고 해봐야 정유 사업 정도일까? 대부분은 다 소비재잖아요?”

“그래서? 그게 어떻다고? 소비재라는 것은 현금 유통이 끊이지를 않아서 안전한 사업이란 말이야. 부도날 염려가 없는.”

“그 대신 곧 발전의 한계에 직면하겠죠. 올해나 늦어도 내년이면 재계서열 1위 자리도 미래그룹에 빼앗길 것이고.”

승지의 말을 두 사람 모두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미래그룹이 75년에 중동에서 역사에 남을 대형 항만공사를 수주하고, 최초로 국산 소형자동차를 출시한 이래, 그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재계서열 2위지만 늦어도 내년이면 미래그룹이 GL그룹을 추월하리라는 것은,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재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추월당하기가 싫어서 적자투성이를 인수하자는 말이냐?”

아버지의 물음에 승지가 답했다.

“우리 그룹이 발전하려면 일본식 모델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들이 미국에서 섬유, 전자, 조선, 자동차를 빼앗아 왔듯, 우리 또한 일본으로부터 노동집약적인 이 분야를 빼앗아오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게 양질의 노동력 외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승지의 대답에 두 사람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발언은 계속되고 있었다.

“거기에 반도체라는 최첨단분야를 일군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죠. 조금 더 사족을 붙인다면, 우리가 취약한 건설과 무역 분야도 더욱 키울 필요가 있고요. 그러지 않고 우리가 지금처럼 신발과 섬유, 비누나 치약, 과자부스러기 따위의 소비재나 계속 만들어 팔고 있으면, 조만간 10위권 밖으로 밀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열거한 위의 분야에 진출하지 못하고 현 업종을 고집한다면 말이죠.”

“지금 네가 말한 내용들, 누구한테서 들은 소리냐?”

“아버님은 정말 절 믿지 못하시는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학교에 다니는 접니다.”

“뿐인가?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상대 경영학과 아닌가? 나는 자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만큼 많이 배웠을 것이고, 우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라 생각하네.”

“역시 절 믿어주는 분은 부회장님밖에 없으십니다.”

“사석에서는 부회장이 아니라 자네 장인일세.”



하준의 말에 뜨악한 표정을 지은 승지가 선언하듯 말했다.

“아버님이나 부회장님이나, 저희 두 사람을 결합시키려면 제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줘야만 합니다.”

“배부른 소리! 네 녀석이 무슨 조건을 운운해?”

아버지의 말에도 승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요구조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아버님이 소유하고 계신 지분 중에 최소 80% 이상은 제게 넘겨주셔야 하고, 부회장님 또한 절반 이상을 효주 상속분으로 넘겨주셔야만 장가를 들겠습니다. 아니면 골치 아픈 경영보다는 차라리 건물주나 되어 편안하게 살렵니다.”

“네 녀석이 돈이 어디 있어서 건물주가 돼?”

“제가 어릴 때부터 받은 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놓은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물론 지금은 현금이 아니라 대부분 땅에 묻혀있지만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되는데?”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묻는 아버지의 말에 승지는 빙긋 웃는 것으로 답변을 거절했다.

그런 승지의 시선은 대답을 강요하듯 하준에게 머물러 있었다.

하준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시간을 좀 주시게.”

“3일 드리겠습니다. 3일 내에 결정 안 하시면 저는 건물주나 되어 편한 세상 살렵니다. 효주와의 혼인 건이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 GL그룹도 승계문제를 두고 갈등이 증폭되어 종래에는 갈라서겠지요.”



부회장 하준은 물론 아버지마저 협박한 승지는 나 몰라라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자리. 병윤이 은근히 떠보듯이 물었다.

“자네의 사후니, 그 정도는 해주겠지?”

그의 말에 하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효주는 출가외인이라 생각하고, 동생들에게 5%씩 떼어줄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자네 지분 20% 모두를 동생들에게 떼어줄 생각이었다고?”

“그렇습니다, 형님.”

“허허, 고얀……. 자넬 그렇게 생각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도 매정한가? 아들 녀석이 한고집하는 것은 자네도 잘 알 터이니, 이후의 일은 나도 모르겠네. 죽고 난 다음이야 그룹이 망하던지 흥하던지,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끝내는 병윤이 삐쳐 돌아앉았지만, 하준은 여전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 * *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하준의 눈에 비친 집안은 오늘따라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비록 저녁은 회장집 가정부가 차려준 것으로 때웠지만, 돌아와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집안이 오늘따라 썰렁함을 넘어 살풍경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노모라도 계셔서 그런 면이 좀 덜했지만, 노모마저 둘째동생에게 가계시니 그런 느낌이 더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고독감에 술이라도 한 잔 할 생각으로 주방으로 향하는데, 현관문이 덜컥 열리며 명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하준이 주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오늘도 엄마한테 다녀오는 거냐?”

“네.”

“어떻든?”

“매일 똑같죠. 창백한 안색으로 쏟아내는 그 놈의 잔소리. 조신해라, 말괄량이 같이 굴지마라, 공부 열심히 해라, 오빠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등등등.”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딸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하준이 응접실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만하고 거기 앉아봐라.”

“왜요? 용돈이라도 주시게요?”

“그 말은 너나 네 오라비나 똑같구나. 웬 놈의 돈을 그리도 밝히는지.”

“그런 면은 오빠가 저보다 한 수 위죠. 아주 꼬마일 때, 모처럼 얻은 10원을 꼭 쥐고 자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보니 손에 시퍼렇게 녹물이 들었었다면서요?”

“그랬지.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드디어 네 혼사문제에 대해 오늘 저쪽에서 말이 있었다.”

“아빠, 그럼 나 시집가는 거야?”

반색하는 딸을 보니 하준은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네 나이가 몇인지나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럼요. 민법에 기재되어 있길, 16세면 부모의 동의하에 결혼할 수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시집을 가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서운해서 버럭 지른 고함에도 불구하고, 효주는 황홀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오늘밤 당장이라도 오빠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이고, 저걸 딸이라고…….”

하준은 어이가 없다 못해 한숨이 나오는 것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효주는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날짜 잡았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물을 건 물어야 했다.

“학교는 어떻게 할 건데?”

“그놈의 지겨운 공부도 안 하고 얼마나 좋아요. 아이나 낳아 기르면서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있으면.”

“너 정말 그렇게 나올 거야!”

“아빠! 오늘 몇 번째 고함을 지르는지 아세요?”

“네 하는 꼬락서니를 봐라. 그렇게 안 하게 생겼나!”

“아빠, 진정하시고요. 날짜나 하루라도 빨리 잡아주세요. 네?”



근래에는 본 일이 없던 최고의 애교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하준은 차마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승지가 그렇게 좋으냐?”

“네, 없으면 못 살죠. 자살하고 말 걸요.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아빠 영향도 커요.”

“뭐? 그게 내 탓이라고?”

“그래요. 어릴 때부터 혼약한 사이라고 누누이 말을 하니, 오빠가 내 신랑인가보다 하고 온갖 정이란 정은 다 줬거든요.”

“아이고, 말이나 못하면…….”



포기한 듯 하준이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저녁은 먹었냐?”

“네. 튀김이랑 만두랑 해서 맛나게 먹었네요.”

“밀가루 음식은 몸에 별로 좋지 않아.”

“그럼 왜 학교에서는 혼식분식을 장려하는데요?”

“그야, 우리나라가 못사니까, 쌀 한 톨이라도 아끼자는 뜻이지.”

“그 정도는 저도 아니까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저는 이만 들어가서 잘게요.”

“공부는 안하고?”

“학원에서 실컷 했잖아요.”

“아이고,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 공부는 더해서 뭐해요? 곧 시집가면 공부도 끝일 텐데.”

“내가 기필코 고등학교는 졸업시키도록 할 테니, 그런 줄 알아. 뿐이냐? 여자도 최소한 대학은 나와야 하니, 애 가질 생각은 말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해.”

“네.”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딸이 하준은 의문스러웠다. 더하여 시집만 보내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해서, 하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