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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약자, 그리고 강자 (4)



“표정 풀어, 진상아. 무섭게 말이야…….”

“닥치십쇼. 왕 병장님.”

왕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이 새끼…….”

쾅! 쾅!

등 뒤에서 냉장고가 열렸다.

어차피 계획의 변경은 불가피하다. 다음은 운에 맡긴다.

난 소총을 움켜쥐고 왕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냉기가 느껴진다. 둔탁한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 달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비로 변한 부상자라면… 철우가 이성을 잃고 나를 노리며 따라오는 것이라면, 어차피 나는 여기서 끝이다.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그저 왕혁만을 노린다.

“좋아, 좋아! 와 봐!”

왕혁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면서 맨손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가까이.

소총을 힘껏 내지르면… 닿을 거리다.

아직, 조금만 더.

먼저 공격을 할 경우… 실패한다면 그대로 당한다. 조금 더 확실한 타이밍을 노린다.

왕혁 또한 아직 주먹을 뻗지 않았다.

더 가까이.

이제 완전히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쾅!!

때마침 조리실과 식당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좀비들이 진입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왕혁의 시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숙이십쇼!!”

등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도박은 성공했다.

내 등 뒤에 있는 녀석. 그 녀석은…….

순간, 왕혁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서 내 머리 위로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쾅!!

얼굴을 직격당한 왕혁의 몸체가 그대로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사람의 얼굴뼈 정도는 완전히 박살 날 정도의 완력이 분명했다.

돌진을 멈춘 나는 고개를 들고 내 뒤에 선 녀석에게 물었다.

“괜찮냐?”

그러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상병 곽철우. 문제없습니다.”

등을 돌려 돌아온 철우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붉은 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철우 역시 왕혁처럼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철우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철우의 등 뒤, 냉장고 쪽을 보니, 김진 상병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고개를 숙인 녀석의 입가에서는 피 섞인 침이 뚝뚝 떨어졌다.

“다른 녀석들은…….”

“…….”

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진이 천천히 쓰러져 있는 이율태의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간다. 녀석의 시뻘건 눈동자가 그제야 보였다. 김진은 공허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더니, 채 식지 않은 이율태의 목덜미를 그대로 물어뜯었다.

6중대의 두 일병은 아직 냉장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성을 유지하고 나타난 건… 철우뿐이었다.

크르르…….

크으으으아아아악!!

한편, 다른 쪽에서는 깨진 유리창을 통해 좀비 몇이 조리실 쪽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바, 박 병장님!”

그때, 겁에 질린 김성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뜻 바라보니 김성욱은 뒷문 쪽에서 엉덩이를 땅에 대고 주저앉은 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김성욱의 시선이 끝에는 철우에게 한 방 얻어맞고 저만치 날아간 왕혁이 있었다.

왕혁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시발…….”

왕혁.

이 녀석의 본질을 나는 안다.

비열한 미치광이.

“감히… 감히!! 너 따위가! 감히 나를!”

그리고 ‘겁쟁이’.

뭐, 녀석이 아직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빚 청산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왕혁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쓰러진 이율태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를 철우가 보디가드처럼 따라왔다.

크아아아악!!

조리실로 넘어온 좀비들이 내 쪽으로 달려들자, 철우가 믿지 못할 괴력으로 한 놈, 한 놈 날려 버렸다. 철우의 일격만으로도 좀비들은 뇌수를 흩뿌리며 땅에 엎어졌다.

원체 강한 근력을 지닌 철우지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버린 지금은 아예 풍선이라도 터뜨리듯 좀비들의 머리를 박살 내고 있었다.

한편, 왕혁은 자신으로부터 등 돌린 나를 바라보면서 미친 듯 소리를 질러 댔다.

“박진상, 이 새끼야! 어디 가! 이리로 와!”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율태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김진 쪽으로 다가가 보니, 녀석은 게걸스럽게 살점을 뜯어 먹고 있다. 그의 입은 한때 친했던 동료, 이율태의 피로 온통 물들어 있다.

크으으…….

놈의 눈동자에 더 이상 예전 같은 장난기와 인간미는 없다.

훈련병에게 정겹게 굴 때 녀석에게 욕을 퍼붓곤 했다. 그래도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 비록 놈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과감하게 김진의 머리통을 향해 소총을 휘둘렀다.

퍼퍽!

김진의 머리통이 부서지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래, 그게 나을 거다. 김진. 그를 좋아하던 후임의 목을 물어뜯으며 짐승으로 살기보다는 선한 인간의 모습만 남긴 채 죽는 게 낫다.

적어도 내가 아는 김진이라면 그걸 바라겠지.

그런 뒤, 난 땅에 뒹구는 이율태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나를 대신해 날아온 소총에 가슴팍을 맞고 그대로 절명해 버린 이율태 일병.

눈을 치켜뜬 채 사망해 버린 율태의 시신을 슬쩍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박진상!!”

왕혁의 고함 소리에 아랑곳 않고 이번에는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우는 계속해서 내 주변을 경호하며 달려드는 좀비 몇을 연달아 쓰러뜨렸다.

그 와중에 아직도 다리가 풀렸는지, 좀체 일어나지 못하는 김성욱의 옆을 지나쳤다.

“히익! 바, 박 병장님… 저도…….”

김성욱은 자신을 지나치는 나와 이쪽으로 달려드는 좀비들을 보더니 그제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성욱을 지나쳐 뒷문에 도착한 나는 내 소총을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문을 여는 대신 왕혁이 던진 식칼을 뽑아 들었다.

두 눈을 잃고 귀를 뜯어 먹힌 뒤, 목이 잘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김찬 병장. 그의 목을 벤 식칼이다.

한 손에는 이율태의 소총, 다른 한 손에는 식칼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왕혁을 쳐다보았다.

“박 병장님, 도, 도망쳐야 합니다!”

김성욱이 벌벌 떨며 내 팔을 슬며시 붙잡았다.

조리실 쪽으로 넘어오는 좀비들의 수가 슬슬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김성욱의 손을 뿌리치고, 나를 노려보는 왕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철우는 이번에도 묵묵히 내 옆을 지켰다.

“그, 그래! 그래야지!”

왕혁이 눈을 빛내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확실히 말해 둔다. 내가 왕혁을 끝장내기로 한 이유는 이율태와 김찬, 둘의 복수 때문이 아니다.

왕혁은 내 길을 막아섰고, 쓸 만한 놈들을 제멋대로 죽여 버렸다. 그것도 가장 불쾌한 방식으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왕혁을 죽일 이유.

왕혁이 몸을 낮추더니,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몸집이 작은 왕혁이 분대장 교육대에서부터 왕처럼 행세하며 후임들을 힘으로 억누를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녀석은 뛰어난 복서였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발군의 실력으로 각종 타이틀을 휩쓸었다고 들었다. 선수에서 제명당하기 전까지는.

왕혁의 팔뚝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왕혁에게 복서의 생명과도 같은 스피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멀찌감치 날아갈 때 다리가 부러진 듯 무게중심도 기울어 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녀석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둘째, 왕혁의 뛰어난 심리전 능력이다.

녀석은 상대를 제멋대로 조종하고 손발을 묶는 데 탁월했다. 연대 내에서 공공연하게 공유되던 왕혁 고발 문서를 본 기억이 있다.



― 가족들을 찾아가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 쓰리 스타 장군급과 잘 알고 있다고, 찔러 봐야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 저를 죽이고 감방에 가도 본인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보자고 했습니다.



처음 증언들을 보았을 때에는 황당했다.

다 큰 성인들이 이런 협박에 쉽게 굴복했다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거짓 협박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놈이 폐쇄적인 부대의 조건을 얼마나 교활하게 활용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였다. 놈은 사람을 조종하고 심리적으로 몰아넣는 데 탁월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왕혁은 지금 폭주하고 있다.

반쯤 뭉개진 얼굴에 분노로 타오르는 왕혁의 붉은 눈은 오로지 나만을 응시하고 있다.

왕혁은 내 옆에 선 철우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까처럼 타이밍을 계산할 정신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녀석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왕혁이 나를 향해 주먹을 내뻗은 바로 다음 순간, 내 옆을 엄호하던 철우가 달려들었다.

“이런 씨!!”

철우는 왕혁의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런 뒤, 가슴팍을 무릎으로 찍어 눌러 제압했다.

나는 철우의 옆에 서서 왕혁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왕혁이 피를 토하면서 나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이 개자식… 놔, 놔!!”

퍼퍽!!

나는 제압당해서 버둥거리는 왕혁의 가슴팍을 소총 소염기로 내리찍었다.

이건 이율태의 몫이다.

“크, 크아아아!!”

놈이 피를 토하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나도 이미 안다. 감염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녀석의 이 반응은 나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일 뿐이다.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지기 싫어하는 난폭함과 추악함의 결과일 뿐이다.

율태의 소총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이어서 식칼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으, 으아아!”

왕혁의 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분노, 억울함, 오기…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그에 아랑곳 않고 식칼을 내리그었다.

“우아아아악!!”

재미없군.

그래, 이건 아니다.

식칼이 왕혁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아… 아…….”

“…살려 줄까?”

놈에게 물었다.

왕혁은 순간 침묵했다.

왕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연신 피를 토해 내는 와중에 녀석은 거짓말처럼 조용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생각 정도야 쉽게 읽을 수 있다.



― 진짜일까? 정말 살 수 있나?



광기로 번뜩이던 놈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데굴데굴 굴렀다.

“너, 너…….”

다시 묻는다.

“살려 줄까?”

왕혁의 표정에서 분노와 오기가 사라졌다.

그래, 그게 너의 본질이지.

녀석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

비로소 녀석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떠오른다. 이제야 상황을 직시한 녀석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살려 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왕혁에게 희망을 줌과 동시에 공포마저 각인시켰다.

죽음. 그 뒤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였다.

놈은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

꼴사납군.

나는 지금껏 강한 척하며 약자를 짓밟는 놈들을 혐오해 왔다. 하지만 그게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기사도 때문은 아니었다. 약자를 짓밟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나약함이 역겨울 뿐이었다.

진실로 강한 자는 굳이 약자를 짓밟아서 자신의 힘을 입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왕혁은… 비열한 약자일 뿐이다. ‘겁쟁이’ 말이다.

나는 겁에 질린 왕혁의 표정을 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싫은데.”

“제, 제발……!”

왕혁이 김찬에게 그런 것처럼 놈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왕혁의 피가 공중으로 높이 치솟는다. 김찬의 몫이다.

겁에 질린 눈동자 그대로 그렇게 왕혁은 최후를 맞았다. 오기나 분노 따위 남아 있지 않은 채 순수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났다.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러웠다.

몸을 일으키면서 식칼을 내려놓았다.

철우 역시 제압하던 왕혁의 몸에서 무릎을 떼었다.

크아아아악!!

그 순간, 뒤쪽 냉장고에서 차지석과 김희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모두 사이좋게 좀비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둘은 울부짖으면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편, 좌측에서는 조리실과 식당 사이를 가로막은 문이 박살 나면서 좀비들이 밀려 들어왔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가자.”

나는 철우를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뒤, 뒷문으로 이동했다.

“자, 잠깐 기다리십쇼! 저를 놓고 가시면 안 됩니다!”

김성욱이 허겁지겁 뛰쳐나와 철우의 옆에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