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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약자, 그리고 강자 (3)
전방에서는 취사병이 냉장고 입구를 막은 채 김찬을 붙잡고 있다.
좌측에서 좀비들이 조리실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문을 부수려 하고 있다.
그나마 뒤쪽, 우리가 조리실로 들어온 뒷문은 아직 무사하다.
김성욱은 내 바로 옆에서 오줌을 지린 채 벌벌 떨고 있고, 이율태는 취사병 바로 옆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역시 겁에 질려 있다.
냉장고를 열어 주어야 하나? 부상자들을 꺼내야 하나?
…아니.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호오, 도망이라도 치려고?”
취사병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나의 움직임을 눈치채고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율태와 김성욱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이율태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급히 외쳤다.
“박 병장님, 냉장고 안에 있는 부상자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율태의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
철우를 포함한 네 명의 부상자는 이성을 잃어버린 좀비가 되거나… 이성을 유지한 좀비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함께할 수는 없다.
“나는 간다. 만일 냉장고 안의 녀석들을 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 말을 들은 이율태의 표정은 흙빛이 되었고, 김성욱은 황급히 내 쪽으로 다가와 섰다.
김성욱으로부터 지린내가 훅 풍겨 온다. 하지만 녀석은 겁쟁이일망정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
부상자들은 버린다.
“킥, 킥킥… 빠른 상황 판단이네? 그런데 생각대로 될까? 박진상 병장, 너… 나 몰라?”
취사병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불쾌하게 웃었다.
녀석이… 나를 안다?
어떻게?
취사병은 이제 겁에 질린 척, 상황 파악 못하는 멍청이인 척도 하지 않았다.
놈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좀비에 불과했다. 더 나쁜 점은 다른 좀비들과 달리 말도 하고 지능도 있다는 점이랄까.
취사병이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더니, 식칼로 김찬의 살점을 잘라 내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끄아아악!”
김찬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다시 취사장을 울렸다.
“기, 김 병장님…….”
이율태가 소총을 고쳐 잡고 조심스레 다가가자, 취사병이 김찬의 목에 식칼을 가져다대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안 되지, 안 돼. 경솔하게 굴면 쓰나.”
“이 자식!!”
취사병은 김찬을 방패 삼아 이율태의 움직임을 막은 뒤, 냉장고 문 앞에 버티고 섰다. 의기양양하게 웃는 녀석의 윗입술 위에 커다란 점이 언뜻 보였다.
그래… 저 표정, 익숙하다.
겁에 질린 척, 바보인 척 연기했을 때 느껴진 위화감은 단지 녀석의 눈빛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 비웃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저 녀석을 곧바로 못 알아봤을까.
몰라보게 변한 외형이 결정적이었다. 뒤룩뒤룩 살이 쪘고, 턱살은 그사이 세 겹이 되었다.
녀석의 이름은…….
“왕혁.”
나지막하게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오오, 드디어 나를 기억해 낸 거야? 이거, 황송하구만. 그런데…….”
작은 키에 입술 위의 커다란 점, 승냥이 같은 눈.
살이 찌기도 했지만, 취사병 앞치마를 두르고 능청을 떠는 바람에 놈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놈이 붉은 눈동자를 험악하게 빛내면서 차갑게 웃었다.
“뒤에 병장님을 붙여야지, 이 개새끼야!”
왕혁은 본래 29연대 3교육대의 분대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일주일 선임이었다.
일주일 차이에 불과하긴 해도 나는 7월, 왕혁은 6월 군번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분대장 교육대에서 같은 기수로 묶여 교육을 받았다.
분대장 교육대는 예비 분대장들이 모여 교범을 학습하고 훈련을 받는 곳…이라는 목적 뒤에서 연대장 간의 경쟁이 암암리에 벌어지는 장이었다. 훈련소장이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연대별 순위가 명명백백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력 전체 1등.
제식, 경계, 사격, 화생방, 수류탄, 각개전투 등 전 과목 만점.
사격의 경우는 가볍게 만발.
땅딸막한 체구의 왕혁은 그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1등 왕혁, 2등 박진상, 3등 이장군.
당시 29연대는 분대장 교육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분대장 교육대 1, 2, 3등을 모두 배출했다. 연대장은 훈련소장에게 육성 시스템에 대해 공개적인 칭찬까지 들었고, 희희낙락하며 그날로 우리 모두에게 연대장 포상 휴가를 뿌렸다.
하지만 왕혁의 괴물 같은 성적 뒤에는 교활함과 비열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훗날 듣기로는 녀석이 제 교육대의 후임 몇을 굴복시켜 체력 시험과 사격 등에서 비리를 저질렀다고 했다.
왕혁의 표적지에는 만발인 스무 개가 넘는 총알구멍들이 남아 있었고, 팔굽혀펴기나 윗몸 일으키기, 달리기에서 비정상적으로 압도적인 수치가 기록되었다.
연대장의 복덩이로 금의환향한 왕혁은 분대장 활동을 시작하면서 곧 본색을 드러냈다.
훈련병들을 폭행하고, 선임들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이제 막 들어온 이등병을 완전히 밟아 놓았다. 녀석의 엽기적인 가혹행위들은 훈련소장에게까지 보고되었고, 그 사례가 전 연대에 배포되었다.
소문으로는 훈련소장이 29연대장의 면전에 대고 수십 분간 쌍욕을 쏟아 냈다고 했다. 소장의 분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3교육대의 모든 훈련 일정이 중지되었고, 훈련소 차원에서 대대적인 감사에 들어갔다.
폭행이 이루어진 날의 불침번과 당직병, 사건을 묻으려 한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줄줄이 징계를 받았다. 왕혁이 속한 중대의 상병장들 중 절반 이상이 영창에 들어가 해임되어 버리는 바람에 다른 중대에서 분대장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만창을 다녀온 주범 왕혁은 그대로 보직 해임이 되었다. 이후 왕혁에 대해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다. 온갖 폭행 사건과 가혹행위들의 가해자로 언급되었고, 부대 곳곳을 전전하며 징계를 밥 먹듯이 당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녀석이 코앞 취사장에 숨어 있었군. 몸도 심하게 망가져 추한 돼지가 되어 버린 채.
“이미 지난주에 전역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전역이 한 달은 미뤄진데다 쥐새끼처럼 숨어 살면서 새벽에 밥이나 데우는 신세가 되었어. 킥킥킥…….”
연대장은 연대의 수치인 왕혁을 취사장에 숨겨 두고 매일같이 간밤에만 남몰래 활동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야…….”
녀석이 김찬의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개 같은 간부 놈들 목 정도는 쉽게 딸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왕혁은 계속 신음 소리를 내는 김찬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김찬은 한 차례 움찔거릴 뿐,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목과 눈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다.
“너희… 내 첫 상대가 되어 줘야겠다. 대신…….”
왕혁이 허리를 쭉 펴더니 식칼을 가볍게 빙글 돌리면서 김찬을 툭툭 걷어찼다.
“이렇게 질질 끌지 않고 금방 끝내 줄게.”
“아, 안 돼!”
왕혁은 이율태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끝냄과 동시에 김찬의 목을 식칼로 베어 버렸다.
그러고는 잘린 김찬의 머리를 이율태에게 던졌다. 이율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총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헤이!”
왕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이율태에게 달려들어 날렵하게 식칼을 휘둘렀다.
“우읏!!”
이율태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식칼이 그의 턱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얕게 베이고 말았다.
왕혁은 느긋한 태도로 이율태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분대장이 되어 가지고 소총을 떨어뜨리면 쓰나. 자격 미달이구만, 너.”
눈살을 찌푸려 보인 왕혁이 비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다시 한번 이율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쾅!
그러는 동안 냉장고 문이 크게 흔들렸다. 외부의 이상을 알아차린 네 사람이 소총으로 마구 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손잡이는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악!!
한편, 식당 쪽 좀비들이 이제 조리실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떼로 몰려 문과 창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김성욱은 이 모든 상황에 완전히 질려 버린 듯 그대로 등을 돌리더니, 뒷문을 향해 내달렸다.
완전히 얼이 나간 것 같았다.
“김성욱, 멈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뒷문으로 피하는 게 상책이라 해도… 왕혁, 저놈에게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욱이 도망가는 모습을 본 왕혁이 이율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는 다짜고짜 김성욱을 향해 식칼을 내던졌다.
식칼이 부메랑처럼 빠르게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퍽!
식칼은 취사장 뒷문 한가운데에 정확히 박혔다.
“우, 우아아아악!!”
김성욱은 자신을 지나쳐 뒷문에 깊이 박힌 식칼을 보고는 식겁해서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식칼이 뺨을 스쳤는지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왕혁, 저놈은 완전히 미친놈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총을 꼬나 잡았다.
어차피 뒤로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왕혁, 저 들개 같은 놈이 상대라면.
놈이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왕혁은 나를 보고 씩 웃으면서 이율태의 소총을 고쳐 잡았다. 놈이 오른손으로 개머리판 아래쪽을 잡고 한 손은 소총 덮개를 잡는다. 그러고는 대각선으로 한차례 크게 흔들었다.
철컥.
그 움직임에 따라 장전손잡이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직접 손대지 않는다면 웬만한 근력으로는 장전손잡이를 후퇴, 전진시킬 수 없다. 왕혁의 근력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
왕혁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넋이 나간 이율태와 김성욱을 버려 둔 채 나를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박진상!!”
녀석이 내게 달려드는 그 순간, 나 역시 마주 뛰어들었다.
가슴팍.
왕혁의 손에 쥐어진 소총이 화살처럼 찔러 온다.
허리를 우측으로 틀면서 몸을 뒤로 뺐다. 허공을 찌른 소총이 재빠르게 회수된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훤히 드러난 녀석의 옆구리가 보였다.
그런데…….
히죽.
녀석이 웃는다.
속임수다.
나는 녀석을 공격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려 그대로 통과해 지나쳤다.
“무슨!”
왕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처음부터 왕혁과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힘으로는 녀석을 이겨 낼 수 없다.
도망도 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도박뿐이다.
“너, 이 자식!”
왕혁을 통과해 그대로 냉장고 앞에 도착한 나는 소총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 박 병장님!”
퍼퍽!
빠각!
이율태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 나의 소총 개머리판에 의해 냉장고 손잡이가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커, 커어억…….”
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이율태는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뒤를 돌아본 나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왕혁이 나를 향해 투창처럼 소총을 내던졌고, 이율태가 내 등 뒤를 가로막은 것이다.
소총은 그대로 이율태의 가슴팍을 강타했고, 그로 인해 가슴뼈가 완전히 박살 난 것 같았다.
“쿨럭쿨럭!”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이율태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바, 박… 쿨럭쿨럭, 병장…님…….”
이율태가 뭐라 말하려 애를 쓰지만, 헐떡거리는 호흡 탓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내 바지를 붙잡고 있을 뿐.
그러더니 곧이어 숨이 끊어졌다.
왜 나를 살린 걸까?
왜 나를 대신해 놈의 공격을 받았지?
이해할 수 없다.
목이 날아간 김찬의 시신 쪽을 힐끗 보았다.
강한 힘과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김찬.
김찬이 왕혁에게 붙잡혔을 때,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서 입모양으로 중얼거린 것을 기억한다.
― 도. 망. 쳐.
‘구해 줘’가 아니라 ‘도망쳐’라니.
이해할 수 없다.
머리가 조금 차갑게 식었다.
“쯧, 하여간 바보라니까. 왜 막아서, 막아서길? 안 그러냐, 진상아?”
왕혁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왕혁이 히죽 웃더니, 나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왕혁.
너는 오늘 내가 죽인다.
전방에서는 취사병이 냉장고 입구를 막은 채 김찬을 붙잡고 있다.
좌측에서 좀비들이 조리실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문을 부수려 하고 있다.
그나마 뒤쪽, 우리가 조리실로 들어온 뒷문은 아직 무사하다.
김성욱은 내 바로 옆에서 오줌을 지린 채 벌벌 떨고 있고, 이율태는 취사병 바로 옆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역시 겁에 질려 있다.
냉장고를 열어 주어야 하나? 부상자들을 꺼내야 하나?
…아니.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호오, 도망이라도 치려고?”
취사병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나의 움직임을 눈치채고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율태와 김성욱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이율태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급히 외쳤다.
“박 병장님, 냉장고 안에 있는 부상자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율태의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
철우를 포함한 네 명의 부상자는 이성을 잃어버린 좀비가 되거나… 이성을 유지한 좀비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함께할 수는 없다.
“나는 간다. 만일 냉장고 안의 녀석들을 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 말을 들은 이율태의 표정은 흙빛이 되었고, 김성욱은 황급히 내 쪽으로 다가와 섰다.
김성욱으로부터 지린내가 훅 풍겨 온다. 하지만 녀석은 겁쟁이일망정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
부상자들은 버린다.
“킥, 킥킥… 빠른 상황 판단이네? 그런데 생각대로 될까? 박진상 병장, 너… 나 몰라?”
취사병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불쾌하게 웃었다.
녀석이… 나를 안다?
어떻게?
취사병은 이제 겁에 질린 척, 상황 파악 못하는 멍청이인 척도 하지 않았다.
놈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좀비에 불과했다. 더 나쁜 점은 다른 좀비들과 달리 말도 하고 지능도 있다는 점이랄까.
취사병이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더니, 식칼로 김찬의 살점을 잘라 내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끄아아악!”
김찬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다시 취사장을 울렸다.
“기, 김 병장님…….”
이율태가 소총을 고쳐 잡고 조심스레 다가가자, 취사병이 김찬의 목에 식칼을 가져다대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안 되지, 안 돼. 경솔하게 굴면 쓰나.”
“이 자식!!”
취사병은 김찬을 방패 삼아 이율태의 움직임을 막은 뒤, 냉장고 문 앞에 버티고 섰다. 의기양양하게 웃는 녀석의 윗입술 위에 커다란 점이 언뜻 보였다.
그래… 저 표정, 익숙하다.
겁에 질린 척, 바보인 척 연기했을 때 느껴진 위화감은 단지 녀석의 눈빛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 비웃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저 녀석을 곧바로 못 알아봤을까.
몰라보게 변한 외형이 결정적이었다. 뒤룩뒤룩 살이 쪘고, 턱살은 그사이 세 겹이 되었다.
녀석의 이름은…….
“왕혁.”
나지막하게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오오, 드디어 나를 기억해 낸 거야? 이거, 황송하구만. 그런데…….”
작은 키에 입술 위의 커다란 점, 승냥이 같은 눈.
살이 찌기도 했지만, 취사병 앞치마를 두르고 능청을 떠는 바람에 놈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놈이 붉은 눈동자를 험악하게 빛내면서 차갑게 웃었다.
“뒤에 병장님을 붙여야지, 이 개새끼야!”
왕혁은 본래 29연대 3교육대의 분대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일주일 선임이었다.
일주일 차이에 불과하긴 해도 나는 7월, 왕혁은 6월 군번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분대장 교육대에서 같은 기수로 묶여 교육을 받았다.
분대장 교육대는 예비 분대장들이 모여 교범을 학습하고 훈련을 받는 곳…이라는 목적 뒤에서 연대장 간의 경쟁이 암암리에 벌어지는 장이었다. 훈련소장이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연대별 순위가 명명백백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력 전체 1등.
제식, 경계, 사격, 화생방, 수류탄, 각개전투 등 전 과목 만점.
사격의 경우는 가볍게 만발.
땅딸막한 체구의 왕혁은 그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1등 왕혁, 2등 박진상, 3등 이장군.
당시 29연대는 분대장 교육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분대장 교육대 1, 2, 3등을 모두 배출했다. 연대장은 훈련소장에게 육성 시스템에 대해 공개적인 칭찬까지 들었고, 희희낙락하며 그날로 우리 모두에게 연대장 포상 휴가를 뿌렸다.
하지만 왕혁의 괴물 같은 성적 뒤에는 교활함과 비열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훗날 듣기로는 녀석이 제 교육대의 후임 몇을 굴복시켜 체력 시험과 사격 등에서 비리를 저질렀다고 했다.
왕혁의 표적지에는 만발인 스무 개가 넘는 총알구멍들이 남아 있었고, 팔굽혀펴기나 윗몸 일으키기, 달리기에서 비정상적으로 압도적인 수치가 기록되었다.
연대장의 복덩이로 금의환향한 왕혁은 분대장 활동을 시작하면서 곧 본색을 드러냈다.
훈련병들을 폭행하고, 선임들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이제 막 들어온 이등병을 완전히 밟아 놓았다. 녀석의 엽기적인 가혹행위들은 훈련소장에게까지 보고되었고, 그 사례가 전 연대에 배포되었다.
소문으로는 훈련소장이 29연대장의 면전에 대고 수십 분간 쌍욕을 쏟아 냈다고 했다. 소장의 분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3교육대의 모든 훈련 일정이 중지되었고, 훈련소 차원에서 대대적인 감사에 들어갔다.
폭행이 이루어진 날의 불침번과 당직병, 사건을 묻으려 한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줄줄이 징계를 받았다. 왕혁이 속한 중대의 상병장들 중 절반 이상이 영창에 들어가 해임되어 버리는 바람에 다른 중대에서 분대장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만창을 다녀온 주범 왕혁은 그대로 보직 해임이 되었다. 이후 왕혁에 대해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다. 온갖 폭행 사건과 가혹행위들의 가해자로 언급되었고, 부대 곳곳을 전전하며 징계를 밥 먹듯이 당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녀석이 코앞 취사장에 숨어 있었군. 몸도 심하게 망가져 추한 돼지가 되어 버린 채.
“이미 지난주에 전역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전역이 한 달은 미뤄진데다 쥐새끼처럼 숨어 살면서 새벽에 밥이나 데우는 신세가 되었어. 킥킥킥…….”
연대장은 연대의 수치인 왕혁을 취사장에 숨겨 두고 매일같이 간밤에만 남몰래 활동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야…….”
녀석이 김찬의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개 같은 간부 놈들 목 정도는 쉽게 딸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왕혁은 계속 신음 소리를 내는 김찬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김찬은 한 차례 움찔거릴 뿐,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목과 눈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다.
“너희… 내 첫 상대가 되어 줘야겠다. 대신…….”
왕혁이 허리를 쭉 펴더니 식칼을 가볍게 빙글 돌리면서 김찬을 툭툭 걷어찼다.
“이렇게 질질 끌지 않고 금방 끝내 줄게.”
“아, 안 돼!”
왕혁은 이율태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끝냄과 동시에 김찬의 목을 식칼로 베어 버렸다.
그러고는 잘린 김찬의 머리를 이율태에게 던졌다. 이율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총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헤이!”
왕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이율태에게 달려들어 날렵하게 식칼을 휘둘렀다.
“우읏!!”
이율태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식칼이 그의 턱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얕게 베이고 말았다.
왕혁은 느긋한 태도로 이율태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분대장이 되어 가지고 소총을 떨어뜨리면 쓰나. 자격 미달이구만, 너.”
눈살을 찌푸려 보인 왕혁이 비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다시 한번 이율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쾅!
그러는 동안 냉장고 문이 크게 흔들렸다. 외부의 이상을 알아차린 네 사람이 소총으로 마구 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손잡이는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악!!
한편, 식당 쪽 좀비들이 이제 조리실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떼로 몰려 문과 창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김성욱은 이 모든 상황에 완전히 질려 버린 듯 그대로 등을 돌리더니, 뒷문을 향해 내달렸다.
완전히 얼이 나간 것 같았다.
“김성욱, 멈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뒷문으로 피하는 게 상책이라 해도… 왕혁, 저놈에게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욱이 도망가는 모습을 본 왕혁이 이율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는 다짜고짜 김성욱을 향해 식칼을 내던졌다.
식칼이 부메랑처럼 빠르게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퍽!
식칼은 취사장 뒷문 한가운데에 정확히 박혔다.
“우, 우아아아악!!”
김성욱은 자신을 지나쳐 뒷문에 깊이 박힌 식칼을 보고는 식겁해서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식칼이 뺨을 스쳤는지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왕혁, 저놈은 완전히 미친놈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총을 꼬나 잡았다.
어차피 뒤로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왕혁, 저 들개 같은 놈이 상대라면.
놈이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왕혁은 나를 보고 씩 웃으면서 이율태의 소총을 고쳐 잡았다. 놈이 오른손으로 개머리판 아래쪽을 잡고 한 손은 소총 덮개를 잡는다. 그러고는 대각선으로 한차례 크게 흔들었다.
철컥.
그 움직임에 따라 장전손잡이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직접 손대지 않는다면 웬만한 근력으로는 장전손잡이를 후퇴, 전진시킬 수 없다. 왕혁의 근력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
왕혁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넋이 나간 이율태와 김성욱을 버려 둔 채 나를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박진상!!”
녀석이 내게 달려드는 그 순간, 나 역시 마주 뛰어들었다.
가슴팍.
왕혁의 손에 쥐어진 소총이 화살처럼 찔러 온다.
허리를 우측으로 틀면서 몸을 뒤로 뺐다. 허공을 찌른 소총이 재빠르게 회수된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훤히 드러난 녀석의 옆구리가 보였다.
그런데…….
히죽.
녀석이 웃는다.
속임수다.
나는 녀석을 공격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려 그대로 통과해 지나쳤다.
“무슨!”
왕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처음부터 왕혁과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힘으로는 녀석을 이겨 낼 수 없다.
도망도 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도박뿐이다.
“너, 이 자식!”
왕혁을 통과해 그대로 냉장고 앞에 도착한 나는 소총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 박 병장님!”
퍼퍽!
빠각!
이율태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 나의 소총 개머리판에 의해 냉장고 손잡이가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커, 커어억…….”
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이율태는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뒤를 돌아본 나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왕혁이 나를 향해 투창처럼 소총을 내던졌고, 이율태가 내 등 뒤를 가로막은 것이다.
소총은 그대로 이율태의 가슴팍을 강타했고, 그로 인해 가슴뼈가 완전히 박살 난 것 같았다.
“쿨럭쿨럭!”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이율태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바, 박… 쿨럭쿨럭, 병장…님…….”
이율태가 뭐라 말하려 애를 쓰지만, 헐떡거리는 호흡 탓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내 바지를 붙잡고 있을 뿐.
그러더니 곧이어 숨이 끊어졌다.
왜 나를 살린 걸까?
왜 나를 대신해 놈의 공격을 받았지?
이해할 수 없다.
목이 날아간 김찬의 시신 쪽을 힐끗 보았다.
강한 힘과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김찬.
김찬이 왕혁에게 붙잡혔을 때,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서 입모양으로 중얼거린 것을 기억한다.
― 도. 망. 쳐.
‘구해 줘’가 아니라 ‘도망쳐’라니.
이해할 수 없다.
머리가 조금 차갑게 식었다.
“쯧, 하여간 바보라니까. 왜 막아서, 막아서길? 안 그러냐, 진상아?”
왕혁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왕혁이 히죽 웃더니, 나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왕혁.
너는 오늘 내가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