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변이



“복무신조… 우리의 결의…….”

육군복무신조.

군인이 지켜야 할 ‘신조’를 정리해 둔 이 글귀들은 훈련병들이 훈련소에 입대 후 가장 먼저 외워야 한다. 잠들기 전 점호에서 매일같이 읊어 대는 것이 바로 이 복무신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 이걸 외운다고?

뜬금없이 복무신조를 멍하니 중얼거리는 훈련병의 붉은 눈에는 초점이 없다.

녀석은 마치 야간 점호 시간이라도 되는 듯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복무신조를 읊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한 말투였다.

놈의 기행으로 안 그래도 공포스럽던 분위기가 더욱 으스스해졌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다른 멀쩡한 훈련병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복무신조를 읊는 훈련병을 쳐다보았고, 나와 호철이는 황급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소총을 옆에 내려 둔 녀석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녀석의 좌측 다리는 좀비들에게 물린 듯 피가 흥건했다.

호철이가 녀석의 양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야, 인마! 정신 차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녀석이 아랑곳 않고 웅얼웅얼 복무신조를 외우는 가운데, 자신을 붙잡은 호철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래, 녀석은 분명 호철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행을 멈추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눈, 이런 정신 나간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간밤에 4초소에서 군가를 부르며 길을 누비던 녀석.

그는 우리를 보았음에도 다른 좀비들처럼 다짜고짜 덮쳐 오지는 않았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군가를 부르고 있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귀신같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복무신조를 외우는 훈련병의 꼴을 보니 그 상황이 이해되었다.

녀석도… 좀비들에게 물린 것이다.

호철이는 몽롱하게 복무신조를 읊어 대는 녀석을 보며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살아 돌아온 124, 125, 126번 훈련병은 역시 무언가 깨달고 저희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곧 좀비로 변하는 걸까?

오래 지나지 않아 주변에 누워 있던 훈련병들이 저마다 몸을 일으켜 하나둘 영문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끙끙 앓으며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던 녀석들이건만, 저마다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벌벌 떨며 사정하듯 비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저는 아니에요… 제발…….”

차렷 자세로 자신의 관등성명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놈도 있었다.

“203번 훈련병, 이지우… 203번 훈련병, 이지…….”

그중에 가장 위험한 녀석은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며 소총을 꼬나 잡고 누군가를 향해 휘두르려 하는 8중대 훈련병이었다.

“웃지… 마… 웃지 말…….”

나는 옆에 누워 있는 훈련병의 머리를 박살 내려 드는 놈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황급히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웃지… 말라고…….”

그저 ‘웃지 마’라는 말만 반복하며 소총을 휘두르려 하는 녀석.

녀석의 눈동자 역시 붉게 물든 채 초점이 없었다.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무엇에 화가 난 듯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여전히 온몸이 열로 펄펄 끓고 있건만, 힘만은 넘쳐흐르는 듯했다.

“으윽…….”

“웃지 말라고…….”

누가 웃고 있다는 거야, 이 미친놈이.

슬슬 나의 팔힘이 풀리고 있었다. 웃기는커녕 울고 싶은 심정이다.

교육대 안에서 좀비들과 한참 맞붙느라 진이 빠졌기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팔이 덜덜 떨린다. 결국은 악을 쓰는 녀석의 힘을 미처 이겨 내지 못했고, 순간 녀석의 팔을 놓쳤다.

“…잖아!!”

“이런 젠장!”

퍽!

그는 말을 끝맺으며 그대로 소총 개머리판을 내려쳐 옆에 누워 있던 훈련병의 얼굴을 찍었고, 그 꼴을 본 모든 훈련병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친!!”

한창 다른 훈련병의 기행을 막고 있던 호철이가 황급히 달려와서 옆 동료의 머리를 박살 낸 놈의 얼굴을 냅다 주먹으로 쳐 버렸다.

호철이의 주먹에 직격당한 훈련병은 몸이 붕 뜨더니, 저만치 날아가 엎어져 버렸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시 웅얼거렸다.

“웃지 마… 웃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녀석에 의해 얼굴이 박살 난 훈련병은 숨이 끊어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게 방금까지 끙끙 앓던 놈의 힘이라고?

처참하게 변한 훈련병의 시체를 본 다른 훈련병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한편, 야외 건조장을 쭉 둘러보니, 이제 거의 모든 부상자들이 저마다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에는 분노, 두려움, 공포같이 부정적인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각자 어떤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읊조렸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그 와중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쾅! 쾅!

세탁실 문을 지켜보고 있던 훈련병들이 뒷걸음질 쳤다. 세탁실의 문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부, 분대장님!”

기태나 8중대 일병들이라면 저렇게 철문을 두드려 댈 이유는 없다. 손잡이를 돌렸겠지.

지금 문을 마구 두들겨 대는 놈들은, 세탁실에 있는 놈들은 전부 좀비라는 뜻이었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저마다 알 수 없는 말을 읊어 대는 부상병들은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했다. 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무리다.

…버려야 할까?

녀석들이 벌이는 소란에 다른 멀쩡한 훈련병들은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고, 호철이 역시 완력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몇몇 놈들만 간신히 막아 낼 뿐이었다.

마음을 굳힌 나는 다급히 외쳤다.

“호철아! 이제 가야 돼! 바로 1교육대 쪽으로…….”

쿵, 쿵!

순간, 불길한 땅울림에 말을 멈추었다.

뭐지?

야외 건조장으로 진입하는 교육대 뒤편에서 갑자기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엄청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오오오오!!

머어어어어~!

제기랄.

모습을 드러낸 집체만 한 짐승을 본 순간, 나와 호철이, 그리고 훈련병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맙소사, 하느님.

이게 정말… 정말… 현실입니까?



* * *



수류탄 교장으로 갈 때면 소 키우는 목장을 지나친다. 좁디좁은 헛간 안에는 수십 마리의 소가 쇠사슬에 줄줄이 묶여 매일같이 풀을 씹고 있었다.

언젠가 ‘한우’라는 이름으로 팔려 나갈 녀석들. 놈들의 귀에는 군번줄마냥 표 딱지들이 붙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 소들은 하나같이 귀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으며, 목에는 끊어진 쇠사슬을 덜렁이고 있다. 도저히 멀쩡한 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성긴 근육이 도드라졌다. 놈들의 동그란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다.

소들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춘 채 가만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뚝.

젠장, 지금 분명히 보았다.

저 새끼들, 우리를 보고… 무슨 값비싼 소고기를 눈앞에 둔 것마냥… 군침을 흘렸다.

“야, 호철아…….”

내 목소리를 들은 호철이 역시 소들을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들은 침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물론 반가움의 인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다리를 보니 당장에라도 달려들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확실히 안다. 저것들은 누구 한둘이 뒤를 막는다고 어찌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다.

“달려!!”

나의 신호와 함께 호철이와 멀쩡한 훈련병들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호철이가 가장 앞장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훈련병, 전부 뛰어! 1교육대 쪽으로! 뛰어, 뛰어!!”

방금까지 지쳐 있던 호철이지만, 소 떼를 보자 모든 피로가 달아나기라도 한 듯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으아아아!!”

훈련병들은 줄을 맞추거나 발을 맞추는 것도 없이 저마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바깥쪽 화단으로 몸을 던졌다.

…아, 방금 그 녀석은 감염된 놈이군.

이제 감염되어 몽유병 환자처럼 변해 버린 훈련병들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미친 소 떼가 시뻘건 눈동자를 빛내며 단체로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음머어어어어~!!

세탁실 문을 지키던 훈련병들과 감염된 동료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훈련병들까지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나 역시 내 주변에서 중얼중얼 헛소리나 지껄이는 부상병 훈련병들을 떨쳐 낸 뒤, 대열의 뒤쪽에 붙었다.

그 와중에 몇몇 비만 훈련병들이 뒤처졌고, 심지어 넘어지는 녀석들도 속출했다. 되는 대로 몇몇 녀석들은 부축해 일으켰지만,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으, 우아아악!”

음머어어어어어~!!

이런 빌어먹을.

혹시라도 가능하면 몇 명이라도 더 돕기 위해 뒤를 슬쩍 돌아봤지만… 나는 차마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다.

소 몇 마리가 넘어진 훈련병들을 짓밟은 뒤, 그 살점을 뜯고 있었다.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살이 찢기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초식동물 아니었던가, 쟤들?

피를 입에 잔뜩 묻힌 놈들은 이미 소가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엎어져서 소들에게 붙잡힌 훈련병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러나 결코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 가지, 확실히 보았다.

야외 건조장에는 열병을 앓거나 헛소리를 지껄이며 떠도는 훈련병들이 그렇게나 많건만, 소 떼는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우리의 뒤만 쫓았다.

좀비들은 감염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악!!”

어느새 소 떼를 헤치고 가장 앞으로 튀어나온 누군가가 우리를 쫓았다.

저 얼굴은 안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 복무신조를 읊어 대던 훈련병이었다.

가장 먼저 이상 증세를 보인 부상병. 녀석이 소총은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맨몸으로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소들의 경우, 붙잡은 훈련병들의 뼈를 부수고 살점을 뜯느라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막 좀비로 변한 훈련병은 그저 달리는 우리의 뒤만 쫓았다.

적어도 몇 가지는 확실하다.

‘좀비에게 물린 녀석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고열에 시달린다.’

‘고열에 시달린 뒤, 몽유병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때때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

‘감염된 후에는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

‘몽유병 증상 이후에는 좀비로 변해 이성을 잃고 날뛴다.’



* * *



2교육대 뒷길 끝에 다다라 우회전.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1교육대 건물에 도착한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뒤처진 훈련병들의 살점을 뜯기 위해 흩어진 소 대부분이 더는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복무신조를 읊던 녀석과 옆에 누워 있던 동료의 얼굴을 부숴 버린 ‘웃지 마 훈련병’이 괴성을 내지르며 우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몇 훈련병 좀비들이 따라붙었다.

간밤에 살려 낸 녀석들이 이제는 나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그때, 선두에서 달리던 호철이가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너, 너……!”

“그대로 달리십쇼. 뒤는 제가 막습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소총을 잡고 베레모를 쓴 녀석. 당직 완장.

붉은 눈동자에 온통 피로 뒤덮인 군복.

뛰는 와중에 나와 반대쪽으로 나아가는 녀석을 보았다.

당당하고도 망설임 없는, 느긋한 발걸음.

녀석이 이런 성격이었던가?

“기태야!”

“형, 1교육대에서 봐.”

녀석은 쿨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하더니, 소총을 길게 잡았다. 마치 타석에 선 타자마냥 당당히 버티고 선다. 그러고는 미친 듯 달려오는 선두의 두 훈련병을 향해 냅다 휘둘렀다.

퍼퍽!

크와악!

카악!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좀비가 그대로 뒤통수를 땅에 박고 엎어진다. 마치 연속 동작처럼 녀석들의 얼굴을 발길질로 짓밟은 기태가 연달아 달려오는 좀비들의 머리통을 향해 다시금 소총을 휘둘렀다.

빠각!

홈런.

경쾌한 소리와 함께 훈련병들의 두개골이 부수어졌다.

그래, 잊었다.

한 가지 예외 사항.

‘좀비로 변하지 않는 면역자가 존재한다.’

기태 같은 경우.

그리고…….

‘면역자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