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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전역날 새벽 (4)



“전방 잘 보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

“네, 분대장님.”

훈련병들은 몸을 일으켜 초소 방벽에 기대서서 주변을 살폈고,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연대본부와 지구 병원, 2교육대에 전화를 열심히 돌려 댔다. 이제는 2교육대마저 받지 않는다. 6중대 당직 책상에도 전화를 넣어 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우리를 인솔한 기태의 안전마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몇 차례나 안개 속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훈련병들에게 몸을 숙이도록 하면서 최대한 버텼다.

가끔씩 짬타이거가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후우, 시간이…….”

근무 교대 시간은 이미 옛적에 넘겼다.

3시 20분.

더러 들려오던 총소리는 이제 완전히 멈추었다.

그때, 우측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황급히 눈을 비비고 다시 그쪽을 주시했다.

“부, 분대장님!”

나만 본 것은 아니었다.

125번 훈련병이 깜짝 놀라서 외쳤으니 말이다.

그보다 이 자식이… 큰 소리 내지 말라니까.

옆에 섰던 124번 훈련병도 깜짝 놀랐는지 목소리를 높인 녀석의 팔을 툭툭, 쳤다.

“죄, 죄송합니다. 근데 저거…….”

“그래, 보여.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안개 때문에 흐릿한 와중에도 확실히 보였다.

붉은 불빛이다.

붉은 불빛이라면 랜턴은 아니다. 깜박깜박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봐도 영락없는 경광봉이었다.

이 시간에는 근무 교대병을 통솔하는 당직병들만이 경광봉을 들고 다닌다.

설마 괴물들을 뚫고 무사히 온 걸까?

불빛은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불빛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는 곽철과 7중대 훈련병들의 시신이 있다. 어쩌면 그걸 보고 도망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경광봉의 주인은 아랑곳 않고 초소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노란 바탕에 흰 줄의 인솔자 조끼.

인솔자가 맞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면서 나지막하게 외쳤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인솔자는 순순히 멈추어 서서 손을 들었다.

무사히 초소에 도착한 녀석이 반가워서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7중대 당직 녀석이 여기까지 살아서 온 건가? 오늘 7중대 당직병이 누구였지?

“빛나리!”

“무지개.”

오케이. 암구호도 확실히 숙지하고 있다.

“3보 앞으로. 용무는?”

형식에 맞추어 경계 절차를 진행하자 그가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안개가 짙지만 이제 그가 입은 군복과 방탄모도 보인다.

“이장군 병장님…….”

목소리가 익숙하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황급히 랜턴을 켜고 녀석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인솔자의 발아래부터 서서히 위로 몸을 비쳤다. 슬쩍 보니 녀석의 군복이 피에 젖어 있다. 특히 왼팔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너……!”

나도 모르게 잠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기태야!”

“이 병장님, 무사하십니까?”

“야, 인마. 너 어떻게……!”

그는 다름 아닌 내 부사수, 김기태 상병이었다.

녀석은 소총을 어깨에 멘 채 경광봉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경광봉을 들지 않은 왼팔은 온통 검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괜찮아? 너 상처가…….”

“…조금 물렸습니다. 다행히 저는 무사하지만, 다른 애들은 모두 당했습니다. 일단 빨리 교육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밖은 위험합니다.”

녀석이 나를 인솔하고 돌아간 지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그럼 그동안 이 녀석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걸까?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그 와중에 나를 구하러 온 녀석을 보니 속이 시큰거렸다.

“…괜찮겠냐? 안개에다가 정체 모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의 기태를 본 나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부사수는 지금 나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초소에 죽치며 밤을 보내자고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불어 기태에게 무언가 대책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소에 신호를 보내 훈련병들을 불렀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의 넷이 초소 밖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교육대로 복귀한다.”

“아까 위험하다고…….”

“지금은 주변 상황을 잘 아는 분대장이 왔으니까 이야기가 달라.”

나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떠는 125번 훈련병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앞서 교육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126번 훈련병은 특유의 진중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찬성입니다. 초소에 오래 있어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126번 훈련병 덕분인지 나머지 훈련병들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기태의 팔을 슬쩍 살폈다. 소매를 타고 내려온 핏방울이 바닥에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기태의 상처, 그게 바로 초소 안에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였다. 빨리 교육대로 들어가서 기태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니들,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부터 낙오되거나 함부로 큰 소리 내서 잡히면 그냥 버리고 간다. 알았냐?”

“네.”

가장 먼저 대답한 녀석은 역시나 복귀를 주장한 126번 훈련병이다.

나머지 훈련병들도 겁에 질린 표정이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태야. 계획 있냐? 네가 뭐 실탄을 가진 건 아니잖아.”

“계획이라기에는 뭣하지만… 수풀을 가로질러서 창고 뒤편으로 우회해 가는 게 좋겠습니다.”

당직 사관이 근무병들을 감시하고 시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순찰을 돌면서 가끔 이용하는 길이다. 그런 식으로 당직 사관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딴짓을 하던 경계병들이 탈탈 털린 적도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로변을 그대로 지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무엇보다 곽철을 비롯한 야간 근무자들의 시신도 보고 싶지 않았다.

“후우…. 그래, 가 보자. 일단 경광등부터 꺼. 조심해서 이동해야 하니까.”

기태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서 붉게 빛나는 경광봉을 인식한 듯 곧바로 전원을 껐다. 대체 기태가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내심 궁금해진다.

그나마 주변을 밝혀 주던 붉은 불빛이 사라지자 분위기가 더욱 음산해졌다.

나는 천천히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면서 발걸음을 옮겨 수풀 쪽으로 먼저 들어갔다.

소총을 지향 사격 자세로 하고 기태의 옆에서 걸었다.

다행히 수풀 안쪽에서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는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리듯 기태에게 말을 건넸다.

“와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그래도 인마, 내가 군 생활 짬밥이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 버틸까. 왜 위험하게 여기까지 왔냐? 너라도 빨리 2교육대로 몸을 피하지.”

“어쩌다 보니…….”

기태는 본인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긴, 지금 중요한 건 기태가 ‘왜 왔는가’가 아니었다.

이 논산 훈련소에서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기태였다. 녀석이 나를 구하러 왔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 녀석을 믿는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혹시 2교육대에서 나온 교대 병력 봤어? 내가 교육대에 전화해서 애들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얘기하긴 했는데… 1소대장이 안 믿더라.”

“…전부 죽었습니다.”

“…시발.”

1소대장, 이 무능한 새끼. 사람이 죽어 나가는 안개 속으로 기어코 기간병을 투입해서 여럿 죽게 만들고 말았다. 고의로 죽음에 내몬 건 아닐지 몰라도 경고를 무시한 것에 대한 분노는 감출 수 없었다. 때때로 무능함은 사악함보다 더 나쁘다.

“교육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거 같습니다. 교대 병력이 오는 걸 보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어련하겠냐. 공포탄 소리를 들으면서도 잘만 잘 거다, 그 새끼는.”

“돌아가서 애들 밖으로 못 나오게 하고, 교육대 입구도 막아야 합니다.”

기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 훈련병들이 잘 따라오는지 살폈다.

큰길 쪽에서 무언가 기척이 들려오자 훈련병들은 허겁지겁 내 뒤에 달라붙었다.

나 역시 땀이 흥건한 손으로 총을 움켜쥐고 기태의 뒤를 따랐다.

수풀에 들어서서 오르막길을 통과하자 거대한 컨테이너 창고가 보인다. 연대 공급창고. 총 12개 중대의 훈련병에게 불출할 물자들이 보관되는 곳이다. 온갖 보급품들을 보관하는 만큼 그 규모도 상당했다. 분대장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황금 고블린(공급병)의 보물 창고랄까.

그런데 잠겨 있어야 할 창고의 문이 부서져 있었다.

“빌어먹을…….”

그르르륵.

쿠르륵.

안에서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창고 안을 마구 헤집고 있다.

훈련병들에게 불출되지 못한 군화와 체육복 등이 가득할 텐데… 행정보급관과 공급병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보급품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

나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뒤쪽 훈련병들에게 주의를 준 뒤, 천천히 이동했다.

조용히, 조용히.

뚜두둑.

시발.

뒤를 돌아보니 125번 훈련병이 발밑을 보며 벌벌 떨고 있다. 걷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를 밟은 모양이었다.

잡소리가 얼마든지 날 수 있는 수풀도 잘 지나쳤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그것도 콘크리트길을 걷다가 나뭇가지를 밟아?

지금 이게 소설이라면 그 작가는 정말 형편없는 새끼겠지.

클리셰도 이런 식이면 너무 진부하잖아.

쿠륵.

창고 안에서 뭔가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인다.

소름 끼치게 붉은 눈이었다.

그 순간, 기태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이 병장님.”

“그래.”

지금 이 타이밍은… 그거다.

나는 뒤쪽 훈련병을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훈련병들. 이제부터 졸라 뛸 거다. 알았냐?”

네 명의 훈련병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쭉 직선으로 주파하면 식당에 도착한다. 거기까지 약 200미터 거리.

그리고 우측으로 돌아서 조금만 달리면 2교육대 좌측 문.

그런데 잠겨 있다. 중앙 문도 잠겨 있고.

소총으로 부수면 되지만… 그럼 괴물들이 교육대 안으로 상시 진입 가능한 통로를 만드는 셈이다.

즉, 우측 문까지 다시 200미터를 더 달려야 한다.

총 400미터.

“기태야, 경광봉 켜고 앞장서라. 6중대 현관까지 바로 주파하자.”

“네.”

쿠르르륵.

녀석의 반응을 살핀 내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힘주어서 말했다.

“온다. 달려!!”

그런데…….

“얍!”

젠장.

훈련소 5주 만에 습관이 됐는지, 126번 훈련병이 아침 구보 때 외치던 구호를 우렁차게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간밤의 안개를 뚫고 청아하게 울렸다.

계속 조용하면서 침착해 보이더니, 여기서 한 건 하는구나.

그리고 그게 신호가 되어 창고 안에서 놈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기태는 곧바로 경광봉을 켜고는 앞장서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 훈련병들은 그 불빛만을 보며 죽어라 달렸다.

쿠익!!

두두두두.

땅이 울리는 느낌이 나면서 맹렬한 추격음이 들린다.

소리를 들어 보면 개나 늑대는 아니고…….

힐끗 뒤쪽을 보니 훈련병들의 뒤편에서 안개를 헤치고 달려오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날카로운 뿔에 돼지 코.

젠장, 멧돼지?! 실화냐?

입에 거품을 문, 붉은 눈의 멧돼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무리들, 귀신 병사, 그리고 멧돼지까지…….

실화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