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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그놈의 유언이 뭐라고 (2)





* * *



멀미를 피해 자고 일어나는 것을 이틀 정도 반복하니 뮈라하 가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문이 열리자마자 알았다.

응접실의 탁자, 초상화, 은촛대 등 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죄다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얼핏 반딧불을 떠올리게 하는 빛의 구슬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만 봐도 상황은 뻔했다.

마법. 그것도 마법의 자질이 발현되면서 제어가 되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어렸을 적 똑같은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릴리에는 잠을 자던 도중 힘을 자각했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나는 자다가 침대가 통째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뮈라하 가문의 시조가 대마법사래. 그래서 가문에서 가끔 마법에 자질 있는 사람이 나온다나 봐.’

릴리에는 자신이 마법사의 피를 이어받았노라고 실토했다. 다만 마법사라고 부르기엔 멋쩍을 만큼 재능이 미미했다. 그런데도 침대를 움직였다.

하물며 지금은 저택이 움직이고 있다.

엄마 닮은 곳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렸건만, 하필 마법사의 자질을 물려받은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뮈라하 가에서 급히 나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님의 장례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릴리에와 닮은 얼굴이 애써 웃어 보였다. 뮈라하 후작, 알포드와는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자랐다. 내가 릴리에와 자매처럼 지냈듯이. 어리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서, 후작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클로델이 위독하다고 들었는데요.”

“지혜열입니다.”

후작 옆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가슴팍에 달린 마법협회 배지가 제 존재를 뽐냈다. 마법협회는 마법사만이 가입 자격을 얻는다.

“재능이 있는 건가요?”

“어디 ‘있는’ 정도겠습니까.”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놀라움을 넘어 허탈하다는 듯.

“대마법사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천재인데요.”

“그걸 어떻게 알죠?”

“힘의 크기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이 정도로 터뜨려 놓고도 그릇이 부족해 열이 오를 정도니,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맥락상 그가 말하는 ‘그릇’은 클로델의 몸인 게 분명했다. 아직 어린아이의 몸.

“클로델은 어디 있죠?”

“쉬고 있습니다.”

뮈라하 후작이 냉큼 답했다. 어느새 응접실엔 나와 후작, 마법사만 남아 있었다. 고용인은 그렇다 쳐도 집사마저 물러갔다는 건 그리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긴밀히 할 말이 뭐가 있어서?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후작과 마법사 사이에 짧은 눈빛 교환이 이뤄졌다. 후작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당분간 클로델을 돌봐 줬으면 해서입니다.”

“안 됩니다.”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었다.

뮈라하 후작 가는 건국 공신인 대마법사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가정 교사를 구한다고 하면 급여가 없어도 명예를 따라 인재가 찾아올 것이요, 돈을 준다고 하면 대륙 북단에서 남단까지 구하지 못할 이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왜 내가.

“가정 교사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뮈라하 후작은 불만을 읽기라도 한 사람처럼 운을 뗐다. 마법사가 뒤이어 말했다.

“마법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요. 힘이 불안정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

“원래는 열여섯은 되어야 자각하는데 너무 일렀던 겁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힘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지요.”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 떠 있던 소파를 아래로 내렸다. 마침 피곤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앉았다.

“그러면 계속 이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럴 수 없으니 부른 겁니다.”

뮈라하 후작이 떫은 감을 씹은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클로델은 사랑스러운 조카이면서 뮈라하 후작 가의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이대로라면 마법협회가 클로델의 재능을 알아볼 텐데, 달가운 일은 아니죠.”

“도통 허락해 주질 않더군요.”

중년의 마법사가 껄껄 웃었다. 가늘게 뜬 눈동자가 이채를 띠는 게 농담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마법학 교수가 그랬다. 마법협회는 마법에 미친놈들의 집단이라고.

“그러니까, 클로델이 마법사라는 걸 협회에 알리고 싶지 않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후작은 제법 목이 마른 것 같았다. 아까부터 둥둥 떠다니는 찻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후작은 나보고 클로델을 돌봐 달라고 했다. 나는 알포드를 안다. 그는 품 안에 있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남자였다. 골칫거릴 떠넘긴다기보다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마법협회의 마법사가 여기 있는 게 그 반증이었다. 마법사까지 불렀는데도 안됐던 거다.

하지만 나라고 방법이 있겠는가.

아이를 재우는 법 같은 건 모른다. 그렇게 다정다감한 성격도 아니고. 나보다는 육아에 능숙한 사람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클로델을 보살폈던 유모 같은…….

‘이브.’

그때,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또렷하게.

‘이브.’

재차 들리는 이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2층 난간에 서 있었다.

백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마주친 시선 끝에서 푸른색 눈동자가 기묘한 열기를 띠고 있다. 그 모습이 헤어질 때보다 마른 듯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누가 이브라고 부르랬어.’

입 모양만으로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클로델은 뭐가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저택을 한 바퀴 돌기도 전, 허공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릴리에는 머리가 좋았다. 내가 릴리에의 젖자매이자 친구라는 점은 제쳐 두자.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랬다.

‘아카데미에 가야겠어.’

어느 날 오후, 정원에 앉아 머랭쿠키를 집어먹던 릴리에가 불쑥 말했다.

‘어제 모임에서 언뜻 들었는데, 아카데미가 의외로 재미있다는 것 같아.’

도대체 누가 그런 약을 판 걸까.

‘세상에 공부가 재미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했는데 등잔 밑을 몰라봤구나, 내가. 잘 다녀와. 아프지 말고.’

‘?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뭐?!’

깜짝 놀라 머랭쿠키를 헛잡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아카데미는 귀족이 아니고서야 가는 경우가 없고, 둘째,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셋째, 나는 아카데미의 ‘아’ 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뭔 소리야. 난 공부 못 해.’

‘무슨 소리냐니? 나랑 같이 교육받았잖아.’

‘물론 그 점은 부인께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내가 왜 거길 가?’

‘어머, 이브. 내가 가는데 네가 안 간다고? 진짜?’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말투였다. 더 환장할 말은 그 다음이었다.

‘입학시험이 있긴 하지만 별로 어렵진 않을 거야. 할 수 있지?’

‘…….’

집어 들었던 머랭쿠키를 도로 내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릴리에의 고집을 안다. 그녀가 말한 이상 그렇게 하고 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에는 다음 해 입학시험을 수월하게 통과했고, 그날 이후 책에 파묻혀 지낸 나도 간신히 합격이라는 글자를 받아 냈다. (참고로 뮈라하 후작, 알포드는 네 번째에 간신히 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릴리에가 날 데리고 아카데미에 가기로 한 건 나를 위한 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느 사람들처럼 적당히 먹고 자고 일하다가 때 되면 죽어야지 했던 나의 인생도 아카데미 입학을 기점으로 변했으니까.

어쨌든 내가 일 년 내내 책에 파묻히고 알포드 폰 뮈라하가 사수를 해서 겨우 뚫었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한 것을 보면, 릴리에는 대단히 머리가 좋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 뒤의 성적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시어도어는 건강 문제로 저택을 벗어나질 않았으니 머리가 좋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릴리에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머리는 릴리에를 닮아서 다행이다.’

클로델의 교육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몇 번 들려주지도 않았던 건국 역사를 줄줄 외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마력은 어마어마하게 큰데 머리 돌아가는 용량은 작으면 어쩌나 했다. 이렇게나마 릴리에의 핏줄임을 발견할 때는 무척 기쁘다.

“…….”

클로델은 건국 역사 다음 왕실의 계보를 외다 말고 날 빤히 쳐다보았다. 놀란 것 같으면서 어딘지 꺼림칙한 표정으로.

“왜 웃어?”

나도 모르게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기뻐서요.”

“뭐가?”

“도련님이 영리한 게.”

그러자 클로델은 아까보다 더 인상을 구기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말실수를 한 걸까. 얼굴이 살짝 붉어진 듯도 한데 기뻐하는 것 같진 않다. 행여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일곱 살은 흔히 세상을 탐험하는 기간이다. 나만 해도 골목을 뛰어다니며 사고란 사고는 열심히 치고 다녔던 것 같은데, 분명 똑같은 일곱 살임에도 불구하고 클로델은 조금 달랐다.

머리가 좋아서일까, 몸이 좋지 않아 누워 있던 기간이 길어 그런 것일까. 어른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일곱 살 아이가 제 나이의 두 배는 되는 것처럼 구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날 이후, 뮈라하 후작은 내 요정학 학위를 벼슬처럼 휘두르며 ‘입주 가정 교사’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업을 만들고 후작저에 손님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클로델에 한해서 집사와 하녀장 다음의 권한을 부여했다. 아무리 지식인에 속한다 한들 파격적인 대우였다.

언제는 가정 교사를 하라는 게 아니라더니,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행태에 나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계약 조건에 돈을 내걸었고 후작은 고민할 것도 없이 평생은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나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클로델도 조건을 내걸었다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