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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이브.’

앞서가던 릴리에가 나를 불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모자를 힘주어 누르고, 제멋대로 휘날리는 옷자락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만약에 말이야.’

새하얀 드레스가 여름 바람을 따라 나풀거린다. 그녀는 언덕 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내가 보고 싶어지거든, 무덤에 꽃 한 송이 놓아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내 대꾸에 그녀는 웃는 것 같았다. 양산 아래 그늘진 표정은 볼 수가 없다.

‘너무 많이 쌓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발걸음을 빨리해 보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도망치듯이 멀어진다. 조바심이 들어 힘껏 뛰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바람이 분다. 릴리에가 양산을 접는다. 모자가 날아가며 단정히 묶었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이브.’

한 발짝 더 내딛으면 떨어질 듯한 곳에 서서, 릴리에가 미소 지었다. 그 입술이 내가 몇 번이고 되뇐 말을 읊조린다.

‘……을 부탁해.’



* * *



쾅!

북을 치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 * *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훔쳤다. 재촉하듯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린다. 없는 척하고 싶은데 눈치가 없는 건지, 정말 급한 건지…… 끊이지 않는 소리를 보아 그냥 돌아갈 것 같지 않다.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누가 온 거람. 미적미적 나가 문을 여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서 있었다.

“에이브리 님 되십니까?”

잘생긴 외모에 검은색 정장을 단정히 갖춰 입은 모양새가 좋은 집 고용인이 분명했다.

“그렇긴 한데…… 어쩐 일이시죠?”

“저는 뮈라하 후작 가의 제2집사입니다. 후작님께서 급히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누가 보냈는가 물었더니 뮈라하 후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뮈라하 후작. 알포드 폰 뮈라하…… 마릴리에즈 폰 뮈라하의 남동생.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머리가 느릿하게 돈다.

“그런 연락 받은 적 없는데요.”

바로 문을 닫았다. 연락도 없이 데리러 왔다는 걸 누가 믿을까. 하다못해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라도 있으면 모를까, 집사 혼자 왔다는 데 덜컥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다. 겉으로는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지만 이래 봬도 마흔이 넘었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똑똑.) 아까보다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똑.) 무시했다. (똑똑.)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똑똑.) 잠을 설쳐서 피곤하다. (똑똑.) 다시 자야지. (똑똑.) 이번엔 꿈을 안 꿨으면 좋겠는데…….

“…….”

소리가 멎었다. 포기하고 돌아갔나? 무심코 창문을 봤다가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걸 집어 들었다. 망치다. 괜찮을까.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집사도 사색이 됐다.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가리킨다. 창틀 사이에 카드가 꽂혀 있다.

거기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망치를 치켜들자 그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창문을 열고 전서를 읽었다.

<클로델, 위독.>

누가 봐도 후작의 글씨였다. 이 정도 악필은 흉내도 못 낸다. 사람을 보냈으니 마차를 타고 오라는 문구와 함께 뮈라하 후작 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제야 망치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길이 험해서 마차는 못 들어왔습니다.”

집사의 안색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했다. 의심받은 게 억울하고 분하지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둥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여자 혼자 위험하게.’라는 기색이 어렸지만 ‘이것도 겨우 구한 집.’이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릴리에가 죽기 전에 내 재산도 다 처분해 놓았던 탓에 수중에 돈이 없었다.

“의사십니까?”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집사가 물었다. 침묵이 버거웠던 걸까. 하지만 이전 집사는 알아도 모른 척, 있어도 없는 척했던 것 같은데……. 제2집사라고 하는 걸로 보아 아직 견습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남자의 쓸데없는 물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

설마하니 어떤 관계냐고 물을 줄은 몰랐다.

관계라……. 우리가 무슨 관계일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집사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꾸었던 탓일까. 가는 내내 그 질문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릴리에는 무덤에 꽃이 많이 쌓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게 얄미워서 아직까지 한 송이도 놓지 않았다. 매일 그 앞에 두는 상상은 했어도.

차라리 얽히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부질없지만.

마차 시트에 몸을 묻으며 나는 릴리에와, 그 아름다운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1. 그놈의 유언이 뭐라고 (1)





마른번개가 치는 여름밤, 한 여인이 산고를 겪었다.

그러던 중 밖에서 다급한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불이 켜진 집으로 몰려들었다. 이동하던 중 예정보다 일찍 양수가 터졌으니 봐 달라면서.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노파는 그녀를 황급히 옆 침대에 뉘이게 했다. 허름한 산실에 두 명의 여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 둘 다 여자아이였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아이.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친구 삼아 지낼 수 있게 하면 좋겠지만 상대가 귀부인이란다. 심지어 뮈라하 후작 부인. 개국 공신인 대마법사를 시조로 하여 귀족 사이에서도 위세가 강한 가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해산을 마치기 무섭게 떠날 결심을 했다. 귀족이 어디 좀 변덕스러운가. 같은 날 출산했다는 사실을 트집 잡아 해코지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후작 부인이 퉁퉁 부은 눈을 뜨고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이 기회에 제 아이의 유모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마침 날 키울 일이 걱정이던 어머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의 별 아래 뮈라하 후작 가의 여식, 마릴리에즈 폰 뮈라하의 젖자매가 되는 순간이었다.



릴리에는 총명하고 강했으며 마음먹으면 거침없이 나아가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옆에 있다 보면 온갖 일에 휩쓸리곤 했는데, 연애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성인이 되어 왕실에 인사를 하는 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신경질적인 인상의 미남이었다.

레스포드 자작, 차남, 몸이 약해서, 참석은 처음…….

부채 뒤로 오가는 속닥거림 속에서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주워듣고 있는데, 릴리에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잘생겼어.’

맙소사. 첫사랑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어디로 내리칠지 모르니 피할 수도 없다. 첫눈에 반하는 게 그리 무섭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훗날 릴리에는 ‘내가 설마 얼굴만 봤겠어?’라고 주장했지만, 이유야 어쨌든 사랑에 빠졌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피부가 하얀 남자를 본 적이 있어? 난 처음 봤어. 거기다 백금발이 샹들리에 아래서 주홍빛으로 물들어서…… 막 그런 거 있잖아. 움직일 때마다 빛이 부서지는 것 같은.’

‘응. 피부는 병색으로 허옇게 뜬 거고 빛이 부서지지도 않았어.’

‘이브! 그러지 말고 들어 봐. 내가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있지, 눈동자가…… 뭔가 물망초가 떠오르는데, 좀 더 맑고 투명한…… 뭐라고 해야 하지? 잠깐 봤는데도 호수를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

‘호수 물 더러운 거 알지?’

‘안 더럽거든? 몰라. 어떡해. 이런 거 처음이란 말이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몸이 안 좋은지 대충 좀 서 있다가 돌아가더만. 잠이나 자.’

열심히 말렸건만 릴리에는 늘 그렇듯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까. 그 남자, 시어도어도 곧이곧대로 넘어갈 게 뭐람?

어쨌든 둘의 아이는 아버지의 병약한 체질을 물려받아 건강한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심지어 레스포드 가문은 큰 빚을 져 있는 재산도 사채업자가 다 긁어 갈 판이었다. 아이를 위해 쓸 변변찮은 돈조차 없어 외가인 뮈라하 가에서 인맥과 돈을 활용해 저명한 의사를 불러 모았지만 차도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릴리에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모처럼 그이를 닮은 천사를 낳았는데 이대로 보낼 순 없다며 낑낑 대는 것을 보다 못한 내가 연구하고 있는 요정학 분야를 도입한 것이 클로델과 얽히게 된 계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릴리에가 나한테 아이를 맡기진 않았을 텐데…….

‘클로델을 부탁해.’

아무리 마지막이라 해도 그렇지, 멋대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늙지 않는 걸 알면서.

조용히 릴리에를 따라갈 준비를 해 왔다는 것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떤 심경으로 그 말을 했는지도 이해했다.

그녀가 임신했을 때를 기억한다. 클로델이 처음으로 말을 했을 때, 첫 걸음마를 했을 때도 알고 있다. 릴리에가 눈을 반짝이며 같은 말을 하고 또 했기 때문이다. 그날 날씨가 어떠했는지도 안다.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찬란한 날이었는지도.

아이가 차라리 릴리에를 닮았으면 괜찮았을까.

후회해도 늦었다. 시어도어도, 릴리에도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 일곱 살 아이를 감당해야 했다. 말없이 내 소매를 붙잡고 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도 몰랐던 내가.

마침 뮈라하 후작 가는 손이 귀한 집안이라 클로델을 도맡아 키우겠노라고 나선 바 있었다. 릴리에의 유언은 클로델을 부탁한다는 거였지 나보고 직접 키워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릴리에를 뒤따라갈 요량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남은 건 집 한 채뿐.

무엇보다 나는 한동안 릴리에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도저히 아이를 돌볼 자신이 없었다. 클로델의 약 제조법을 모조리 적어 보내며, 이걸로 내 몫은 했다고 여겼다. 그런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