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1. 그놈의 유언이 뭐라고 (3)





‘예전 집에서 지내고 싶어요.’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무렵 클로델은 뮈라하 후작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그 작은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이유인즉 레스포드 가는 채무로 허덕이고 있었고, 릴리에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내가 유언 집행자의 자격으로 유산을 처분하여 남은 빚을 상환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클로델이 말한 ‘예전 집’도 포함됐다.

아무리 릴리에의 부탁이었다지만 못할 짓을 했다. 어머니와 유모만 있던 소박한 환경에서 지내던 클로델이 사용인이 많고 화려한 후작저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니 더 그랬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우리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라고 빈말을 던졌을 뿐인데.

‘갈래.’

라며 덥석 물었던 것이다.

뮈라하 후작은 당연히 반대했다.

지금 열 때문에 고향이 그리워져서 그러는 것일 테니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논의해 보자, 근처에 별장을 하나 지어 주겠다, 싫으면 내가 최소한의 사용인만 남겨 두고 이 저택을 나가겠다, 에이브리의 집은 살 만한 곳이 못 되니 수리를 하고 들어가거라, 아니면 거기에 하녀를 보낼까, 그것도 싫으면 그래, 딱 한 달만 살아보고 결정해 봐라, 아니 그마저도 싫다니 왜 그러는 거냐. 거기는 네가 살던 곳도 아니잖느냐. 혹시 내가 싫으냐.

후작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감정적인 호소를 해도 클로델은 완강했다. 곧 죽어도 우리 집에 가야겠다는 것이다.

말실수 한 번 했다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후작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았다. 거기에는 약간의 질투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보다 얘가 더 좋은 거니.’라는 식의. 내 생각엔 멋대로 자신을 후작저로 보낸 것에 대한 클로델 나름의 복수인 것 같았지만.

생각해 보라. 후작 가의 후계자 되는 아이를 책임지게 되었다. 심지어 몸도 약해서 주의를 기울여도 모자랄 마당에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우며 다 쓰러져 가는 우리 집이 아니면 안 된단다. 이게 긍정적인 감정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이란 말인가.

후작 가에서 지원해 주는 돈으로 이사를 가 보려 했으나 그것도 싫단다. 꼭 이 집이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최소한 쥐와 구더기만이라도 없게끔 구석구석에 쥐덫을 놓고 몇 날 며칠을 청소하느라 근육통이 왔다. 그러니 이건 복수가 틀림없었다.

애초에 일곱 살이 원하는 걸 이렇게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단 말인가? 어른이 ‘이래야 해.’라고 하면 어어어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일곱 살일 텐데.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클로델이 우리 집에 온 첫날 밤, 램프의 불을 끄며 물었다. 후작 가에서 돈도 잔뜩 받았겠다(집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 놓으라는 후작의 암묵적인 압박이 느껴졌다.), 좋은 침구를 원하면 더 좋은 걸 사 주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면 내일 장이라도 봐 올까 했는데 돌아온 건 뜻밖의 대답이었다.

‘여기서 자.’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을 정도였다. 집이 좁아 침대라고는 작은 것 하나뿐이었다. 그걸 클로델한테 내어 주고 바닥에서 잘 요량으로 침구를 깔았건만, 침대에서 자라니?

깨달음은 5초 뒤에 찾아왔다. 아, 같이 자자는 거구나.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결단은 빨랐다. 그 순간, 창문 사이로 비친 달빛이 클로델을 가감 없이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밤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클로델은 울적해 보였다.

그제야 일곱 살이란 게 실감났다.

그래, 릴리에의 부재에 누구보다 슬픈 건 클로델일 것이다. 워낙 어른스러워서 잊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나를 내심 친근하게 느끼고 있었던 걸까. 후작저에서 날 보며 웃었던 건 반가워서 그랬던 걸지도…….

‘잘 자, 도련님.’

침대에 파고들어 속삭이자 클로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작은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른스럽지만, 일곱 살.

정말이지 어려운 나이였다.



* * *



코앞에 천장이 있었다. 어찌나 가까운지 미세하게 금이 간 것도 잘 보인다. 심지어 침대는 요람마냥 흔들흔들했다.

이래서야 퍽이나 잠이 잘 오겠다.

클로델과 살게 된 이후로 이런 아침을 맞는 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당기는 것은 뒷골이요,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정작 원흉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잘 자고 있는지라 깨우지 못하고 조용히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하도 이런 일을 겪다 보니 일일이 깨우는 것도 번거로웠다.

그래도 혹시나 깼나 싶어 슬쩍 침대를 바라봤다. 클로델은 여전히 잠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아마 1시는 되어야 눈을 뜰 터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침잠이 없어져서 새벽이면 눈을 뜨곤 했다. 릴리에는 그 소리를 듣고 ‘너도 나이가 들긴 하는구나.’라며 배를 잡고 웃었다. 당시엔 ‘그것 참 고맙네.’라고 받아쳤지만 종종 그 말이 생각나는 걸 보면 충격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평소에 이십 대에서 멈춘 외양만 보다 보니 겉과 속의 괴리가 생길 때마다 얼마나 복잡한 기분이 드는지…….

“어디 보자.”

흐트러진 머리를 묶고 부엌을 살폈다. 바구니에 사과 두 알, 바나나. 탁자에 앵두 한 줌, 호두 다섯 알, 포푸리 잎 조금, 블루베리도 조금. 어젯밤 창문에 널어놓은 누에콩과 머루 줄기도 바싹 잘 말랐다.

“겨우살이가 부족하네.”

겨우살이는 약재를 만드는 데 쓰이는 기본 재료지만 계절을 타는 데다 새벽에 딴 열매만이 약으로 효과가 있다.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숲으로 나섰다. 숲은 멀리 있지 않았다. 덕분에 여름에는 모기가 물어뜯고 겨울에는 먹이를 찾아 짐승이 출몰하곤 했지만.

“그래도 근처여서 다행이지.”

순식간에 작은 바구니를 겨우살이로 가득 채웠다. 요정은 겨우살이를 좋아해서 겨우살이가 있는 자리에 흔적을 남겨 둔다. ‘사람’은 그게 보이지 않아 지나치기 일쑤지만 인간과 요정의 혼혈인 나는 동그란 흔적을 발견하는 게 쉬웠다.

요정학을 전공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릴리에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운명 같은 게 아닐까 싶어.’

릴리에가 클로델을 꼭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클로델은 매일 열이 끓어올랐고, 눈 깜짝할 새에 생사를 넘나들었다.

울다가 목이 쉬어 버린 아이를 두고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손을 놓고 있던 차에, 정말로 숨이 넘어가려던 것을 붙든 건 요정학을 연구하면서 알게 된 조제법이었다. 전승은 되었지만 검증되지 않은 것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적용한 게 다행히 잘 먹혔던 것이다.

‘이 애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죽일 수 있는 것도 너뿐이라니 신기하지 않아?’

‘와……. 차라리 저주를 해.’

‘그런 책임은 지기 싫어.’ 치를 떨며 답했다. 이래서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클로델과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클로델은 날 볼 때마다 제령이라도 하듯 무언가를 집어 던졌고, 내가 멀어지면 저택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가까이 가면 잠시 잠잠하다가도 또 뭘 집어 던지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차라리 말이라도 할 줄 알면 좋을 텐데, 말도 못하는 아이가 상대면 얼마나 답답하고 열불 나는지 모를 거다. 그래서 아예 클로델이 자는 시간을 틈타 릴리에를 보러 가곤 했건만, 결국 이런 식으로 얽히게 되었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이래 봬도 클로델은 널 많이 좋아해. 어쩌면 나보다도 더 좋아할걸?’

반쯤 의자에 드러누운 나에게 릴리에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알지, 왜 몰라. 엄마인데.’

‘뻥치지 마. 우리 엄만 몰랐거든?’

‘아주머니가? 에이, 설마. 모르는 척하신 건 아니고?’

‘아냐. 정말 몰랐어. 난 인사하기 싫다고 했단 말이야.’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말하기 뭣해서 열심히 사념을 쏘아 보냈는데도 ‘어머, 얘가 왜 이래?’라고 일축하고는 날 질질 끌고가 인사시켰다. 그게 릴리에와의 첫 만남이었다.

‘음…….’

애써 웃음을 참는 걸로 봐선 릴리에도 내가 뭘 말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모든 엄마들이 다 아는 건 아니긴 해.’

‘거봐.’

‘아냐, 그래도 이번 건 내가 맞을 거야. 나중에 봐 봐.’

‘틀리면?’

‘글쎄, 내 전 재산을 줄까?’

그때는 농담으로 들었지만 지금 와선 각서라도 쓸걸 그랬지 싶다. 그래 봤자 레스포드 가는 재산이 없으니 딱히 얻을 건 없지만, 그렇게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에이브리 님.”

집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우리 집 앞에서 턱을 치켜들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보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문을 잠그고 나갔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집사가 그 정도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별일이 없었다면 얌전히 내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별일이 없었다면.

“그…….”

“…….”

“하하.”

나는 말을 잃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집 안에서는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 쨍그랑, 접시 깨지는 소리. 탕! 탁자 넘어지는 소리. 챙, 화분 깨지는 소리. 탕! 뭔가 바닥에 내리꽂히는 소리…….

듣기만 해도 난장판이 상상되면서 두통이 일었다. 집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집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글쎄요, 저도 잘…….”

웃지 못할 기분으로 문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집 안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벼운 것은 날아가고 무게가 있는 것은 쓰러졌다. 약재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으며 창문은 갈라져 있고 식탁 다리는 부러졌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리며 얼굴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