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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무리 매혹적이라고 한들, 비서와 놀아나는 인간은 미친놈이라고 여겼었다. 어디 데리고 놀 여자가 없어서 제 일을 보좌하는 여자를 깔아뭉개는지 이해 불가였다.

그런데 고설하가 비서실로 들어온 이후부터 태오는 그런 부류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고설하는 그만큼 매력적인 여자였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총기 어린 눈동자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친절함과 유머가 공존했고, 유난히도 하얀 피부와 선이 가느다란 몸은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강단 있는 성격 덕에 그녀를 얕잡아 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갖고 싶다고 해서 세상 전부를 가질 수는 없는 거다.

그녀는 태오에게 여자보다는 비서로서 더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룻밤 즐기자고, 유능한 비서를 품는 미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 미련한 짓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태오는 그녀의 복장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녀의 자극적인 복장 탓에 시각적 유혹을 견디지 못한 탓일까?

일을 위해서라면 몸이라도 팔 거냐고 다그쳤던 대화도 곱씹어 보았다. 혀뿌리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제 입을 통해 내뱉은 믿기지 않는 말의 원인을 그녀에게서 찾으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녀가 이런 복장으로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가?

알고 있었다. 이번 파티에 참석하는 주요 인물은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미리부터 파티의 속성을 알았던 그들이 데리고 온 파트너는 자신이 스폰 하는 연예인 지망생부터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자들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파트너를 바꾸고 쉐어 하는 것에 익숙한 분위기기도 했다.

대충 구색을 갖출까 싶었지만, 사람을 돈 주고 사는 것도 모자라 구미가 당기는 대로 이리저리 바꿔치기해서 짐승처럼 교미하는 것도 역겨웠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은밀한 자리니만큼 중요한 정보도 오갈 겁니다.’



그녀는 업무의 연장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참석 의사를 밝혔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높은 양반들이 음란한 분위기의 파티를 열면서 여기저기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짓을 할 리 없었다. 소수 정예 인원에게 초대장이 뿌려졌고, 파티의 속성도 설명되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야한 복장으로 파티에 참석하게 되리라는 것도, 탐하듯 바라보는 시선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그녀는 태오를 보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저하고도 잘 수 있냐고 물었다.

기가 막히게도.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은 원인은 제 가슴속에 있는 게 분명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녀가 되물었다. 듣지 못해서 다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들었지만,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한 눈빛이었다.

만약 고설하라는 여자를 갖게 된다면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할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진실한 말로 마음을 고백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은 뒤, 선물 공세도 해 보고, 어렵사리 연애를 시작한다고 치면.

……이 여자와 결혼도 가능할까?

그 부분에서 항상 막혔었다. 태오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고, 결혼은 적당히 배경이 맞는 집안과 하게 될 거라고 여겨 왔다. 이제껏 살아왔던 것처럼 결혼 또한 적당히 하면 되는 거였다.

사람 데리고 노는 데는 취미 없고, 그렇다고 이 여자와 연애해서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리는 쉬웠다. 끌린다고 무조건 넘어뜨릴 만큼 색욕에 미친놈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을 고수해 왔던 그 ‘적당히’가 되질 않는다. 애써 고민해서 억눌렀던 감정이 무색하리만큼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줘?”

태오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네, 다시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평소처럼 감정을 지운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더 취향이면, 나랑도 잘 생각 있냐고.”

“제가 상무님하고 자면.”

그녀가 잠시 말끝을 늘여 뜸을 들였다. 찰나의 침묵일 뿐인데, 목구멍에서 모래가 솟구치는 듯 입안이 버석거리고 거북해진다.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녀의 질문은 모호했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직업적 관계를 되짚고, 정신 차리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명백한 부담감이었다.

하지만 장난스럽게 내뱉은 맹랑한 말, ‘상무님이 제 취향에 더 가까워요’에는 그녀의 진심도 녹아 있었다.

“자면 자는 거지. 어떻게 되기를 바라? 저 노랑머리랑도 어떻게 되기를 바라고 자겠다고 한 거야?”

“그건 아닌데요. 저 남자는 오늘 보고, 다시 안 볼 수 있는 상대지만 상무님은 다르잖아요. 제가 매일 상사로 모셔야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게 걸린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 솔직한 반응을 보여서 이게 지금 꼬시는 건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 노랑머리처럼 하룻밤으로 끝나는 일이면 되는 건가? 그 후에는 뒤끝 없이 없었던 일처럼 하면. 그러면 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허공을 잠시 응시한다.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

이번에도 순순히 흘러나온 대답.

태오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말에 그녀가 이제와는 결이 다른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눈빛에 어린 이채가 아름답다.

“왜? 그럼 된다며. 인제 와서 아니야?”

그녀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여자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작년이었던가? 비서실에 그녀의 후임으로 들어온 직원이 태오의 일주일 치 개인 일정을 알리는 설하의 이메일에 전 직원 회신으로 답을 했을 때.



[넴, 대리님. 태오 상무님 갠 일정 숙지하겠습미당! 근데 우리 상무님 여친은 없나바염. 되게 건전하게 사시네염. 상무님 잘생긴 얼굴처럼 색기 아니 생기 넘치게 사실 줄... 헤헤.]



결국 막내 비서는 출근 첫날 보낸 첫 이메일의 첫 회신으로 건전하게 쓰인 퇴사 통보 이메일을 받고 자리를 뺐다.

그녀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대체 후임 교육을 어떻게 했느냐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만 했다.

‘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었으면.’

태오 역시 그녀를 불러서 가볍게 나무랐다. 사실 설하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은근히 쌓인 게 있었던 태오는 그녀를 조용히 집무실로 불렀다. 완벽한 업무 수행 능력을 보이는 그녀는 실수는커녕 오히려 태오에게 종종 바른 소리를 해 대며 발칙하게 굴었었다.

그녀가 살포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저는 맹세코 상무님을 두고 불온한 말을 입에 담기는커녕, 사사로운 이야기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해당 직원이 비서실에 올라온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저에게 후임 교육에 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애초에 그런 직원을 뽑아서 비서실로 올려 보낸 인사부에 일차적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당당하게 내뱉었지만 맞잡은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규에 보면 회사 이메일은 언제든지 검열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일대일 회신이라도, 이메일 내용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입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저지른 사람은 해당 직원입니다. 저는 상무님 비서로서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이메일이 수신되자마자 IT 부서에 연락해 전제 직원 메일함에서 해당 이메일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담당 부서 또한 그 즉시 해당 이메일을 없애 버렸다.

그사이 몇몇 직원들이 이메일을 보기는 했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해고당한 직원의 말마따나 태오의 개인 일정은 건전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오너 일가의 막내아들이 사생활조차 건실하다는 호평을 받고 있었다. 증권가 지라시에서도 해당 사건이 회자되어 오너에 대한 신뢰도가 향상되면서 그날 기신산업개발 주가가 상한가를 치기도 했다.



‘저는 맹세코 상무님께 해가 될 일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설하가 억울하다는 듯이 내뱉은 말에 태오는 그만하면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마치 그때처럼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만약 그러고 나서, 그 일이 누군가에게 밝혀지면 상무님께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개 비서일 뿐이지만, 상무님께서는.”

이 여자는 어떻게 된 게 머릿속에 내 걱정밖에 없을까? 기특하게.

“그럴 일 없게 하면 되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나보고 누가 그랬잖아. 능력 없이 건실한 이미지로 먹고사는 놈이라고.”

“그건 절대 아니죠!”

그녀는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듯이 발끈했다. 언젠가 경제 주간지 칼럼에 태오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실린 적 있었다.

기업 경영 능력이 출중한 외모를 못 따라간다고 했던가? 기업 경영 능력이 외모와 비교하면 별로라고 했던가?

말만 다르지 같은 맥락이었다. 그때도 태오는 별스럽지 않게 넘어갔었다.



‘사진을 왜 이런 걸 실었지? 이것보다 더 잘 나온 것도 있을 텐데.’



심드렁히 건넨 말에 그녀는 분개하며 법적 대응까지 고민했었다.



‘이런 거에 법적으로 대응하면 대기업 횡포라고 또 난리 치겠죠? 어떻게 할까요, 상무님?’



그냥 두라는 말에 그녀는 점심까지 거르며 속을 끓였었다. 귀엽게.

“아무튼, 내가 쌓은 이미지는 쉽게 안 무너지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고. 그래서. 나랑 잘 거야, 말 거야?”

“일단 파티 끝나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기어들어 간다. 심장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기분 좋은 박자로 뛰기 시작한다.

“대신 약속해 주세요.”

“뭘?”

태오는 가진 것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잘생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자, 그녀의 뺨이 은근히 붉어졌다.

“오늘 밤이 지나면, 없었던 일처럼. 전과 같이 대한다는 거요.”

그녀가 허공을 더듬던 시선을 들어 태오를 바라보았다. 검게 젖은 눈동자에 혀끝을 가져다 대면 초콜릿처럼 단맛이 날 것만 같다. 단 걸 즐기지 않는데, 저 눈은 맛있게 생겼다.

“그래. 약속해.”

태오는 순순히 대꾸했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토끼에게 절대 잡아먹지 않고 털끝만 살짝 핥아 보겠다는 약속을 하는 기분이다. 선선했던 미소가 짙어졌다.

이런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라는 걸, 순수한 고설하는 상상조차 못 하겠지.

결국, 호랑이는 토끼를 꿀꺽 삼켜서 제 속에 가둬 버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