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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가녀린 팔뚝을 잡아챈 커다란 손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매끄럽고 하얀 살결이 제 손안에서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딜 올라가려고?”

설하가 저보다 한 계단 위에 올라서 있었지만, 태오는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압적인 목소리를 냈는데도 당황한 기색조차 없는 말갛고 검은 눈동자. 연한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고혹적으로 움직인다.

“라오스 쪽과 연이 있는 브로커의 요청으로 잠시.”

그녀의 목소리는 무더운 여름밤의 달빛을 연상케 한다. 끈적거리는 더위 속에서 홀로 은은히 빛나는 나직하고 듣기 좋은 음성이다.

그런데 늘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그 음성이 상당히 듣기 거슬리는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곧은 시선은 구불거리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잘 뻗은 30대 초중반의 남자를 향한 채였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는 것 같아?”

태오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태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몰라서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길 올라가겠다고?”

태오가 흑경으로 뒤덮인 플로어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랑살랑 끄덕거린다.

저속한 인간들.

메콩강을 접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호치민 시내의 한 호텔에 마련된 파티. 동남아 5개국의 주요 정부 인사와 개발 사업에 뛰어든 여러 회사 관계자의 친목 도모를 위해 은밀하게 마련된 자리였다.

파티를 기획한 인간이 발휘한 은근한 변태력은 수영장 위를 막아서 만든 플로어에서 빛을 발했다.

평소처럼 물을 가득 채운 수영장 안쪽에는 육중한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었고, 그 위에 흑색 강화 유리가 덮였다.

흡사 검은 물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파티 플로어의 메커니즘은 휘황한 조명과 더불어 그 위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현대 무용수들과 어우러져 가히 혀를 내두를 만큼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남자 대부분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은 무용수가 아닌 그들이 비치는 바닥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물 위에 반영이 생기듯, 흑색 강화 유리는 마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바람에 플로어에 오른 여자들의 치마 속이 야릇하게 비쳤다.

근데 그 위에 올라가겠다고?

태오가 파트너 동반 파티에 초청되면 비서인 설하가 함께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점잖은 업무적인 이야기가 주가 되는 얌전한 분위기의 모임이었다.

오늘처럼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처음이라는 의미다. 하나같이 딸뻘 같은 여자들을 옆에 끼고 돌아다니는 꼴들이 가관이다.

그리고 저 옷도.

늘 노출 없는 얌전한 드레스만을 고집하던 그녀의 복장이 오늘은 지나치게 관능적이다. 태오의 눈빛이 그녀의 드러난 살갗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몸에 달라붙을 듯 말 듯 한 검붉은색 실크 드레스는 언뜻 보면 꼭 침대 위에서나 볼 법한 슬립 같았다.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고, 조금만 몸을 급하게 움직이면 젖꼭지가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무릎을 선회하는 치마 길이가 극단적으로 짧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불거나 그녀가 걸음을 조금만 빨리해도 쉽사리 들썩거려서 탄탄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날 게 분명했다. 돌아선 등은 더 가관이었다. 브이 자로 깊게 팬 라인의 끝은 허리께까지 닿았다.

연한 화장을 한 정숙한 얼굴과 새하얀 살결을 드러내는 드레스의 조화는 사내들의 시커멓고 절대적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고설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파티 성격에 맞게 입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제 가벼운 복장을 검열하는 듯한 태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건조하게 읊조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설득력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눈이 있으면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복장을 좀 보라고.

그녀의 말마따나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의 복장 대부분이 노골적이었다. 어디에다 눈을 둬야 할지 난감한 천 쪼가리 같은 옷을 걸친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설하가 이런 속옷 같은 드레스라니.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려는 순간, 시선 끝에 탐탁지 않은 상대가 걸려들었다.

“우리 기태오 상무, 여기 있었네. 잘 지내셨나?”

얼굴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남자가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닮은 목소리로 지껄이며 다가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최 대표님.”

태오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동안, 설하가 한 계단 내려와 태오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가볍게 묵례하자, 영극 건설 최영훈 대표가 흡족하게 웃어댔다.

“어이쿠. 우리 기 상무. 일만 하느라, 젬병인 줄 알았더니만.”

최 대표가 뻐드렁니를 혀로 훑으며 육욕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설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빠아.”

퉁퉁한 팔에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콧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최 대표를 나무랐다. 저를 곁에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쌍년이 어디서 지랄이야?”

최 대표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욕설을 내뱉으며 턱짓하자,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설하를 향해 눈을 한번 흘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기신 개발 산업이 이번에 메콩강 하류 댐 건설에 관심이 많다지?”

최 대표는 입 안쪽 살을 혀로 할짝할짝 건드리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뭐, 여러 군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말이야. 얼마나 지구를 이기적으로 썼는지 말이야. 응? 메콩강 수위가 1년에 0.5m씩 높아진다잖아? 그 아름다운 메콩강 삼각주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데.”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도 최 대표의 시선은 설하를 노골적으로 탐했다.

“거기가 비록 베트남 전체 역사로 봤을 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 오래된 곳은 아니라지만. 메콩강 삼각주는 사이공 사람들한테 혼이요, 자존심이거든. 아무한테나 쉽게 줄 사업권이 아니지.”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뭔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문에 의하면 최 대표는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다가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치료 중 약물 부작용으로 목소리가 쇳소리 비슷하게 쉬어 버렸다고.

최 대표를 구슬리는 방법은 여자 들이미는 것 말고는 없다는 말이 그냥 하는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다.

“우리 기 상무가 관심 있으면, 내가 어떻게 다리 좀 놓고.”

최 대표가 양 손바닥을 상스럽게 비벼댔다. 성관계를 암시하는 듯한 손동작을 취하는 최 대표의 음욕 가득한 시선이 그녀의 가슴골을 훑어 내려가고 있었다.

“말씀 감사합니다만, 여러 군데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시선에서 냄새가 느껴진다면, 최 대표의 눈빛에서는 생선 내장 썩은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그 음험한 눈빛 때문에 설하의 몸에 오물이라도 묻는 듯 불쾌해다. 태오가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는 파티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쿵쿵 울리는 비트 강한 음악에 가려져 있던 심장 소리가 파티장을 벗어날수록 격렬하게 느껴졌다.

“……무님! 상무님……! 기태오 상무님!”

뒤에서 확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져서 태오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빠른 걸음을 따라잡느라 버거웠는지 설하가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더불어 상기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빨갛게 익은 그녀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에 정신이 산만해진다.

“이렇게 자리를 벗어나시면…….”

“고설하.”

파티에서 얻어 내야 할 정보가 있었다. 안면을 터야 할 인사들도 여럿 있었고, 긍정적인 인상도 남겨야만 했다.

다음 미팅을 도모하는 일까지, 전부 세밀하게 계획해서 참석한 파티였다. 그녀 말대로 이렇게 자리를 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까지가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영역에서 따져야 할 부분이라면.

“주제넘은 짓 하지 마.”

지금 지껄이는 말은 다분히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부분이다.

“그래도 오늘 만나기 어려운 5개국 정부 쪽 인사와 안면이라도 트셔야 하고요.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셔야…….”

“그래서? 내가 저쪽 정부 인사에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으면 해서, 라오스에 끈 있다는 브로커한테 몸이라도 팔려고 했나? 그것도 고설하 대리 업무 영역인가?”

저열한 말을 입에 담았는데도 그녀는 당황한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해서 상무님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오히려 어이없는 말을 맹랑하게 되받아치기까지 한다. 듣기 싫은 말을 단번에 끊어 낸 태오는 가감 없이 분노했다.

“미쳤구나? 나한테 도움이 되면, 기꺼이 뭘 해?”

그가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갑자기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서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인다.

“그 브로커가 제 취향이기도 했고요.”

태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위협적인 시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신장 190cm,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업으로 삼아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타고난 장골. 단단한 몸을 바짝 들이밀었는데도, 그녀는 숨조차 급하게 삼키지 않고 태연하다.

“제 취향인 남자와 한 번 자고, 사업적 이득을 노릴 수 있는 정보도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요.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너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황급히 말을 자르는 목소리에서 짜증이 그대로 묻어났다.

“지금 상무님도 말이 안 되는 짓 저지르셨거든요. 어떡하실래요? 제가 가서 잘생긴 브로커랑 자고 정보를 좀 얻어 오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아니면?”

태오가 숨을 씩씩 몰아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상무님께서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셔서 차근차근 인사도 나누시고, 계획한 대로 움직이시는 편이 나을까요?”

태오는 저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눈을 한 바퀴 돌리며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태오의 곁에서 걸었다.

“너 진짜 저 샌님 같은 노랑머리가 네 취향이야?”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놓고, 바른말을 해 대는 게 얄미워서 시비가 걸고 싶어졌다.

“글쎄요.”

“글쎄요―?”

“제 취향은 사실 상무님에 더 가까워요. 상무님 잘생기셨잖아요.”

그녀는 생긋 웃더니 먼저 파티가 열리는 야외 수영장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어지럼증이 밀려오는 게, 쿵쿵거리는 음악 탓인지, 요망한 저 여자 때문인지 모르겠다.

태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세웠다. 왜요,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더 대거리할 게 남아 있냐는 듯이 다그치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더 취향이면……. 나랑 잘 생각도 있나?”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진득한 시선이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