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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했다.

열아홉.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1년.

어떤 성인으로 살 것인지 설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

열여덟 과거로 돌아와 이제 열아홉이 되었지만, 시간이 가는 속도는 41살의 한치우처럼 느껴졌다.

“치우야∼ 우리 또 같은 반이네.”

다만, 그 말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은 시간을 느려지게 만드니까.

“몸은 괜찮아?”

“응. 멀쩡해 이제.”

긴 고통 속에서 깨어난 성훈이는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다.

물론 쉽게 돌아올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긴 고통에 웃음을 잃어버린 성훈이는 방학이 끝나고도 몇 달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나 없는 동안 심심했지?”

“심심은 무슨…….”

유일한 말벗이던 성훈이가 없어지자, 지루한 수업 시간이 더 지루하게만 느껴졌었다.

“이제 병원 안 가도 되는 거야?”

“응. 완전히 퇴원했어.”

그 지루함을 성훈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찾아가 풀었다.

“매일 병문안 와 줘서 고마웠어. 치우 너 때문에 빨리 나은 것 같아.”

병원을 찾아갔을 때마다 넓은 VIP 병실에 홀로 누워 있는 성훈이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고맙긴. 친구가 아프면 가야지.”

성일 바이오라는 합의금을 받은 방영호 회장은 하루를 이틀처럼 살고 있기에 성훈이의 병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나와 의사들뿐이었다.

그 사실이 방영호 회장 귀에 들어갔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죄책감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성훈이가 고통 속에 빠진 이유는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통해 방영호를 내 조력자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성훈이가 평생 받게 될 고통이 짧게 줄긴 했지만…….

대가를 바랬다고 해도 앞으로 고맙다는 인사는 방영호 회장이 아닌 성훈이에게 받아 놓는 게 좋다.

나이가 들수록 대가를 줄 수 있는 힘은 방영호 회장이 아니라 내 친구인 성훈이에게 기울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치우야. 이제 우리도 말로만 듣던 고3이야.”

“뭐가 문제야? 전교 2등인 분께서.”

“…전교 1등은 치우 너잖아.”

“내가 좀 하지.”

“하하하, 드라마에서 보면 2등이 1등을 옥상에서 밀고 그러던데.”

현재는 나와 수많은 의사들이 모여 잃어버린 성훈이의 웃음을 되찾으려 노력했고, 성훈이는 그 노력이 미안함인지 진심인지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밤늦게까지 공부하지 말라고. 너만 없으면… 내가 1등이다!”

“진짜 무서워… 성훈아.”

“장난이야, 장난! 하하하!”

뭐가 됐건 성훈이는 처음, 나는 두 번째로 고3이라는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흘러가는 속도는 서로 조금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시간을 두 번째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아니, 나밖에 없겠지.

“장난을 쳐? 감히!”

성훈이에게 주먹을 보이며 다가갔다.

“아, 살려 줘!”

전교 1등과 2등이 교실에서 가장 크게 웃고 떠드는 이 상황도 흔치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시간에서 나는 얼굴이 망가진 채 성훈이와 구석에서 조용히 속삭였으니까.

“방성훈, 너 오늘 죽었어.”

“살려 줘!”

탁!

“미안해 선호야!”

장난을 치는 나에게서 도망가던 성훈이가 명선호와 부딪쳤다.

“이런 씨…….”

부딪친 건 성훈이었지만, 명선호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는 목까지 올라온 욕을 다시 집어넣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성훈이에게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성훈아. 하. 하. 하.”

명선호 역시 나와 같은 반이었다.

녀석에게는 그 사실이 아주 많이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첫 번째 시간에서는 내가, 두 번째 시간에서는 명선호가 말이다.

“이제 그만해 얘들아. 곧 수업 시작이야.”

우리의 소란이 신경에 거슬리는지 반 아이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미안. 치우야, 그만해. 우리 때문에 애들이 피해 보잖아.”

달라진 내 모습에 피해를 주는 쪽에서 받는 쪽으로 바뀐 녀석들과 달리 성훈이는 어떠한 시간에서도 여전히 착해 빠진 녀석이었다.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 역시 그만하라 말한 녀석에게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응? 아니야… 괜찮아…….”

비록 사과를 받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지만.

이것들이 진짜 왜 그럴까.

괜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내가 주변을 쓱 둘러보자 하나둘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불편한 건 명선호뿐만이 아닌가 보다.

처음 보는 얼굴도 꽤 있었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나를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전교 1등.

일진 명선호를 때려눕힌 일.

민태호라는 조폭의 방문.



이런 것들은 고등학교에서 퍼지기 아주 쉬운 소문들이었다.

그런 소문이 고등학교에서는 스펙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건 고등학교에서의 소문도, 철없는 스펙도 아니다.

“그럼 수업 준비하자.”

의미 없는 시간일 테지만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폈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의미해지게 갑자기 들이닥친 담임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선생님, 치우 좀 데려갈게요. 치우야, 교무실로 좀 올래?”

“왜요?”

“일단 좀 와 줄래? 선생님이 부탁 좀 할게.”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담임의 부탁이었다.

왜?

내 소문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전국에 퍼졌고, 역사상 가장 화려한 스펙을 가진 고등학생이 탄생되는 순간이었으니까.

담임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 이유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제47회 1차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오늘 새벽에 신문을 보고 등교했으니 말이다.

“음… 치우야. 혹시 방학 때 사법고시 봤니?”

“네, 봤습니다.”

내 대답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만 있던 불편함이 교사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아 그렇구나… 방학 때 놀기도 바쁠 텐데 기특하구나.”

그저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 생각하던 내가 불편해지는 이유?

비록 1차이지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게 할 말이라고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조언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데 그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삼십 대 교사들이 나에게 조언을 해 봤자, 내 속에 있는 마흔한 살의 한치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판사가 꿈이니, 검사가 꿈이니, 아니면 변호사?”

셋 중 뭐가 됐건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 것이니 그것 또한 부담스러운 것이다.

진학 상담조차 필요가 없다.

이번 년도에 3차 시험까지 합격한다면, 대학이 아닌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테니 말이다.

“자자! 여러분. 우리 학교 학생이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수석으로요!”

짝짝짝!

담임이 크게 말하자 교무실 안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다.

“하하. 치우가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겠구나!”

나와의 악연을 표정 뒤로 숨긴 교감이 웃으며 말했다.

자랑거리?

아니 돈벌이가 되겠지.

대학까지 통틀어 서원 재단에서 나온 유일한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니까.

“언론사에서 치우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데 치우 네 생각은 어떠니?”

교감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본색을 드러낸다.

“안 합니다.”

“그러지 말고 치우야… 출연료도 많이 준다는데.”

“한 3억쯤 준다고 하던가요?”

흠칫.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교감의 표정이 굳어진다.

교사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교감이 나에게 건넨 3억이라는 돈과 그리고 그 돈을 건넨 이유까지.

“그 정도 아니면 안 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서원 재단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법적으로 문제를 삼을 테니 조심해 주시고요.”

흠칫.

교감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고등학생의 멋모르는 협박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이들보다 법과 가까운 위치에 있으니까.

“말씀 끝나셨으면 가 봐도 될까요?”

“응, 그래…….”

복도를 향해 멀어져 가는 나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주임]



“어? 치우야.”

복도로 나가자 교무실로 다가오는 학생주임의 완장이 보였다.

“그땐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내가 내 본분을 잃어버리면 안 됐는데.”

본분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완장을 차고 있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변한 것은 학생주임이 아니라 나였다.

당시의 나는 학생주임의 본분이 필요했고, 지금의 나는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했다.

“미안해 치우야. 그나저나 내가 치우 번호가 없더라. 번호 좀 알려 줄래?”

표정 변화 없이 미안하다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뒤지는 학생주임이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그가 나에게서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니라 앞으로 검사가 될 한치우 번호일 것이다.

“번호는 못 드릴 거 같습니다.”

“왜? 아직도 내가 원망스럽니?”

“사법고시 합격자 한치우가 아닌, 보호해야 할 고등학생 한치우의 번호가 필요하실 때 찾아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도 같이요.”

진짜 그럴 것이다.

나는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하지만, 학생주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니.

다만, 그가 진짜로 변한다면 앞으로 서원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될 학생들은 나보다는 조금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부디 그 완장에 기대고 숨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게 해달란 의미입니다.”

“…….”

굳어버린 학생주임 옆을 지나쳤다.

아마 한참 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나쁜 징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나쁜 생각을 가진 뇌가 멈춰 버린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



[제47회 사법시험 2차 시험장]



사법시험장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고시생들의 시선도 두 번째가 되니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추리닝 차림에 필기도구를 주머니에 넣고 껄렁하게 있는 그 모습이 말이다.

“쟨가 봐, 1차 시험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그 고등학생.”

“맞네. 1차 시험에도 추리닝 차림으로 사인펜 하나 들고 왔다던데.”

“진짜 천재인가? 말이 돼? 고등학생이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게?”

“그것보다 성적이 더 말이 안 되지. 쟤 때문에 내년부터 1차 시험이 더 어려워진다는 소문이 있어.”

다만 1차 시험에서 내 껄렁함이 지금은 여유로 보이는 것이다.

“역사상 처음이래. 수석이랑 차석 점수가 10점 이상 차이 나는 게.”

“차석이 못한 게 아니라 재가 압도적인 거였지. 거의 만점을 받을 뻔했으니. 그것도 고등학생이 말이야.”

너무 잘 들리는 수군거림이 듣기 싫어 조금 일찍 시험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꼭 연락해!”

입구에는 1차 시험에서 본 마담뚜가 여전히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1차 시험과는 달리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말이다.

“어머∼ 그때 그 학생 아니야.”

“이번에도 역시 명함은…….”

스윽.

“넣어 둬! 내가 학생한테는 특별히 이 명함으로 줄게.”

마담뚜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주머니에 막무가내로 명함을 집어넣었다.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이 아닌, 가슴 속에서 꺼낸 황금색으로 코팅된 명함이었다.

“다른 사람 주시죠. 비싼 명함 같은데. 별로 만지고 싶지도 않고.”

“처음부터 너 주려고 품고 있던 거였어.”

“말씀드렸을 텐데요. 명함 필요 없다고.”

“알아. 연락을 하든 말든 네 자유야. 그런데 그 명함은 꼭 맞선이 아니라 그냥 114라고 생각해. 높은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114.”

주머니 속에서 꺼내려 했던 명함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에 이 명함이 언젠가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담 갖지 말고 시험 잘 봐. 뭐 어차피 잘 보겠지만.”

다소 불편한 관문들을 지나치고서야 시험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