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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작은 선물 하나 보내겠습니다, 지검장님.

탁.

치우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강철호는 음소거가 된 뉴스의 자막을 바라봤다.



[성훈산업 납치 사건 범인 자수]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선물인지 폭탄인지는 상자를 열어 봐야 알겠지.”

혼잣말을 하며 팔걸이를 지렛대 삼아 일어난 강철호가 뒤에 있는 명패를 향해 움직였다.

삑―

― 네, 검사장님.

인터폰을 누르자 벽 너머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TV뉴스 관할서가 어디죠?”

― 용산 경찰서로 자수한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정 부장 좀 올라오라고 전해 줘요.”

― 네, 지검장님.

선물이든 폭탄이든 손에 들어와야 상자를 열 수 있는 법.

치우로 인해 박민구가 서부 지검 관할 구역에 자수했지만, 강철호의 성격을 아는 누군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었다.

외압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똑똑.

“들어와요.”

물론 그 사실을 강철호 본인도 알고 있어 더 빨리 움직이려 하는 것이고.

“부르셨습니까, 검사장님.”

한 남자가 지검장실을 열고 들어왔다.

강철호의 말을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담아 둘 수 있는 남자일 것이다.

“저놈 좀 데려오죠.”

강철호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하자, 정 부장 역시 강철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송치 전에 데려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지검으로 송치가 안 될 것 같으니 데려오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군요.”

“흠… 아무리 지휘 관서라고 해도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인데 용산 서장이 쉽게 내줄까요?”

정 부장은 강철호의 부담스러운 명령에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가죠.”

“아닙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강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기에 눌린 정 부장이 쪼그라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허허허,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어디 안 다치게 데려오시고.”

인자한 미소로 말하는 강철호이지만 정 부장의 몸은 이미 지검장실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강철호의 진짜 표정을 알고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정 부장이 떠나자 올라가 있던 강철호의 입꼬리가 다시 내려왔다.

“그래 일단 받아 보자고, 한치우.”



***



점심이 지난 시간 방영호 회장의 서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자자, 준비들 하자고!”

네 명씩 줄지어 마주 앉은 두 팀.

그들의 시선은 전자파를 내뿜는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치우 군, 내가 합의금이 아니라 쓰레기를 긁어모으는 게 아닐까 싶네만.”

“걱정 마시죠. 저들의 손에 있으면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회장님 손으로 들어오는 순간 금덩어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 두 팀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방영호 회장과 나였다.

“팀장님 누가 20만 주를 던졌습니다.”

“전부 받아! 매수 예약 걸어 놔!”

마치 총성 없는 전쟁터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매수 성공했습니다.”

어젯밤 박민구가 일으킨 바람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성일 바이오 주식을 흔들고 있었다.

“호가창 10단계로 보여줘 봐.”

얼마나 많은 차명을 이용해 주식을 긁어모았는지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가상의 슈퍼 개미들이 물량을 족족 던지고 있었다.

“자! 너희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는 몇 초 동안 수만 개의 주식이 거래되고 있다. 정신 놓지 마. 물도 마시지 마!”

“네!”

오늘 아침 장이 열리기 전부터 성일 바이오는 가장 핫한 주식이 되었고 수직으로 떨어질 걸 알면서도 1∼2%의 시세 차익을 노리는 단타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한가가 15%인 게 아쉽네.”

10년 후에 15%이던 주식의 가격 제한폭은 30%로 오른다.

“어쩔 수 있나.”

내 혼잣말에 방영호 회장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물론 지금은 10년 후를 아쉬워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보유 물량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저런 훌륭한 군인들이 싸우고 있으니.”

총성 없는 전쟁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회사 재무 팀이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조직이기도 하고.”

방영호는 자신이 만든 조직이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사실 저 전쟁의 승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총성은 없지만 저들의 총 속에는 돈이라는 총알이 무제한으로 제공되고 있으니까.

바로 방영호 회장의 주머니에서 만들어진 총알이 말이다.

다만, 이미 승리를 정해 놓고 하는 싸움이지만, 총알을 아끼고 또 내 몸에 상처가 덜 나면 그게 승리의 기쁨을 더해 주는 것일 뿐이었다.

“후∼ 시장에 풀린 굵직한 물량은 어느 정도 담아낸 것 같습니다. 팀장님.”

“그래 물 한잔 마시고. 3시까지는 화장실 갈 생각도 하지 마.”

“네!”

스윽.



[12%]



두 팀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는 한 남자가 쪽지를 계속해서 건넨다.

방영호 회장의 총알을 써서 얻은 전리품의 숫자가 적힌 쪽지였다.

쪽지가 쌓여 갈수록 숫자는 높아지고, 보유 물량은 늘어난다.

“걱정 마시죠. 그 쪽지가 많이 모일수록 황금 덩어리도 많아지는 것이니까요.”

쌓여 가는 쪽지를 바라보는 방영호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 건넨 말이었다.

“제가 꼭 바꿔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이 가진 쓰레기를 황금 덩어리로.”

“하하하, 치우 네 손이 미다스의 손이라도 되는 것이냐?”

“손이 아니라 머리가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 말이 달콤해서 방영호 회장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 믿어 보마.”

언제나 그랬듯 내 확신을 믿는 것일 뿐.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확신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매수 주문이 체결되었습니다.]



댕∼ 댕∼

전체 상황을 보여 주는 벽면 스크린 위에 탁종 시계가 3시를 알리는 종을 치고 마지막 매수가 체결되었다.

“다들 수고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재무팀장이 직원들을 격려하고 방영호 회장 역시 그들을 격려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들 했네.”

전쟁을 마치고 직원들이 방 회장 앞에 도열했다.

“총 매수 물량 26%로… 대주주인 주필현 대표보다 2%더 많은 지분입니다. 내일 장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앞으로 시장 거래 물량은 매수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끄덕끄덕.

재무팀장이 결과를 보고하자 방영호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자신이 사들인 주식이 황금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래, 수고했네. 이제 물러들 가 보게나. 정리는 시설팀에게 시킬 테니.”

“네, 알겠습니다.”

재무팀 직원들이 서재를 바쁘게 빠져나가고 정리 안 된 서재 구석에서 방영호 회장이 커피를 내렸다.

“자, 이제 들어 볼까? 네 머릿속이 부리는 재주를 말이야.”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방영호 회장의 물음에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TV를 켰다.



[성일 바이오 대표 구속영장 신청]



지지직 소리에 방영호 회장의 시선이 커피 머신에서 TV로 향했다.

“황금을 만들려면 쓰레기부터 치워야겠죠.”



[내일 오전 구속 여부 결정]



“쓰레기들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로 말이죠.”

박민구는 서부 지검으로 인도되었고, 조사실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가 불안한 어떤 세력들은 서부 지검 문을 부셔 보려 할 테지만, 강철호라는 문지기는 너무나 강직한 인물이었다.

“박민구는 그렇다 쳐도 성일 바이오 대표는 구속이 힘들 텐데.”

“아니요. 박민구 입이 열리면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실 기각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놈의 입이 열린다기보다는 내가 준 대본을 그대로 읽는 거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지?”

“영장에 손을 대려 한다면 일단은 서부 지검 문을 부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방영호 회장이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굳이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방법은 많지 않은가. 예를 들면 누군가의 손을 빌리던가?”

“강철호 검사장님이 지키고 있는 서부 지검 문을 부술 수 있는 손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검찰총장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이제 곧 중앙 지검으로 이사하는 강철호 검사장이었다.

등에 여론을 업고 있는 강철호가 지키는 문.

아마 그 문을 부순다면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사실 누가 부순다고 해도 쉽지는 않겠지만.

“하하하, 그러겠구먼.”

방영호 회장의 꾹 다문 입이 열리고 이내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커피가 식었네요.”

내가 방영호 회장이 내려준 커피를 보며 말하자 방영호 회장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새로 내려 줄까?”

“아닙니다.”

스윽.

생각은 있었지만, 아직은 뜨거운 커피를 마실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음에 올 때 다시 내려 주시죠. 그때는 성일 바이오에서 황금을 만들 수 있는 도면을 가져오겠습니다.”

“하하하, 그러게나. 그럼 나는 공장 돌릴 준비를 하고 있겠네.”

“네, 알겠습니다.”

쾅.

문이 닫히고.

스르릅.

웃으며 치우를 배웅한 방영호가 식어 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 어떤 황금보다 치우 네가 더 탐이 나는구나.”



***



해가 진 강철호 검사장의 집 앞.

전화를 하고 온 덕에 밸을 누르지 않고서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검사장님이 댁에 계시면 박민구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가 집에 있든 지검에 있든 조사실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내 입에서 결정되니까 말이야.”

마당에서 건넨 내 첫 인사가 잘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완벽해져 돌아왔다.

“선물이라고 해서 받긴 받았다만, 딱히 설레지는 않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선물의 의미를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의미?”

“검사장님한테 건넨 박민구는 목줄입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목줄이죠.”

“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집안으로 들어가지.”

집안으로 들어가자 강철호 역시 커피를 내려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 누구의 목줄인지는 모르는 것이고?”

“네. 하지만 지체 높은 누군가의 목줄이 될 수 있습니다.”

박민구가 지검에 잡혀 있는 그 순간이 불안한 사람들의 목줄.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 말이다.

“그 목줄을 찾고 싶은 자가 한 명은 아닐 거 같으니 아무나에게 채우시면 됩니다.”

목줄을 찾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티를 낼 테니 말이다.

“곧 그걸 담보로 검사장님을 찾아올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박민구가 보고 들은 기억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주는 대신 목을 내어 줘야 하니…….

“하하하, 내가 선물 보낸 사람 뜻도 못 헤아리고 있었구나.”

강철호가 이리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닙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또 강철호의 명함 몇 장이 내 지갑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 치우야. 잘 가고 언제 평일에 밥 한번 먹지. 아주 괜찮은 식당을 하나 알거든.”

선물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대문 앞까지 웃으며 배웅하는 강철호였다.

지잉∼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 보낸 문자가 내게 왔다.



[치우야, 나 깨어났어.]



성훈이는 깨어났고, 성훈이를 잠들게 한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곧 사라질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에서인지 세상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또한 박민구와 성일 바이오 대표는 구속이 되었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칠지, 아니면 감옥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 미래에 검사 한치우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게 완벽한 끝은 아니다.

거대한 악의 무리에서 꼬리 비늘 하나 떼어 낸 것뿐이니까.



[병원이지? 지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