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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는데도 차치홍 기자는 선뜻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서성였다.

살집이 조금 붙어 있는 몸.

뿔테 안경과 가슴에 포켓이 붙어 있는 줄무늬 와이셔츠.

포켓 속에는 반쯤 나와 있는 수첩과 볼펜이 보인다.

머릿속에 차치홍의 프로필이 없다 해도 외모에서 글 냄새가 연신 풍겨 왔다.

“혹시?”

“네, 한치우입니다. 들어오시죠.”

미로 같은 방을 찾느라 지쳐서?

혹은 테이블에 깔린 화려한 음식들이 부담스러워서?

아니다.

차치홍이 서성이는 이유는 그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 때문이다.

“아, 네…….”

드르륵.

차치홍이 안으로 들어오자 밖에 서 있던 여성이 미닫이문을 다시 닫는다.

― 있을까요? 물러날까요?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 그럼 물러나 있겠습니다.

능숙한 내 행동과 겉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는지 방에 들어왔음에도 선뜻 앉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는 차치홍 기자였다.

“천장 안 무너지니 앉으시죠.”

차치홍 기자도 나도 한 테이블에 100만 원을 웃도는 이런 고급 식당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조직폭력배 소속 법무 이사가 양지의 높은 분들을 만나기 위한 장소와 그런 높은 분들 입에서 나올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장소로서는 이만한 데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걸 참… 치우 씨라 불러야 할지 치우 군이라 불러야 할지 난감하네요.”

“편한 대로 부르시죠.”

“여기서 뵙자 그러기에 목소리만 어린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는 상자 속에 현금 다발이 들어 있기도 했고, 종종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 많아 봐야 20대 정도로 보이는 내가 앉아 있으니, 말끝이 절로 흐려지는 것이다.

“제가 부탁드렸고 방 회장님이 차려 주신 테이블입니다.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 술은 못 마시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미성년자요?”

“네. 미성년자 맞습니다.”

쪼르륵.

나는 주전자에 담긴 탁주를 차치홍 잔에 따르며 말했다.

“아… 뭐 그건 그렇고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제 제보는 괜찮으셨습니까?”

“아, 네! 치우 씨, 만나러 간다니까 부장님 지갑에서 이게 나오더군요.”

차치홍이 포켓 수첩 뒤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들었다.



[송암 일보]



사출된 이름에 회사명이 적혀 있는 걸 보니 법인 카드이다.

“여길 들어오면서 이걸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부담스러웠는데, 방 회장님이 차려 주신 테이블이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하하하.”

“네, 얼마든지요.”

꼴깍.

차치홍이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그나저나 그럼 이걸 어디에 써야 되나 고민되네요. 치우 씨한테 쓰라고 준 카드인데 술은 안 되고…….”

도리도리.

익숙함에 속아 꺼낸 말이 머릿속 내 나이에 걸리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차치홍.

“흠, 뭐가 좋을까.”

“뭐가 됐건 일단 킵해 두시죠. 아직 제보가 남았으니.”

내일 저녁.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대중에게 알린다.

차치홍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성훈이를 납치한 범인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방 회장님 아드님은 아직 안 깨어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구했으니까요.”

“네?”

“수첩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차치홍의 포켓을 보며 말하자, 시선을 나한테 고정한 채 자신의 수첩을 건넸다.

슥슥―



[일요일 저녁 8시]

[성훈산업 방영호 회장의 아들 방성훈 군을 납치한 범인은 조직폭력배 박민구. 죄책감에 자수해.]

[성일바이오 대표이사 조폭을 이용해 주가조작 공모.]



예언을 하듯 기사의 헤드라인을 수첩에 적었다.

내 예언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저녁 기사로 월요일 아침 성일 바이오의 주가가 떨어질 것이며,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엄청난 물량을 처분도 하지 못한 채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이다.

슥슥―



[월요일 저녁 8시]

[조직폭력배 박민구,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의 사주를 받고 방성훈 군을 납치.]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 행방불명. 검은 세력의 존재?]

그렇게 장이 끝날 때쯤 주가는 하한가를 기록할 것이고 방영호 회장이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던진 물량을 전부 받아 버림으로써 작전은 끝난다.

그렇게 실패한 작전을 이용해서 성일 바이오를 인수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적은 월요일 두 번째 예언은 현실이 되겠지.

스윽.

“적어드린 순서대로 터트리시면 됩니다.”

가득 채워진 수첩의 한 면을 펼쳐 보인 채 차치홍에게 다시 건넸다.

“이게 지금 무슨… 박민구가 누구죠? 자수를 했나요?”

“아니요.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지금 허위 사실을 기사로 쓰라는 것입니까?”

“걱정 마세요. 기사가 나가는 내일 저녁까지 자수시킬 테니까요.”

쪼르륵.

비워진 차치홍의 잔에 다시 한번 술을 따랐다.

“계산은 방 회장님이 나중에 하신다니까 천천히 드시다 가시죠.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띵동.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 있는 차임벨을 눌렀다.

“필요한 거 있으면 오시는 분한테 더 시키시고요. 아니면 그분을 방 안으로 들이셔도 되고.”

드르륵.

“필요한 거 있으세요?”

나는 그녀의 물음을 지나쳐 밖으로 향했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분내에 뒤를 돌아보자…….

수첩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는 차치홍이 보였다.

“저분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공손히 답을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닫았다.

“휴, 그럼 박 실장이나 풀어 주러 가 볼까.”



***



다시 미래 인베스트먼트 건물을 찾아갔지만, 이전과 크게 다른 게 없었다.

“요즘 큰 형님 좀 이상해진 거 같지 않아?”

“맞아. 일주일 전인가, 큰 형님 업소에 계셨거든? 그런데 그때 술 취한 양아치들이 시비 거는데도 한마디도 안 하고 웃으시더라.”

“아무래도 그 꼬맹이 때문인 것 같아. 그때 시골에서 그 꼬맹이 만나고 오신 다음부터 변하셨어.”

입구에는 여전히 건달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고,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굳이 숨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

“어? 뭐야 그 꼬맹이 아니야.”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나를 돌아보는 두 사람.

“맞습니다. 박 실장 좀 만나야겠습니다.”

전과 같이 조폭들이 박 실장을 지키고 있지만, 내 걸음을 막지는 않았다.

“형님한테 보고…….”

휙.

“됐어. 분명 들여보내라고 하실 거야.”

한 명이 전화기를 들자, 다른 한 명이 손을 저지한 채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한 나는 그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변한 큰 형님보다 쟤가 더 이상해.”

“그니까. 깡 하나는 겁나 좋네.”

수군거림이 들려 왔으나, 적대적이지 않은 탓에 나는 피식 웃으며 박 실장이 있는 사무실 입구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남자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입구에서 얘기 끝났으니 걱정 마시죠.”

“어… 그래.”

드르륵―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형님들을 뚫고 왔으니, 다시 되묻지 않고 두꺼운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박 실장 상태는 어떻습니까?”

“몰라. 새벽까지는 지랄발광을 하더니 지금은 조용하네.”

덜컥.

“알겠습니다. 제가 들어가면 문은 다시 닫아 주세요.”

쾅.

내 등 뒤에서 전해진 문소리에 박민구가 움찔거렸다.

“물…….”

똑똑.

박민구의 말에 나는 문을 두드렸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죄송하지만 물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 그래. 조금만 기다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즐기고 싶지만, 시들어져 있는 녀석에게 물을 줘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이내 사무실 문이 열리고 물통이 들어왔다.

“여기.”

“고맙습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의자 하나를 녀석의 앞에 놓고 앉았다.

“이제… 그만해… 죽을 것 같아…….”

쓱쓱―

다시 빛을 보여 주려 했지만, 봉지가 피에 굳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박민구는 그 상황이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을 처댔다.

“움직이지 말아요. 더 아프니까.”

쪼르륵.

물을 쏟아 부으며 겨우 봉지를 벗겨 냈고 찬물에 정신이 조금 드는지 시들어 있던 몸을 서서히 세웠다.

“너… 이 개새…….”

“살려 주러 왔더니 욕부터 내뱉네.”

휙.

반쯤 차 있는 물병을 저 멀리 던져 버리자 박민구의 시선이 다급히 따라갔다.

“무, 물…….”

“벌입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제 곧 풀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여기 대표는 찾았나?”

“아니요. 굳이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까요.”

내 말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자신을 지켜 줄 민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태호… 형님은?”

“성훈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약속대로 지켜 드려야죠.”

“휴…….”

박민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직 밖의 상황을 모르기도 하고, 민태호가 자신을 지켜 준다는 약속이 깨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

“자, 그럼 당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박민구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어떤 세력이 뒤에 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위험한 건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뿐만이 아니다.

주가조작 명령의 끝자락에 있는 박민구.

직접 성훈이를 납치한 녀석의 입이 살아 있는 게 신경이 쓰이겠지.

“자수하십시오.”

“뭐?!”

“그게 지금 당신이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태호 형님이… 지켜 준다고 하지 않았나?”

“민태호 삼촌 옆에 24시간 붙어 있을 자신 있어요?”

민태호는 분명 녀석을 떼어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건 모든 약속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던 사람이니까.

“그건…….”

“아마 그런다고 해도 지금 상황과 별다르지 않을 텐데요.”

보호라는 명목 아래 사방이 막혀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자수해요. 당신을 지켜 줄 사람은 감옥에도 많으니까.”

민태호의 이름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민태호의 말이 그곳에 전해지는 순간, 민태호의 성은을 받으려 너도나도 박민구를 지키려 할 것이다.

꾸욱.

“첫날은 입 다물고, 둘째 날에 거기 적혀 있는 대로 자백하세요.”

묶여 있는 박민구의 팔 사이로 작은 수첩 하나를 끼어 넣었다.

내 예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대본.

물론 거짓은 아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한 대본이니까.

“감옥은 안전할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녀석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면서.”

“걱정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안 될 이유를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머릿속이 무거운지 다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벌 받아야죠. 당신이 안전하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자수하시죠. 참작 받을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입을 연 김에 그의 머릿속을 가볍게 해 주기로 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봐야 몇 바퀴입니다. 새 삶 살아야죠. 조직도 해산되고 돈벌이도 없는데 혹시 알아요? 다시 나오면 민태호 삼촌이 당신을 받아 줄지.”

만약 박민구가 정말 교화가 된다면 다시 받아 줄 것이다.

그때쯤이면 민태호는 조폭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시 재갈 안 물릴 테니 잘 생각하시고, 밖에 말씀하시면 들어와서 풀어 줄 겁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할 때는 박민구의 고개가 완전히 들려 있었다.

“반드시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자백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으니까요.”

반쯤 문을 연 채 말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것이 희망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놈의 눈빛을 보다 보니, 이대로 가기가 그래서 밖으로 향하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음지에 오래 있어 봐서 아는데, 착하게 사는 것도 꽤 즐겁습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