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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벌써요?”

“네. 다 적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차 시험의 객관식이 2차 시험의 주관식으로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복도를 지나가며 고객숙인 시험생들을 볼 수 있었다.

“후, 이제 면접만 보면 되네.”

텅 빈 시험장 밖에서 나 홀로 푸념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은 길고 긴 문제를 읽고 서술한 것이고, 나는 머릿속 정답을 종이에 옮겨 적은 것일 뿐이니까.

아무리 주관식이라지만,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은 있기 마련이었다.

어쨌건 그 탓에 감독관은 내 시험지에 놀랄 게 분명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시간에 나는 이미 다 적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관만 놀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관이 속도에 놀랐다면, 채점을 하는 교수들은 정리가 잘 된 답안지를 보고 놀라겠지.

“내가 커트라인을 너무 높게 만들어 놨나?”

내 기억으론 2005년 2차 사법시험의 커트라인이 48점이었으니.

아마 역대 사법시험 중, 아니, 앞으로 사법시험이 폐지되는 그날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 하나를 내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만점은 나오지 않을 테다.

내 서술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해도 내 시험지는 OMR 판독기가 아니라 교수들의 손에 의해 채점이 되니까 말이다.

“어차피 천 명 뽑을 텐데 1등 점수 높다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 보지는 않겠지 뭐.”

혼자 중얼대며 시험장 밖에 다다르자 익숙한 장면들이 보였다.

누군가의 가족, 혹은 연인, 때로는 친구들까지.

두 손을 모으고 시험장 안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간절함이 잔뜩 담겨 끈적거리는 엿을 문에 붙여 놓은 채.

“어머, 지금 나오는 사람 그 학생 아니야? 1차 시험 수석 합격한 고등학생?”

“맞네∼ 맞아!”

자유롭던 1차 시험의 귀가와 달리 2차 시험에서는 시험장 입구를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미신이라도 믿고 싶을 만큼 간절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학생, 미안한데 학생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될까?”

안돼요.

“이보게, 내 손주도 자네 기운을 받게 그 필통 좀 줄 수 있나?”

싫어요.

“나는 조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속옷 좀 줄 수 있어? 아니면 팔아! 비싼 값에 사 줄 테니까.”

꺄악, 꺼져요!

순간 속으로 하던 말이 입으로 나올 뻔했지만, 꾹꾹 목구멍에 다시 눌러 넣고 인파를 헤쳐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 탓에 속도가 나질 않았다.

“집은 어디야? 우리 아들내미도 거기로 이사 보내 버리게!”

지체하다간 온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구수하고 느림직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학생∼ 부모님은 어디서 기도하셨디야∼”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대가 없는 희생을 숫자로 통계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보다는 항상 많을 것이라는 법칙.

“워, 육상 하셨어요? 그만 따라오세요! 그리고 저희 부보님은 기도 안 하셨어요!”

“아들내미 일인데 뭔들 못 하것어. 말해 줘 봐아. 어디 가서 말 안 할게에.”

그 희생정신은 50대 여자 몸으로 파릇파릇한 열아홉 살의 전력 질주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숨이 차 헐떡거리는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다시 물었다.

“요즘 다니는 절은 기도 빨이 좀 약한 것 같어. 학생 생각은 어뗘, 이참에 교회를 나가 볼까?”

“저희 부모님은 두 곳 다 안 가셨고요. 저는 어머니한테 지은 죄가 좀 있어서 보답하려는 마음에 공부 열심히 한 것뿐입니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어디 가면 얼마에 할 수 있냐고 물을 것 같기에 대충 둘러댔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졌기에 그런 보답을 하는 거여?”

“이것도 아직 부족… 아니, 이걸 내가 왜 답하고 있지? 헉헉. 그만 따라오세요! 집까지 따라오실 거예요?”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도 뒤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어디든 못 따라가겠어?”

“이제 곧 시험 끝날 텐데 아드님 마중하셔야죠!”

“이번 시험은 경험만 한다고 그랬으니께 걱정 말어∼”

아니요.

걱정 안 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쫓아와요!

마음 같아선 매몰차게 떨쳐 내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그러지 못했다.

아주머니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일 테니까…….

“탓네, 탔어. 결국 따라 탔어. 에휴∼”

버스에 따라 탄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그니까 알려 주면 안 따라갈 거 아니야.”

“앉기라도 하시든가요!”

“됐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뭐라도 하나 건질 거 아니야!”

자리가 텅텅 비었지만, 아주머니는 굳이 내 자리에 붙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려 했다.

“빨리 여기 앉아요.”

“그냥 학생 앉아. 남의 집 귀한 자식 괴롭히면 안 되지.”

“위험해요. 어디 안 도망갈 테니 앉으시라고요. 그리고 이미 괴롭히고 있거든요?”

꾹꾹.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를 강제로 앉혀 버렸다.

“일단 물어는 볼게요.”

어머니는 집에 1차 시험 합격 통지가 날아와서야 내가 사법 시험을 본 사실을 아셨다.

당시에 일부로 숨긴 것은 아니었다.

깜짝 선물을 해드리려 했으니까.

― 이게 뭐야 치우야?

웃음과 울음을 같이 보이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난다.

― 검사가 되고 싶어요, 엄마.

― 아이고∼ 우리 아들 진짜 장하다 장해!

끝은 당연히 활짝 피어 있는 웃음꽃.

하지만 어쨌거나 시험을 보기 전까지 알지 못하고 계셨으니, 어머니가 나에게 기도를 한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저 어떤 액션이라도 취해야 아주머니가 편히 돌아가실 것 같은 생각에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 응, 아들∼

“엄마, 혹시 1차 시험 말고 오늘 제가 볼 2차 시험 때문에 기도하신 적 있어요?”

― 그럼∼ 당연히 했지. 그리고 굳이 시험 때문이 아니라도 건강하라고, 좋은 친구들 만나라고, 좋은 여자 만나라고, 얼른 돈 벌어서 우리 아들이 원하는 거 다해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게 엄청 많아서 문제지. 호호호.

“엄마…….”

뚝.

눈에서 흐른 눈물이 아주머니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 왜 그래 치우야? 시험 잘 못 봤어?

“아니요. 너무 잘 봤어요.”

― 목소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너무 좋아서 그런 거예요. 금방 갈게요, 엄마.”

― 그래! 치우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 놓을게.

탁.

전화가 끊겼음에도 아주머니는 침묵을 유지했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내 모습에 말을 걸기 미안해서일까?

아니.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자식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서 일 것이다.

“아주머니. 아까 제가 잘못 말한 거 같아요. 어머니가 기도한 거 맞네요.”

“그래. 그래서 울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1차 2차를 떠나서 모든 시험이 합격할 수 있던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지은 죄를 갚을 수 있던 이유도 어머니의 기도였으니까.

“기도를 어디서 하는 게 중요하진 않아요.”

“나도 알어. 답답하니까 글치! 답답하니까!”

“아주머니 아드님도 꼭 합격하실 겁니다. 아주머니가 절실히 기도하고 계시잖아요.”

어쩌면 아주머니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은 정답이 아니라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삑―

“전 내릴게요.”

“고마워∼”

“뭐가요?”

원하시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치익―

이내 버스 뒷문이 열렸고, 나는 뒤돌아 물었다.

“덕분에 힘이 나네!”

“하하하. 나중에 봬요.”

“나중에?”

“혹시 모르잖아요. 아드님이 합격하면 저랑 연수원 동기가 될지.”

부우우웅!

떠나가는 버스 창문에 아주머니의 미소가 보였고, 덕분에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저기 온다!”

“아오… 산 너머 산이네.”

집 앞에 몰려 있는 언론사들의 모습.

나는 결국 없는 체력에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서야 겨우겨우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 좋다∼”

그래서인지 집 근처에서 풍겨 오는 된장찌개 냄새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오래된 빌라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가까워지는 냄새와 온기.

바닥나 버린 체력이 벌써부터 회복되는 듯했고, 삐걱거리는 문이 평소보다 더욱 가볍게만 느껴졌다.

“다녀왔습니다!”



***



강철호 검사장님 : 치우, 네 법복은 내가 직접 다려서 임관식 때 입혀 주마.

성훈이 : 와! 내 친구 최고! 난 네가 사랑스러워… 아니, 자랑스러워!

방영호 회장님 : 입고 싶었던 법복을 생각보다 더 빨리 입을 것 같구나.

어머니 : 우리 아들 파이팅!

태호 삼촌 : 워메∼ 이 꼬맹이 결국 일을 내뿔었구만!

010-XXXX-XXXX : 저, 박민호입니다. 오케이 흥신소 사장… 파이팅…….

019-XXX-XXXX : 가문국밥 아저씨야. 엄마랑 국밥집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고 와

011-XXX-XXXX : 학생주임이야. 성훈이한테 네 번호 허락 없이 받았어. 미안했다. 진심으로…….



3차 시험인 면접 당일.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오른쪽 주머니가 뜨거워질 만큼 말이다.

사실 사법 시험은 2차가 끝이라 봐도 무방했다.

3차는 면접이라기보다는 예비 법조인이 될 사람과 법조계 인사들의 상견례 같은 자리이니까.

더군다나 1차와 2차 시험 전부 압도적인 점수로 수석을 차지한 나를 이유 없이 떨어트린다면 오히려 공격을 받는 쪽은 면접 위원들이 될 터였다.

“11조 들어오세요”

내가 속한 조가 불리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조 마다 다른 위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내가 속한 조에는 교수와 지청장 그리고 부장판사가 있었다.

다른 조도 커리어가 화려한 면접 위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내가 속한 조는 그 화려함이 더 컸다.

“이야∼ 말로만 듣던 한치우 학생을 여기서 보내.”

“하하하, 그러게요. 이제 학생이 아니라 사법연수생으로 불러 드려야 하나?”

“내가 치우 학생 시험지 채점한 교수로서 말하는데 검사보다는 판사가 나을 것 같은데. 아니면 천재?”

“하하하하하.”

교수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합격증을 받은 기분이었다.

같이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무안해질 만큼 질문은 나에게만 쏟아졌으니…….

물론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불합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듯 이 자리는 상견례이며, 가장 관심 있는 사람에게 질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요. 모두 수고하셨고 앞으로 훌륭한 법조인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합격증보다 더 확실한 면접 위원들의 웃음을 들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 볼까?”

조금은 크게 말한 것 같다.

시험장 문밖으로.

아니, 그보다 더 넓은 곳을 향해.



[한치우, 47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