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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민태호와 전화를 끊은 지 30분이 지났다.

전화를 끊은 뒤로 계속 건물이 있는 곳을 살폈지만, 조금 전 보스로 보이던 남자가 떠난 뒤로는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만 있어 주면 좋겠는데.’

하나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곧장 건물에서 남자 둘이 나왔다.

급히 몸을 숨긴 나는 놈들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 어디로… 에이, 씨발.”

두 사람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낮은 목소리로 떠드는 탓에 간간히 한 단어씩만 들려왔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놈들에게 다가가 얘기를 엿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몸을 숙인 채 천천히 움직였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몸을 숨길만한 건축 자재들이 꽤 있어 조심하면 들킬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다다다.

담배를 문 녀석 뒤로 단정한 슈트를 차려입은 녀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왔다.

‘지금 있는 사람들 중에선 이 남자가 가장 높은 거 같네. 아까 말한 그 박 실장인가?’

새롭게 나온 이들 중 맨 앞에 있는 남자가 우두머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희한하게도 이자가 박 실장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 회장 아들 슬슬 옮겨야겠다.”

“어디로 옮길까요, 형님?”

“작업장으로.”

작업장?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있던 나는 쌓여 있는 건축 자재들을 방패삼아 꾸준히 놈들과 거리를 좁혀 갔다.

“작업장이면?”

“그래. 월요일에 작전 모두 끝나면 방 회장 아들은 작업한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준재벌 2세입니다. 괜찮을까요? 게다가 방회장은 민태호와 연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녀석들의 목소리.

녀석들의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

“큰 형님 지시야. 그리고 그냥 풀어 주는 게 더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아. 방 회장 아들 몸에 우리 증거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 테니까. 어차피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면 민태호든 뭐든 어쩔 거야.”

‘어쩌냐. 내가 이제 다 아는데.’

하지만 그 생각과는 별개로 시간은 부족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건 그러네요.”

“애들도 모여 있으니 말 나온 김에 지금 옮겨 버리자.”

“네, 형님!”

지시를 받은 녀석이 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에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보냈다.



[삼촌, 언제쯤 도착해요?]

[3분. 허벌나게 밟고 있으니 보채지 말어라잉.]



탁.

폴더폰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더 이상 내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후∼ 3분이면 뒤는 신경 안 써도 되겠지.”

그들에게 향하는 내 걸음에 분노가 뒤따랐다.

껄렁하게 모인 조폭들에게 향하는 걸음에 말이다.

“뭐냐, 이 꼬맹이는.”

녀석들의 겉모습만 본다면 살집이 조금 있는 회사원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시선에는 녀석들이 회사원처럼 보이기 위해 걸친 몇 가지 물건들이 보였다.

무식함을 가리기 위한 단정한 슈트.

조직폭력배라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달아 놓은 회사 배지.

아마 이맘때쯤인 걸로 기억난다.

깡패들이 신분을 숨기고 사회로 나오기 시작한 게.

근본 없는 주먹과 몰려다니며 겁을 주는 것이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과거의 민태호에게 들었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불법을 저지르고 연장이 아닌 마우스를 손에 쥐었지만, 선량한 사람들의 돈을 약탈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사람은 말이야,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돼. 그것 때문에 내가 우리 애들 양복 어울리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한 지 알아?”

총 맞을 정도라는 말은 삼켰다.

“뭐라고?”

“수의 입던 몸에 양복 걸친다고 뺑끼(변기)냄새가 빠질 리가 없잖아?”

내 말에 우두머리 옆에 있던 조무래기가 나섰다.

“하하하. 어린놈이 학교 나오는 영화 좀 봤나 본데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뒤질라고.”

“보긴 봤지.”

스크린이 아닌 내 눈으로 집적 말이야.

10년 가까이 경험도 해 봤고.

“꼬마야 까불지 말고 가라. 무서운 형들한테 혼나기 싫으면.”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는데?”

과거로 돌아오기 전 한치우 이사의 눈을 마주치치도 못하던 너희 같은 놈들을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

“무시해. 어디 학교 일진 같은데.”

“예, 형님.”

“뭐라고?”

“아, 아니, 팀장님…….”

녀석들은 회사원인 척해 보려 고등학생의 비아냥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것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어이∼ 쓸데없는 얘기 그만 하고. 방성훈 어딨어?”

나를 무시한 채 오고 가는 대화 속.

그 한가운데로 성훈이의 이름을 던졌다.

그리고 성훈이의 이름은 감추고 있던 녀석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치이익―

성훈이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일제히 담배를 짓이겨 껐고, 내게 모두의 관심이 다시 쏠렸다.

“너 방 회장 아들 친구야?”

우두머리의 말에 눈빛을 쏘아 대며 거리를 좁혀 오는 녀석들.

“뭐가 됐건, 그냥 가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이윽고.

내 뒤가 녀석들에 의해 막혀 버렸다.

“어차피 그냥 갈 생각 없었는데 말이야.”

내 뒤를 막은 녀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가 납치한 방성훈 어디 있냐고. 두 번 묻게 하지 마. 너희는 꼭 그러더라. 대가리가 딸려서 그런가? 왜 한 번에 못 알아들어.”

“못 알아듣긴, 아주 잘 알아들었어.”

“형님,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이놈은 내가 직접 봐야겠다.”

언제나 그러듯 서열에 의한 자리 배치가 완성되고 앞줄에서 들려올 명령을 기다리며 인상을 쓰는 녀석들이 보였다.

“네가 여기 대장이야? 아까 말한 박 실장은 아닌 거 같고.”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자꾸 묻지 마. 사람 아닌 것들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나도 어차피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친구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게.”

휙.

녀석이 손짓하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원이 점점 좁아진다.

“잡아서 묶어 놔.”

“네, 형님!”

부우우웅!

원이 좁아질수록 긴장은커녕 미소가 지어진다.

멀리서 이 원을 다시 넓혀 줄 엔진 소리가 들려오니까.

“뭐야 저거?”

“뭐긴, 너희를 감쌀 더 큰 원이 생긴다는 소리지.”

“뭐?”

끼이이이익―

고급 세단을 기준으로 일렬로 멈춰지는 승합차들.

“워메∼ 얼라 한 명 잡으려고 많이도 모여 있네잉.”

“설마… 서울연합파 민태호?”

의아해하는 조무래기들과 달리 맨 앞줄에 서 있던 놈은 민태호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

“그려∼ 겁도 없이 내 나와바리에서 우리 조카 잡아갈라는 겨?”

피식.

민태호 입에서 조카라는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들아∼ 우리 조카 오줌 지리기 전에 챙겨 뿔자.”

탁! 탁! 탁!

순식간에 수많은 민태호의 식구들이 나를 감싸고 있던 원을 더 크게 감싸 버렸다.

“얼굴 성한 거 보니께 늦은 건 아닌 거 같구만.”

“딱 맞춰 오셨네요. 진짜로 오줌 지릴 뻔했는데.”

“오양호 배때지에 칼 들어가는 거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걸 내가 봤는디, 무슨 그런 되도 않는 말을 해 쌌냐.”

스윽.

나를 감싸고 있던 원은 어느새 구멍이 뚫려 버렸고, 나는 구멍을 통해 민태호의 옆으로 향했다.

“일단 상황 보니께 잘 온 것 같긴 헌데… 나가 오양호 사건 이후로 결심한 것도 있고, 우리 아그들 괜히 피 보게 하기도 좀 그려. 일단 너 구했으니 겁이나 주고 물러가는 건 어뗘?”

민태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검찰 마크가 새겨진 HH 코퍼레이션 주주 정보를 바라봤다.

“꼬맹이 니는 이미 강 검사장 명함도 쓴 것 같은디, 나는 그냥 넘어가자고.”

이유.

민태호가 힘을 쓸 이유는 이미 충분했다.

방영호 회장은 나뿐만이 아니라 민태호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좋게 말하면 후원자, 나쁘게 말하면 스폰인 방영호 회장.

그의 아들이 납치당했으니, 만약 민태호가 엄청난 악인이라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들이 방 회장님 아들을 납치했습니다.”

“뭣이여?”

이미 민태호의 지갑 속에 방영호의 명함은 있겠지만, 받을 수 있는 것은 명함만이 아니다.

“저 건물 속에 잡혀 있고요.”

내 말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건물 속에서 두건을 뒤집어 쓴 성훈이가 녀석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왔다.

“성훈아!”

성훈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뛰었다.

“막아!”

퍽!

나를 막으려 달려왔지만 민태호가 데려온 식구들에 의해 막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턱에 주먹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어떻게…….”

“비켜! 뒤지기 싫으면!”

죽일듯한 눈빛으로 녀석들을 쳐다보자 녀석들이 주춤했다.

내 살기도 있겠지만, 그보단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민태호가 더 무서웠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훈이를 들고 있던 팔에 힘이 풀리자 성훈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탁.

“성훈아 괜찮아?”

빠르게 뛰어간 나는 성훈이의 팔을 잡고 불렀지만, 성훈이는 희미한 숨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조금만 참아…….”

피에 굳어 딱딱해진 교복을 꽉 잡고서 몸을 돌려 뒤를 봤다.

휙.

“삼촌, 성훈이 좀요.”

“그려. 야들아 방 회장님 아드님 챙겨서 병원 데리고 가라, 빨리!”

부우우웅―

성훈이가 차에 실려 병원으로 떠났지만, 민태호도 나도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되것다. 이참에 너희 간판 내려 뿔자.”

휙.

민태호의 손짓에 모든 식구들이 연장을 움켜잡았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모두의 손이 올라갈 때 건물 속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

“이건 뭔 일이야!”

큰 목소리의 주인 또한 똑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이 박 실장이야?”

“넌 또 뭐고? 잠깐만…….”

박 실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멀뚱히 서 있는 민태호를 바라봤다.

“민태호?”

“워메∼ 민구 아닌겨? 마이 컸네, 큰 소리도 치고. 이 얼라들이 너희 식구들인겨?”

“이런 씨발!”

다다다!

민태호가 말하자 겁에 질린 채 미친 듯이 달려 근처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부우우웅―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민태호와 대적할 수 없다는 걸.

“뭐해요 삼촌! 얼른 타세요!”

하지만 그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뭐하는 거여 지금?”

나는 빠르게 움직여 민태호가 타고 온 차량에 올라탔다.

“잡아야죠!”

탁.

얼떨결에 조수석에 올라탄 민태호가 손잡이를 꽉 잡는다.

“워… 꼬맹이 니 면허는 있는 겨?! 아니지… 있을 리가 없을 텐디!”

“운전할 줄 압니다. 꽉 잡으세요.”

지금의 내 나이보다 면허를 가진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