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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끼익―

황희석 박사와 쉽게 독대하지 못할거란 내 생각은 불행히도 맞아 버렸다.

[박사님! 저희는 박사님을 응원합니다!]

아직도 홀려 있는 사람들.

[희대의 사기꾼 황희석 박사는 사퇴해라!]

자신이 홀렸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내는 사람들.

그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HH 코퍼레이션 사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고, 황희석 박사는 사옥 안에서 자신이 만든 두 부류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해산하세요!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기 싫으시면!”

거기에 황희석 박사를 지키는 경호원들까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문제는 저 아수라장을 뚫고 황희석 박사가 있는 사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HH 코퍼레이션 주주 정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손에 들려 있는 서류와 회귀하기 전의 기억뿐.

“이걸 보여 준다고 문을 열어 주지는 않을 텐데.”

또한 저들과 다른 기억이 있다고 해도 겉모습은 일개 고등학생일 뿐이다.

눈앞에 보이는 아수라장을 뚫고 사옥 안에 있을 황희석 박사에게 내 뜻을 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잉―

[회장님, 미얀마 출장 스케줄은 말씀하신 대로 취소했습니다.]

고민이 깊어 갈 때쯤 주머니 속 진동이 좋은 방법을 가져다줬다.

“이건…….”

내가 가져온 것은 주주 정보뿐만이 아니었다.

“맞다. 방 회장님 휴대폰.”

굳이 아수라장을 뚫지 않아도 황희석 박사에게 내 뜻이 전해지게 해 줄 수 있는 물건.

내 눈에는 다소 초라한 보안을 가진 옛날 휴대폰이었지만,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가.

유추 가능한 네 자리 숫자만 알면 되니까 말이다.

“성훈이 생일이 뭐였더라…….”

회사 이름부터가 아들에 대한 사랑인 아버지가 가진 휴대폰 비밀번호 네 자리는 빤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추측은 딱 들어맞았다.



[황희석 박사]



주소록에서 간결하게 적힌 이름을 선택했다.

뚜르르르.

딸깍.

― 참, 양심도 없으십니다. 어떻게 저한테 전화할 생각을 하십니까?

목소리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방영호 회장이 자신에게 전화할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고, 황희석 박사가 성훈이를 납치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안녕하십니까, 황희석 박사님.”

― 응? 방 회장이 아니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옥 입구 좀 열어 주십시오.”

― 방 회장이 온다고 해도 문을 꼭꼭 걸어 잠글 판인데. 방 회장 휴대폰을 가진 의문의 남자한테 문을 열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문을 부수고 싶지 않아서요.”

― 뭐?

방영호 회장이 언론에 발표해 버리는 바람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황희석 박사에게는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검사가 상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여유롭게 웃고 계시겠지만 재판에서는 늘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도 하죠.”

― 하하하, 이제 별것도 아닌 놈들까지 나를 물로 보네.

황희석 박사에게 불법으로 실험용 난자를 제공한 병원,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 입막음한 여성 연구원들까지.

사실 재판을 뒤집을 만한 증거는 차고 넘쳤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정의를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여기서 문전 박대를 당한다면 다음 방문에는 메디 병원 이사장과 퇴사 후 엄청난 돈을 받고 동남아에 가 있는 HH 코퍼레이션 여성 연구원들까지 함께 올 예정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문 부셔져도.”

― 허허허, 목소리는 어린 것 같은데 말이야. 세상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군그래. 돈으로 막아진 입은 더 큰 돈이 아니면 열리지 않는 법이야.

아니.

협박은 뒤가 구린 놈한테 더 잘 통하는 법이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 무슨 소리지?

“어려 보이는 제가 어떻게 방 회장님 휴대폰을 들고 있을까요? 입구 화단을 좀 보시죠.”

얼마 지나지 않아 꼭대기 층 외벽 유리에 황희석 박사의 실루엣이 비춰진다.

휙휙.

이내 그와 눈이 마주쳤고,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든 채 주주 정보가 담긴 서류를 보란 듯이 흔들었다.

“HH 코퍼레이션 주주들의 정보입니다. 전화번호부터 집 주소, 그리고 계좌 정보까지 모두 적혀 있죠.”

먼발치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황희석 박사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 정도는 티가 났다.

“닫혀 있는 입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에 개입할 힘 정도도 있으니 선택을 빨리하시죠. 시간 없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더 큰 돈과 권력에 굴복하는 법이다.

양심이 돈과 권력을 막아 줄 수도 있지만, 황희석 박사는 그걸 갖기 위해 양심을 팔아 버렸으니…….

― 입구에 말해 놓지.



***



“몇 살이지?”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황희석 박사의 첫 마디였다.

모든 상황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람의 나이가 기껏해야 스무 살도 안 될 것 같은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열여덟입니다.”

“뭐?!”

굳이 속일 필요는 없다.

열여덟이든 스물여덟이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호구조사 그만하시고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말하죠.”

탁!

[HH 코퍼레이션 주주 정보]

황희석 박사 앞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서 누구입니까?”

“뭐가 누구냐는 말이지?”

“박사님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누구냐고요.”

힐끔힐끔 서류를 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제가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시간이 없다고.”

“그게 어디 한두 명일까.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인가? 방 회장 때문이지.”

“하…….”

새침한 아이처럼 툴툴거리는 황희석 박사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잘 들어요.”

허나 지금은 황희석 박사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

“방영호 회장님 아들이 납치됐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새침하던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었다.

“방 회장님은 아들을 매우 사랑하시죠.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몇천만 원을 들여 법인 명을 아들의 이름으로 바꿀 정도로.”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다 자기 업보…….”

“그 업보에 대한 분노가 어디로 향할 것 같습니까?”

“어?”

어른은 다시 겁에 질린 아이가 되었다.

비록 경기도 한적한 곳에 살고 있고 글로벌한 규모의 기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쨌건 한 그룹 수장의 분노.

황희석 박사가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방영호 회장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설령 막아 낸다고 해도 꽤 고통스러울 것이다.

“선택하시죠. 협조하고 분노의 방향을 돌릴 것인지. 아니면 그 분노를 박사님이 정면으로 맞이할 것인지.”

눈빛은 이미 결정을 마쳤다.

하지만 서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

“사실…….”



[미래 인베스트먼트]



황희석이 서류 속 하나의 이름을 가리켰다.

“줄기세포 논문이 발표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연구소를 찾아왔었지.”

“그런데요?”

“처음에는 단순히 줄기세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투자 회사 대표라 하더라고. 그런데 이상한 건…….”

“이상한 건?”

“외모에서 책 냄새가 풍겨 오지 않았어.”

비록 나쁜 쪽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황희석은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은 공부 벌레였다.

책 냄새를 평생 맡으며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그 냄새가 익숙할 것이었다.

“그 사람이 200억을 투자하고 싶다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얼씨구 좋다 했지. 뭐가 됐든 그런 거금을 투자한다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잖은가.”

그래서.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거짓 논문으로 200억을 투자받은 사실이?

“누가 양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니. 그때는 정말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어. 하지만 실험 결과는 매번 실패였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변한 게 그때였을지도 몰라.”

아니. 변명일 뿐이다.

200억이라는 투자금에 판 거지. 당신의 양심을.

“그래서 일단은 투자를 보류해 달라 말했더니,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뭐라고 했는데요?”

양심을 팔던 순간이 떠오르는지 비릿한 미소와 함께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댄 황희석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박사님의 줄기세포가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다고.”

휙.

그 모습이 보기 싫을 뿐더러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협조가 되었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방 회장한테 잘 좀 전달해 주게.”

드르륵.

대표실의 미닫이문을 반쯤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박사님. 재판 준비는 철저히 하셔야 할 겁니다.”

“뭐? 얘기가 틀리지 않는가!”

거짓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우롱한 당신도 당해 봐야지.

간절히 믿고 있던 게 누군가의 거짓이었다는 걸.

“사실 저도 상관없었습니다. 박사님이 협조를 하든 안하든.”



***



끼익―

“나중에 택시비 정도는 주겠지?”

점점 홀쭉해지는 동전 지갑을 보며 푸념했다.

“여기 맞는데.”

주주 정보 속 주소를 한참이나 쳐다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의도가 아닌 것은 그렇다 쳐도 투자회사가 있기에는 너무나 허허벌판인 이곳.



[제2신도시 개발예정구역]



이제 곧 높고 화려한 건물이 지어질 것 같은 그런 곳.

지갑이 홀쭉해질 정도로 먼 거리를 온 탓에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작은 상가 하나가 전부였다.

“번듯한 건물하나 없는 투자회사가 200억을 던졌다? 떳다방은 아닌 것 같은데…….”

[미래 인베스트먼트]

건물 가까이에는 몸을 숨길 곳이 없는 탓에 멀리서 입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간간히 덩치가 제법 되는 남자들이 드나드는 것이 곧 눈에 띠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황희석의 말대로 멀리서 보아도 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한 사람들이 말이다.

“월요일에 장 열리면 성일 바이오를 돈 되는대로 전부 매수하고, 내가 전화하면 한 번에 몽땅 던져.”

“네, 형님! 알겠습니다!”

“이번엔 실수하지 말라고 박 실장한테 단단히 일러둬. 이번에도 실수하면 우리 전부 산 채로 묻히게 된다. 알았어?”

“네, 형님. 들어가십시오!”

탁!

열린 차량 뒷문에 대고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말하는 한 남자.

너무나 익숙한 장면과 너무나 익숙한 생김새였다.

“범인이…….”

차량의 문이 닫히고 차는 출발한다.

허리를 핀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려는 순간, 소매 끝에 살짝 보이는 문신.

“대가리 쓰는 건달이었네.”

어질러져 있는 머릿속 방이 정돈되고, 누가 방을 어지럽힌 건지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방영호 회장님, 아니, 나한테 계획이 말려 버렸으니 언제나 그러듯 건달 짓을 한 거고.”

HH 코퍼레이션을 이용해 주가조작을 하려고 하던 조폭들이 나 때문에 계획이 어긋나 버린 탓에 작전에 써 버린 돈을 몽땅 날렸으니, 다른 종목을 하나 골라 복구를 하려 한 것이다.

“휴… 대가리를 잘라야 되는 거야 아니면, 건달 짓하는 몸뚱이를 잘라야 되는 거야.”

방 회장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녀석들은 성훈이를 납치해 방 회장의 돈을 움직이려 한 것이다.

아무 죄 없는 겁 많고 순수한 아이를 이용해서 말이다.

쾅!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쌓인 건축자재에 풀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워메∼ 꼬맹이 아닌겨?

무엇을 자르든 확실하게 잘라 주마.

“삼촌, 이번엔 제가 국밥 한 그릇 대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