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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띵동∼

“한치우입니다.”

띠―

이제는 내 이름 세 글자만 말해도 드나들 수 있는 대문이 열린다.

그래.

순서대로 가자.

“연락도 없이 반가운 얼굴이 찾아 왔군. 성훈이는 지금 나가 있으니 내게 무슨 볼일이 있나 본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방영호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하다니?”

“반가운 얼굴이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일단 들어오게.”

나에게 건넨 웃음을 받아 주질 않자, 방영호 회장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얘기인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일단 서재로 가지.”

서재에 도착하자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방영호 회장이 진중한 눈빛을 보냈다.

“그게…….”

분명 전해야 하는 사실이었지만, 입이 무겁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내가 일조한 부분이 있다는 게 말이다.

“성훈이가… 납치된 거 같습니다.”

내 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이거…….”

기다릴 시간이 없기에 성훈이의 마지막 문자가 담긴 깨진 휴대폰을 방영호에게 건넸다.

[도와줘 치우야!]

“판자촌에서 발견한 겁니다. 마지막 문자를 보낸 곳도 거기고요.”

쾅!

“누가 감히 내 아들을 납치해!”

방영호 회장의 분노가 책상으로 전해졌다.

들을 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요동쳤다.

“증거는 없지만 심증이 확실한 범인은 있습니다.”

“하…….”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리고 머리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쉬는 방영호.

내 입에서 나올 황희석 박사의 이름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줄기세포 투자 철회 건]

[동현바이오 투자 수익률]

방영호 회장이 서재 테이블에 있는 보고서들을 보며 말했다.

“일 저지르고 아들 못 챙긴 내가 죄인이지.”

“대신 제가 반드시 성훈이를 찾겠습니다. 회장님의 소중한 아들이기도 하지만 제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올 것이다.

성훈이의 신호가 방영호 회장에게로.

그게 내가 이 집을 가장 먼저 찾은 이유니까.

“결국 돈 때문인가? 아니면 나에 대한 복수?”

“범인은 회장님에게 원하는 걸 곧 전할 겁니다.”

나는 방영호 회장에게 전해진 신호를 타고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신호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성훈이에게 가까워질 것이 분명했다.

지잉―

“이런 씨발!”

쾅! 쾅! 쾅!

휴대폰을 열어본 방영호 회장은 이성을 잃었다.

책상을 마구잡이로 내리치며 휴대폰을 던졌고, 던져진 휴대폰 속 문자가 보였다.



[가지고 계신 동현 바이오 주식을 전부 팔고, 성일 바이오의 주식을 전량 매수하십시오. 그럼 아드님을 무사히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드님이 많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성일 바이오?

뭐지?

납치범이 원하는 걸 전해 들었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자 속에는 분노와 황희석 박사가 보이지 않으니까.

“회장님!”

쾅! 쾅! 쾅!

“방영호 회장님!”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리고 자수성가한 회장이여도 결국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다.

평정심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아도 쉽게 이성을 찾지 못했다.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방영호 회장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성일 바이오가 황희석 박사와 관련 있습니까?”

“…아니.”

겨우 이성을 찾은 방영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회장님 말고 황희석 박사에게 투자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 말고도 여럿 있지. 그때는 모두가 홀려 있었으니까.”

생각이 짧았다.

방영호 회장에게 분노를 느낄 만한 사람은 황희석 박사뿐만이 아니다.

HH 코퍼레이션.

황희석 박사가 대표이사로 앉아 있는 기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투자했고, 방영호 회장은 투자 철회와 논문 조작 증거를 언론에 발표했다.

“제 심증이 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일로 투자자들의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으니.

“뭐?”

“정확히 말하면 심증은 같지만, 범인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 같습니다.”

휙.

범인의 신호가 담겨 있는 방영호 회장의 휴대폰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만 빌리겠습니다, 회장님.”

“…알겠네. 일단 경찰에 알리지.”

“경찰보다 더 빠른 곳이 있습니다.”



***



서울 서부 지검.

정문을 지나 꼭대기 층까지 올라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보안 요원부터 검찰 직원들과 검사들까지.

내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다.

지검장실로 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관문을 거쳐야 했고, 지검장실에서 내려온 명령은 그 관문들을 거치지 않고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바로 탈 수 있게 해 주었다.

일개 고등학생이 지검장실을 방문하는 것도 의아한 일인데 지검장이 직접 전화를 돌렸으니 내가 궁금할 법도 하다.

똑똑.

“지검장님, 말씀하신 한치우 님 오셨습니다.”

― 들여보내.

문을 열어 주는 비서 역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지검장 실로 들어가자 탁 트인 마포구의 전경이 보였고, 강철호 지검장이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미안하네. 먼 걸음 오게 해서. 지금 보자고 하면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이해해 주게나.”

“아닙니다. 시간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조금 이따가 회의가 있어서 시간을 별로 낼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럼 빨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윽.

HH 코퍼레이션 투자자 명단.

“말로 해도 되네. 내가 내 방의 소리도 못 지킬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강철호 지검장이 자신의 앞에 조심스럽게 놓인 메모지를 보며 말했다.

“투자자 명단이야 인터넷만 봐도 대충 나올 텐데. 그걸 네가 모를 리가 없고…….”

“투자자의 정확한 신상 정보가 필요합니다.”

“친구가 위험하다는 그 일인가?”

“네, 맞습니다.”

쉽지 않은 부탁에 고민하는 강철호 지검장.

“방영호 회장님을 아십니까?”

“성훈산업 방영호 회장?”

“네. 방영호 회장의 아들이자 성훈산업에 성훈이가 위험하다는 제 친구입니다.”

스윽.

말과 함께 방영호 회장의 휴대폰을 강철호 지검장에게 건넸다.

“납치?”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강철호 지검장.

“네.”

“정리하자면 황희석 박사 논문 조작을 발표한 방영호 회장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네 친구를 납치했다는 말인가?”

“네, 정확하십니다.”

“신고는?”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 아시지 않습니까.”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수사가 시작되고, 또 수사 과정에서 필요한 영장이 검찰에서 발부되기까지의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사장님.”

소파에서 일어나 강철호 지검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흠, 난감하군.”

고개를 숙이는 것 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겁 많고 내성적인 성훈이.

지금의 1분이 성훈이에게는 1년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HH 코퍼레이션은 황희석 박사가 대표로 있는 회사일 테고… 주주 신상은 왜 필요한 거지?”

“그 안에 있을 겁니다. 제 친구를 납치한 사람이.”

“흠…….”

“하나밖에 없는 친구입니다. 돈에 욕심 없으신 거 알지만 방영호 회장님한테 마음의 빚 하나 만들어 놓으셔도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나로 인하여 벼랑 끝으로 향하던 뱃머리는 돌아갔다.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업입니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주주 명단을 알려고 하는 순간 기록이 남으니까.

그렇다고 내 부탁을 거절하기 또한 부담스럽다.

꽤 솔깃한 말을 전했으니까.

“기다려 보게.”

스윽.

접견용 소파에서 일어난 강철호 지검장이 전화기가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삑―

― 네, 검사장님.

“황희석 박사 사건 담당하던 지검이 어디지?”

― 중앙 지검입니다.

“알았어.”

인터폰 너머 비서의 말을 들은 강철호 지검장은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하하. 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강철호 지검장은 입은 웃고 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네. 다름이 아니라, 곤란한 부탁을 하나 드리려 합니다.”

통화 속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중앙 지검에 전화를 해 선배님이라 부를만한 사람은 아마 중앙 지검장일 테고, 그 사람은 이번에 차기 검찰총장이 될 사람이다.

그리고 차기 검찰총장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한 적이 있으니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닐 것이었다.

“황희석 박사 사건 수사자료를 하나 보고싶어서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하는 강철호.

그런 강철호를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삑.

― 하하. 자네가 나한테 부탁을 다 하고 오래 살고 볼일이네.

“대검 건너가시면 중앙 지검에서 열심히 총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강철호가 전화기 버튼을 누르자 통화 속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나 보고 들으라는 거겠지.

이걸로 오양호를 잡아 준 빚을 전부 까고 싶은 거겠지.

― 그래. 나도 강 지검장 같은 후배가 뒤에 있으면 좋지. 원하는 게 정확히 뭔가?

“HH 코퍼레이션 투자자들의 신상 정보입니다.”

책상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강철호가 시선을 나에게로 보내며 입으로는 중앙 지검장과 통화를 한다.

― 그래. 팩스로 보내지. 그리고 이제 자네를 경쟁자가 아닌 후배로 생각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네.”

― 하하하! 알았네. 그럼 나중에 만나서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탁!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는 강철호.

“휴∼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지 목소리만 들어도 몸에 소름이 돋네.”

“감사합니다.”

“고맙긴, 이제 너한테 진 빚은 얼추 다 갚은 거 같은데.”

나를 바라보는 강철호의 얼굴이 낯설다.

그 어떤 외압에도 굽히지 않고 실적과 검사라는 프라이드 하나로 살아온 인물이 자신도 아닌 남 때문에 자존심을 굽혔으니, 나를 향한 미소가 사라질 법도 하지.

“네. 다 받은 거 같습니다. 다음에 찾아 뵐 때는 저도 괜찮은 선물을 하나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괜찮은 선물이야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앞으로 벌어질 강철호의 앞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지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꾸벅.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기대해 보마. 나가서 비서한테 자료 받아가고.”

쾅.

지검장실 문이 닫히기 전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강철호의 표정이 보였다.

선물을 기대하기보다는 도저히 굽히지 못할 것 같던 차기 검찰총장에게 굽힐 이유를 내가 만들어 줬으니, 본인의 자존심에게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다.

핑계가 생긴 자존심은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보이게 한 것이고.

“참, 누가 누구 보고 능구렁이래.”

“네?”

“아닙니다.”

팩스를 보고 있던 비서가 내 혼잣말에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잘 정리된 서류를 봉투에 담아 건네는 비서.

팩스에서 인쇄된 지 얼마 안 돼 따듯한 서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서류가 식기 전에 성훈이를 찾고 싶었다.



[HH 코퍼레이션 주주 정보]



분명 이 안에 있을 것이다.

내 친구를 고통 속에 가둔 놈이.

고통의 시작이 여기 담겨 있으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서류를 받아들고 서둘러 지검을 나왔다.

금요일 퇴근 시각.

한 주간 자신을 옥죄던 넥타이를 풀어헤친 샐러리맨들이 무리지어 회사를 벗어나고 있었다.

“택시!”

방영호 회장은 월요일 주식 시장이 열리는 순간 범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답을 보냈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샐러리맨들이 월요일 아침 다시 넥타이를 맬 때까지 성훈이를 찾아야 했다.

탁.

“HH 코퍼레이션 본사로 빨리 부탁드립니다.”

부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