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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늘 어머니에게는 몇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다.

생전 시장을 찾아오지 않던 아들이 웃으며 자신을 찾아왔고, 시장 상인들이 나만 보면 미소를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치우야, 내가 모르는 네 삼촌이 있어?”

“친한 친구 삼촌인데. 저도 자주 봐서 삼촌이라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건물 1층 점포가 비어 있어서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 찾아왔습니다.”

“네? 저한테 왜…….”

상인들을 괴롭히던 흥신소 사장이 어머니의 노점에 웃으며 다가와 말도 안 되는 조건에 임대차 계약서를 내민다는 것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가 10만원?!”

나와 박민호 사이에는 어머니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고, 그렇기에 보증금은 이미 박민호에게 건넸다는 비밀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표정을 굳히며 다시금 임대차 계약서를 든 손을 내밀었다.

“…안 할래요.”

그래.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철없는 아들 탓에 조건 없는 행복을 받아본 적이 없으셨으니까.

또 그게 익숙하지 않으시니까.

더군다나 어머니의 머릿속에 있는 박민호는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고 선행을 베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가장 가까이에서 보셨기도 했고.

“아, 너무 조건이 좋아서 그러시구나! 그게 사실은 아드님이 보증금을…….”

꽈악.

박민호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아, 아닙니다! 아드님도 계시고 힘들게 노점에서 일하시는데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어차피 놀고 있는 점포라 보증금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고요.”

박민호가 내 주먹을 보고는 최대한 착한 눈으로 어머니에게 다시 말해 봤지만, 어머니 머릿속 박민호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엄마 가문 국밥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이 사람들 이제 상인들도 안 괴롭히고 불법으로 챙긴 이자도 다 돌려줬데요.”

“진짜?”

녀석들은 몰라도 아들의 말이라면 그게 어떤 말이라도 믿으시던 어머니.

“음…….”

그제야 어머니는 다시금 손을 거둬들여 임대차 계약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셨다.

사실…….

아무리 시골 시장의 작은 점포라지만, 정상적인 임대차 계약서는 아니었다.

비정상적인 내 상황과 그런 상황으로 만들 수 있던 계약서였으니까.

“엄마, 이 사람들이 착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줘 보세요.”

안 그러면 나한테 개 박살이 날 거니까.

내가 박민호를 바라보며 찡긋 한쪽 눈을 감자, 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 네! 저희 이제 상인들한테 행패 못… 아니 안 부릴 겁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게 악한 본성이건 착한 본성이건, 그 본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

다만, 어떤 강한 힘 때문에 그 본성이 숨게 된다면 깊은 곳에 갇혀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게 사실이면 너무 고맙긴 한데… 저는 그런 점포를 운영할 만한 야채 거래처도 없고…….”

“하하! 그거 역시 아드님이…….”

이 아저씨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는 캐릭터였나?

민태호 앞에선 짱구를 잘 굴리더니 내 앞에서는 왜 이러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꽈악.

해맑게 웃으며 말하던 박민호가 내 주먹을 슬쩍 보더니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네?”

“그거 역시 아드님을 봐서 제가 공급해 드리죠. 물론 첫 달 만이지만요.”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얘기하는 박민호였다.

감정이 뒤죽박죽이니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 역시 뒤죽박죽이다.

그렇다고 조울증 환자처럼 왔다 갔다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한 번 해 봐요, 엄마. 시장 사람들도 엄마 야채 좋아하잖아요.”

물론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좋은 편인 것도 있지만, 홀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에 대한 시장 사람들의 마음이 야채로 전해진 것도 있었다.

“그럼… 한 번 해 볼까? 월세도 싸고.”

“네. 저도 이제 곧 방학이니까 도와드릴게요.”

“됐어! 넌 공부해야지. 엄마가 왜 열심히 돈을 버는 건데.”

“엄마…….”

잊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해 온 모든 일은 결국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라는 걸…….

아직 돌려주기에는 현재의 내 나이가 어리다는 것 또한.

“네.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꼭 돌려드릴게요.”

“응? 뭘 돌려줘?”

“엄마가 희생한 거 모두요.”

“호호호, 나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잘 크고 공부도 잘하는 것만 봐도 모든 걸 돌려받는 기분이야.”

아니요.

제가 첫 번째 삶에서 어머니한테 지은 빚이 너무 많아서요.

“워…….”

훌쩍.

근데 박민호 당신이 왜 훌쩍거리는 건데?

“참… 보기 좋습니다…….”

어느새 모든 시장 상인들이 우리를 응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노점의 부산함에 옆 가게인 가문 국밥 사장님이 입구로 나와 우리를 바라보았다.

끄덕.

그리고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왠지 모르게 사장님의 끄덕거림을 읽을 수 있었다.

‘걱정 마. 아저씨가 있으니까.’



***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학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점포는 무사히 문을 열 수 있었는데, 시장 상인들이 발 벗고 어머니의 가게 오픈을 도운 탓이었다.

게다가 가문 국밥의 사장님은 어머니와 조금 가까워진 듯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박민호는 야채 공급뿐만 아니라 시키지도 않은 점포의 청소를 발 벗고 나서서 했다.



[사법 시험일 안내.]



갑자기 열게 된 가게 때문에 힘들 법도 한데,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나에게 조금 더 좋은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오는 웃음도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따듯한 마음 덕에 조금이나마 힘든 가게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도 있을 터였다.

그 덕분에 내 미래를 바꿀 시간이 생겼다.

엿 같던 내 미래를 바꿔야만 어머니에 웃음을 지킬 수 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네.”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했고, 안경을 벗기 위해 라식 수술을 했다.

“와∼ 우리 아들 진짜 잘생겼네.”

“수술비는…….”

“걱정 마. 엄마 요즘 돈 잘 벌어!”

넉넉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빠르게 흘러갔다.

학생이라는 신분 탓에 미래를 바꾸기보다는 미래를 바꿀 준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거울을 보면 꽤 많이 바뀐 외모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고, 불과 몇 달 전에 입던 교복의 팔다리가 한 뼘이나 남을 만큼 작아져 있는 탓에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어려서 그런가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지네.”

쭈그리지 않고 다녀서인지 아니면 운동을 열심히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닫혀 있던 성장판이 열린 것 같았다.

“개학 전에 교복 다시 맞춰야겠네.”

원래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조금 더 큰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한 해가 바뀌었고, 나 역시 조금씩 변해 갔다.

그리고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아침.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셨고, 나 역시 주머니에 사인펜 하나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이제 가 볼까.”



***



[2005년 제47회 1차 사법 시험장]



“너무 대충 입고 나왔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부터 혈기왕성한 대학생들까지.

고시장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가 두꺼운 책가방을 메고 손에는 책을 든 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머릿속에 채워 넣으려 노력을 하고 있었다.

“……?”

반면 껄렁껄렁한 추리닝 복장에 가방도 없이 손에는 딸랑 사인펜 하나만 들고 있는 내 모습.

“고시생이에요?”

“네.”

그 모습이 얼마나 신기한지 옆에 있던 고시생이 물었다.

“아… 시험 구경 오셨나보다.”

“아니요. 합격하러 왔습니다.”

“에이∼ 설마요.”

설마라니?

당신 머릿속과 내 머릿속은 사이즈부터가 달라.

“합격하면 꼭 연락하세요! 괜찮은 아가씨 소개시켜 줄게!”

시험장 입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자가 고시생들에게 명함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마담뚜.

사법 시험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들과 재력가의 딸들을 이어 주며 수수료를 챙기는 여자들.

“고시생…이세요?”

“네. 죄송하지만 명함은 필요 없어요.”

“아, 네… 저도 뭐 딱히 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휙.

그녀를 지나쳐 고시장 안으로 향했다.

몇 달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최연소 합격자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단 것을.

“후… 괜히 긴장되네.”

손에 들려 있는 사인펜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작은 사인펜 하나로 정의라는 갑옷과 기소권이라는 무기를 그릴 것이다.

물론 그린 무기를 사용하려면 사법연수원에서 도장을 받아야 하지만 말이다.



[32500014 한치우]



내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고시장 밖에서 받던 시선은 고시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구경 왔나 봐.”

절대평가 시험지로 상대평가를 하는 1차 시험.

성적에 따라 커트라인이 생기고, 최종 선발인원의 2.5배를 합격시킨다.

“자! 그럼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시험지가 나누어지자 고시생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비비며 시험을 준비했다.

슥슥.

1차 시험은 객관식이니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답안지를 OMR 카드에 옮겨 적으면 될 뿐.

금세 답안지를 다 채운 나는 그대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톡톡.

“포기하실 거면 퇴실하셔도 됩니다.”

엎드려 있는 나를 감독관이 톡톡 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포기한 거 아닙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조용히 웃으며 다시 교탁으로 돌아가는 감독관.

‘그래, 못 믿을 만도 하지.’

사실 졸린 것은 아니었다.

기막힌 성적에 혹시 모를 오해를 살까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일 뿐.

그렇게 1, 2교시가 모두 끝나고, 마지막 교시에 OMR 카드 마킹을 끝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제 포기…….”

탁.

OMR 카드를 교탁 앞에 내려놓으며 감독관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다 푼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유유히 시험실 문을 열었다.

모두 열심히 시험에 임하는 탓에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나는 느긋이 걸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여전히 고시장 입구에 서 있는 마담뚜가 보였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명함을 받아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간 고시생들의 시험 후 표정을 보고 싶은 것이다.

“역시…….”

공허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시험장 출구를 나오자, 그녀가 내 귀에 한마디를 흘려보내듯 전했다.

‘쯧쯧, 컨택 능력이 없는데 열정은 뛰어나시네.’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를 지나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주머니 속 휴대폰이 급하게 울렸다.

“응? 성훈이가 웬일이지?”

[도와줘 치우야!]

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성훈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어떠한 일에도 이리 급한 목소리를 내던 친구가 아니다.

나는 걸던 전화를 끊고, 다급한 손길로 문자를 보냈다.

―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