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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꽤 바쁜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되자, 나이에 묶여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학교가 나에게 무의미한 시간인 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힘.

그것이 육체든 정신이든 간에 말이다.

예전에는 괴롭힘에 공부를 하지 못해 집에 돌아와 멍 자국을 감추며 교과서를 들여다보아야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엿 같은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채 달라진 위상을 강제로 만끽하며 앉아 있었다.

“치우야, 뭐 봐?”

“그냥 이것저것.”

자리에 앉자마자 성훈이 반가운 듯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등교 후 책상에 앉아 영자 신문과 국내 일간지들을 읽는 아침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고, 아직 수업 종이 울리기 전이지만 신문을 읽기에는 거슬림이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반 아이들이 고3을 앞두고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서?

아니다.

복도에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지만, 내가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모두가 자리에 돌아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명선호는 이제 타깃을 바꿔 다른 아이를 괴롭혔는데, 그런 명선호마저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의 기억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들 속에서 번번히 기회를 노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보다 두꺼워진 내 팔뚝을 보고는 이내 자리를 찾아가 앉아 슬그머니 고개를 책 안으로 박아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슬쩍 쳐다보고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볼 만한 게 없네.”

신문을 읽어 내려가며 혹시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건 하등 무의미한 일일 뿐이었다.



[황희석 박사 줄기세포 논문 조작!]

[성훈산업 동현 바이오에 100억 투자!]

[서부 지검장 딸 납치 살인 사건 범인 검거!]



다만, 그런 무의미한 기사들 중 내가 만들어 낸 몇 개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한 야산에서 신고 받은 경찰이 검거했다. 정신착란 증상으로 자해한 듯 보이며, 치료감호소에 수감 중이다. 범인은 몇 달 전 서부 지검장인 강철호의 딸을…….]

자해?

훗.

자해라고 쓰인 단어의 진실을 알기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 이 사람 잡혔네? 정신병자였구나. 어쩐지… 그러니까 그런 끔찍한 짓을 하지.”

성훈이가 오양호의 기사를 보며 말했다.

“정신병이 생길 수밖에 없지.”

“응?”

내가 강철호의 집에서 들은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누군가 들었다면 다같은 생각을 할 것이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다른 사람들과 개수가 맞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갖고 있는 신체 일부분이 온전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것뿐인가?

인간이길 포기한 오양호는 이제 정신병이 걸려 성인 남자만 보면 오줌을 지리게 될 터.

그렇지 않아도 미래에 이와 비슷한 사건의 범죄자들은 정신병과 술을 핑계로 감형을 받으려고 해 왔다.

이 사건을 통해 더욱더 많은 이들이 그러한 시도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하나 내가 있는 한 그런 사건은 최대한 막을 것일 뿐더러,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거짓이 아닌 오양호와 같이 진짜 정신병에 걸리게 될 테다.

아주 끔찍한 정신병이.

딩동댕동―

이후로도 미래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몇 번의 수업 종이 울렸다.

교과서에 낙서가 늘어날 때쯤 학교에 묶여 있던 내 몸을 풀어 줄 마지막 종이 울렸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떠나려 할 때, 내 발걸음을 멈추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싸가지 없는 꼬맹이!”

커다랗고 거친 그 목소리에 아이들이 하나둘 창문으로 모여들었다.

그 탓에 나는 교실 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야 저것봐봐 조폭 아니야?”

“와… 진짜 무섭게 생겼다. 문신 봐봐.”

“근데 누굴 부르는 거지? 우리 반 보고 말하는 거 같은데.”



누구긴…….

불행하게도 나지.

“뭐여 없는 거여!”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동물원 곰처럼 남산만한 덩치를 자랑하며,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 대는 민태호를 모든 학생들이 빼꼼 하고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민태호가 계속해서 소리 지를 것 같아, 빠르게 창가로 다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여! 거 있었네!”

“후∼ 기다려요!”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돌려졌다.

전신에 문신을 하고 누가 봐도 조폭인 민태호보다 그런 조폭이 애타게 찾고 있는 내가 더 신기하기 때문이었다.

“야.”

“응?”

“체육복 좀 빌리자.”

주변을 둘러보다가 민태호와 비슷한 덩치의 한 녀석을 찾아 부탁을 하자, 헐레벌떡 뛰어가 체육복을 가져왔다.

‘표정 풀어 인마. 부탁이야 부탁.’

내 생각은 그랬지만, 뒤에 민태호가 서 있는 것만으로 부탁이 아닌 협박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그걸 트집 잡을 수도 없기에 나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다. 세탁해서 돌려줄게.”

“아니야! 그냥 가져도 돼!”

젠장, 부드럽게 말하는 데 진짜…….

나는 벌벌 떠는 녀석의 체육복을 받아 들고 교실을 나왔다.

“선호야…….”

의도한 건 아니였지만 내가 몸을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명선호에게로 몰렸고, 예전과 달리 반 아이들은 내가 아닌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개 거품을 물고 있는 명선호를 걱정했다.

“언제 나올겨! 아따 기다리다가 날 새겄다!”

“왔어요, 왔어. 거 되게 보채네.”

휙.

“이게 뭔디야.”

“창피하니까 제발 그 문신 좀 가려요.”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체육복을 민태호에게 던졌다.

“아이고, 내가 자라나는 꿈나무들한테 못 볼 걸 보여줬구마잉.”

민태호가 내가 던진 체육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멋쩍은 웃음을 내보였다.

“이제 됐냐?”

“…아니요. 문신을 가려도 조폭같이 보이는 건 똑같네.”

“이런 싸가지…….”

분명 가장 큰 체육복을 가지고 나왔는데도 민태호의 덩치를 다 담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체육복에 끼여 뒤뚱거리는 민태호를 끌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워메, 무슨 옷이 이렇게 작은겨… 힘드니께 저기 앉아서 얘기허자.”

민태호는 얼마 걷지 못하고 학교 정문 앞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교육환경보호의 관한 법률 제9조.”

“뭐래는 겨.”

“학교의 경계로부터 직선거리 200미터 범위 안에는 교육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행위 및 시설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뭣이여? 지금 내가 움직이는 룸싸롱이라도 된다는 소리여?!”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따라오던 민태호가 앉을 수 있던 곳은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편의점 앞이었다.

“워메, 괜히 왔구만.”

“그러니까 왜 연락도 없이 왔어요?”

민태호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그저 민태호나 지금의 나나,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

“방 회장님한테 돈 받으러 왔다가 꼬맹이 니가 여 있다길래 함 들려본 거여.”

“이제 서울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려. 일도 마무리 짓고, 애기들 짐도 다 쌌으니 가야제. 게다가 꼬맹이 니 덕에 강철호 그 양반 명함도 생겼으니 고맙다고 인사나 하려고 왔으야.”

남산만한 덩치를 움츠리며 쑥쓰러워 하는 민태호였다.

“하하하. 삼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긴 뭐여 감사 인사지. 뭐 고맙다고 얼라 데리고 룸방을 갈 수도 없는 기고… 어떻게 떡볶이라도 먹을 텨?”

“떡볶이는 됐고 국밥이나 한 그릇 먹어요.”



***



건달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 국밥 한 그릇 사 줄 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민태호의 말이 생각났다.



“한 이사 국밥이나 한 그릇 하러 가자고.”

“지겹지도 않아요?”



사업이 커지고 고급 레스토랑 정도는 갈 수 있을 만한 돈이 주머니에 생겨도 민태호는 서울의 한 작은 국밥집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중 절반을 나와 함께 말이다.

비록 그때의 추억이 서린 서울의 작은 국밥집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도 꽤 괜찮은 국밥집이 있었다.

“그니까! 돈을 주면 험한 꼴 안 봐도 될 거 아니야!”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곳이 지금 조금 시끄럽다는 것 정도?

“워메, 시골에는 아직도 저런 양아치들이 있는 겨?”

“그러게요.”

[가문국밥]

어머니가 자주 가시던 국밥집.

맛도 맛이지만 나를 키우며 힘들게 사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 주어 어머니에게 따듯한 국밥을 무료로 베풀어 주던 사장님이었다.

아름답던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는 탓도 있지만, 혹 어머니에게 부담이 될까봐 마음을 티 내지 않느라 묵묵히 국밥만 주곤 했다.

“원금 다 갚았는데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원금만 갚으면 다야? 이자를 갚아야지. 우리가 무슨 은행인 줄 알아?”

그런 가게가 양아치들에게 박살 나 있고, 사장님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

톡.

“저기예요.”

민태호의 팔을 톡 치며 가리켰다.

“저긴 국밥 내 줄 상황이 안 되는 것 같은디.”

“저기서 사 주세요. 맛집이거든요.”

“그라믄 밥 먹기 전에 쓰레기부터 치워야겠고만.”

“다시는 못 기어 나오게 분리수거도 확실히 하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시장 상인들을 뚫고 국밥집 앞으로 향했다.

“어이∼ 야들아. 우리 국밥 한 그릇 할라니께 비켜 보지?”

“뭐야? 이 고삐리는.”

“워메∼ 얼라랑 다닌다고 나까지 얼라로 보는 거여? 아니면 내가 그렇게 동안인겨?”

書院高(서원고)

민태호가 입고 있는 체육복에 선명히 보이는 한자였다.

물론 민태호나 양아치들이나 이 한자가 꼬부랑 글씨로 보이는 건 마찬가지일 테다.

다만, 민태호는 내가 어디서 주어 온 운동복쯤으로 생각할 것이고, 양아치들은 시골에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교의 체육복으로 보이는 것이다.

“멍청아 저 얼굴이 고삐리 같냐? 체육 선생이겠지.”

“그런가? 그세 체육 쌤이 바뀌었나 보네.”

“아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만 가라니께.”

양아치 원투가 서로 얘기를 나누는 걸 듣던 민태호가 꽉 끼는 체육복이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꼬며 말했다.

“워메, 불편해 죽겄네.”

“불편하면 벗으세요.”

“됐고만, 쪼매난 애들 쓰다듬는 건디 뭐.”

민태호가 두 명의 양아치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에게 비추던 햇빛이 사라진다.

“워… 진짜 크네…….”

덩치로는 상대가 안 되자 색도 안 입혀진 문신을 어필하려는 듯 팔을 걷어 부치고, 민태호에게 보여 주지만 민태호의 시선에서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갑자기 팔은 왜 걷어붙이고 그려? 색칠할 돈 없어서 상인들 삥 뜯는 겨?”

“그게 아니라…….”

민태호의 정체를 알든 모르든.

양아치들은 이미 민태호의 겉모습 자체를 이길 수가 없어 보였다.

“어지럽힌 거 싹∼ 청소허고, 조용히 안 꺼지면 나가 직접 여서 칠해 줄텐께 어서 결정혀.”

민태호가 새빨간 선지가 담겨 있는 뚝배기를 만지작거리며 얘기했고, 양아치들은 겁에 질려 국밥집에서 멀어졌다.

“드, 등치 믿고 까부나 본데, 너 여기 꼬, 꼼짝 말고 있어!”

“그려. 많이 데꼬 와라. 둘이서 청소하려면 힘들 것인디.”

양아치들 특성 아닌가.

힘으로 안 되면 쪽수로 밀어붙이는 게.

그마저도 안 되면 무기를 쓸 것이고.

또 그마저도 안 되면 뒤를 노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앞에 있는 민태호는 그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고, 아재요. 지금 국밥 팔 수 있겄소? 요 얼라가 여기 맛집이라카던데.”

얼떨떨한 상황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눈에 들어왔는지 국밥집 사장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치우 아니냐?”

“안녕하셨어요, 아저씨. 이쪽은 촌수가 쫌 되는 삼촌이에요.”

“아… 그렇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건달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게 얼떨떨한지 몸을 배배 꼬는 민태호였다.

“아녀라. 대신 국밥이나 많이 주소.”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대충 치우고 바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워메, 뭔 일이여 이게. 저 총각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만.”

민태호를 향해 박수를 치는 시장 상인들이 놀라워하며 칭찬했다.

이제 삼촌도 슬슬 느껴봐야지.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는 느낌을.

그리고 익숙해져야지 자신의 힘을 좋은 쪽으로 쓴다면 박수와 동경을 받는다는 것을.

그렇게 서서히 조폭 민태호는 변하게 될 것이다.

“엄마는?”

“당분간 집에서 쉬시기로 했어요.”

“다행이네. 요즘 많이 피곤해 보였거든.”

“하하.”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피곤함의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좀 쉬시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찌질한 한치우는 없으니까.

“냄새는 허벌나게 좋네잉.”

낡은 테이블에 앉은 민태호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어딨어! 그 개새끼!”

“국밥집에 있다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그리고 다시 모여드는 시장 상인들.

“워메, 동네가 좁아서 그런겨? 빨리도 왔네잉. 아야, 수저 셋팅이나 해놔라잉. 내는 밖에 나가서 저놈들 쓰다듬어 주고 올 건게.”

훗.

은근슬쩍 밖을 바라보자 낯이 익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하.”

“뭐여, 왜 웃는 겨.”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끼익―

낡은 의자를 뒤로 빼고 밖으로 향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