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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후∼ 그런 짓을 해 놓고도 살겠다고…….”

강철호가 창문 밖 마당에서 청 테이프에 묶인 채 꿈틀거리고 있는 오양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원하는 게 뭡니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뭐든 들어드리죠.”

저택 밖과 안의 온도 차이는 꽤 컸다.

말끝이 잘리지도 않았고, 향이 좋은 차가 앞에 놓여 있으며, 조폭를 벌레 보듯 하던 강철호는 민태호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지는 뭐… 앞으로 검사장님께서 지와 저희 식구들을 좋게 봐주시기만 해도 좋습니더.”

스윽.

검찰 마크가 새겨져 있지 않은 강철호의 명함이 민태호 앞에 놓였다.

마크가 새겨진 명함이든 그렇지 않은 명함이든, 결국엔 강철호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는 건 같았다.

하지만 한 전화는 공명하고 사명감이 깃들어 있는 검사장으로 받을 것이며, 다른 전화는 그와 정반대일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왜 민태호 씨를 안 잡아넣은 줄 알아요?”

“…지는 잘 모르겄습니다.”

“서울연합파가 다른 조직을 다 집어 삼키면 그때 한 번에 잡는 게 편하니까요.”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장인이 중견 기업 회장인 것 말고는 검찰 내부에 라인 없이 검사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까.

그것뿐인가?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 줬는데… 대신 내가 정해 준 울티리 안에서만 움직이세요. 울타리를 꽤 크게 쳐 줄 테니까 걱정은 말고요. 그리고 울타리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그 명함 속 번호로 전화하세요.”

“감사합니다. 근디 지는 그저 저 꼬맹이한테 돈만 받고 한 일인지라…….”

“어색한 연기 그만하시고. 장인어른 회사 스폰으로 붙여드릴 테니 시키는 일 꼼꼼히 잘 하세요.”

강철호는 주입식 교육에 능한 뇌를 가졌고, 많은 인풋을 통해 그 어렵다는 사법 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을 나 같은 어린애가 했다는 건 강철호에 뇌에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비상식이 주입된 적이 없는 뇌이니까.

“연기 아입니다.”

민태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강철호는 눈빛 속에 거짓이 없음을 느끼고는 민태호의 떨거지쯤으로 생각하던 나에게 드디어 시선을 돌렸다.

“몇 살이지?”

“열여덟입니다.”

어려 보이긴 했지만, 열여덟이라는 비상식이 강철호의 뇌에 주입되자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일의 감독이 너란 말이지? 주연도 너고?”

“네, 맞습니다.”

“하… 기가 막히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감독과 주연이 누구면 어떻겠습니까. 흥행만 하면 되는 거죠.”

나는 창밖에 있는 오양호를 바라보았다.

아마 강철호는 자신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치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 꼬맹이 보통내기가 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본다 해도 열여덟 고등학생의 생김새는 바뀌지 않는다.

다시 민태호를 힐끔 보지만, 그 역시도 내가 만든 영화 속의 배우일뿐이었다.

“그러니까 깡패 새끼, 아니지… 민태호 씨가 나랑 연줄을 만들려고 저놈을 잡아온 게 아니란 말이지?”

“둘 다 연줄을 만들려는 건 맞습니다. 다만, 검사장님이 내려 준 줄을 제가 처음 잡으려는 것일 뿐이죠.”

강철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하하하, 그러니까 왜? 민태호가 아닌, 열여덟 고등학생이 왜 내 줄을 잡고 싶어 하냐는 거다.”

“제가 곧 검사장님의 회사로 들어갈 거여서요.”

“검사가 되고 싶다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럼 공부를 해야지. 나한테 이런다고 검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고 있을 텐데.”

당연히 알고 있지.

근데 내가 필요한 건 법복을 입는 과정이 아니라 누가 내 법복을 다려주느냐다.

“걱정 마십시오. 입사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똘똘한 녀석 같긴 한데, 사법 고시는 네가 지금껏 봐오던 학교 시험과는 많이 다르단다.”

“제가 설마 검사장님의 동아줄 받을 능력도 안 되면서 내려 달라하겠습니까?”

“하하하, 네가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 주는 것도 모자라 웃음까지 짓게 만들어 주는구나.”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강철호의 눈빛이 변했다.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던 눈동자 속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 속에는 내가 비춰져 있었다.

“그래. 꿈은 크게 가지면 좋지만, 먼 훗날 얘기구나. 그때까지 내가 법복을 입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입고 있다면 너에게 아주 튼튼한 줄을 내려 주마.”

“먼 훗날 얘기였다면 검사장님을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해는 뜨고 진다.

강철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뜨다가 서서히 지게 되겠지.

그리고 내 계산이 맞다면 내가 법복을 입게 되는 그 순간이 강철호가 가장 높고 뜨겁게 떠 있을 때이다.

“내가 옷을 벗게 될 곳은 대검이다. 그 위에 자리는 관심이 없어. 그리고 대검 꼭대기로 이사할 날은 얼마 안 남았고. 설마 검찰총장의 임기를 모르는 건 아니지?”

언론에서는 유력한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강철호를 꼽고 있지만, 강철호가 대검 꼭대기로 이사하는 날은 앞으로 5년 정도는 족히 걸릴 터였다.

“2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지금 당장 법복을 입지 않는 이상 내 줄을 잡을 수 없을 텐데.”

“넉넉잡아 5년은 걸릴 겁니다.”

“계산을 잘 못하는구나.”

“저도, 검사장님도 말이죠.”

“뭐?”

언론의 동정을 받는 서부 지검장과 기수가 높은 중앙 지검장.

두 개의 이력서를 놓고 고민하던 VIP는 결국 중앙 지검장의 이력서를 채택한다.

강철호가 대검 꼭대기에 앉게 될 경우, 강철호 기수 위에 검사들은 관례상 옷을 전부 벗어야 했다.

한데 현재 수사권을 쥐고 있는 VIP는 손에서 손가락들이 잘려 나가는 게 불안했을 것이다.

애초에 강철호는 라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실적과 여론을 등에 업고 올라왔으니 VIP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대통령 인사의 입김을 불어넣는 민정 수석이 중앙 지검과 같은 학교 선후배사이라는 게 컸다.

“빨리 가시다 넘어집니다. 중앙 지검 거치고 대검으로 건너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이제 네가 내 거취까지 정하는구나.”

“정한다기보다… 검사장님도 청와대의 주인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철호는 내 말에 긴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소파에 몸을 붙였다.

“그냥 똘똘한 아이인줄 알았는데.”

휙.

강철호가 민태호를 슬쩍 쳐다봤다.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근데 네 말이 맞다고 해도 나와 넌 다르지 않겠냐? 5년은 넘게 걸릴 것 같은데 말이지. 대학 4년에 아무리 똘똘해도 고시 공부라면 몇 년은 더 해야 할 것이고.”

“저에겐 전부 생략이 가능한 시간입니다.”

내가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이지 부족한 머리 때문이 아니다.

“대학은 가야지. 대학에서 만들어진 인연이 검찰로 넘어가면 라인으로 바뀌거든.”

“꼭대기에서 내려 주는 줄을 잡을 텐데 다른 라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허허, 내가 고등학생 붙잡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우스운데 심지어 한마디도 이기지를 못하겠구나.”

스윽.

내 앞으로도 하나의 명함이 놓여졌다.

검찰의 마크가 새겨져 있지도, 그렇다고 민태호에게 건넨 명함도 아니었다.

“사무용 전화도, 민원 받는 전화도 아닌, 진짜 내 개인 전화번호다.”

“감사합니다.”

딸랑 번호만 적혀 있는 강철호의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왜냐고 묻지도 않고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네.”

“검사장님의 사람이 될 기회를 주신 거 알고 있습니다.”

“휴… 졌다, 졌어. 네가 나를 살살 녹이는구나.”

강철호의 마음이 녹아 명함이 되었고, 그 명함은 내 속주머니로 들어왔다.

“이름이 뭐라 그랬지?

“한치우라고 합니다, 검사장님.”

“하하하, 그래. 기다려 보마. 내가 줄을 던질 곳에 네가 서 있을 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가 차가워질 때가 되어서야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에서 나오는 강철호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오양호라는 조건이 없어도 내가 꽤 마음에 들었고, 그렇기에 강철호는 근처에 보이는 아무 줄이 아닌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을 줄을 골라 나에게 내릴 것이다.

“자! 그럼 각자 명함도 받았으니 나머지는 유선상으로 얘기합시다. 보다시피 시간도 늦었고 따로 해야 할 일도 조금 있어서.”

창밖의 오양호를 바라보며 강철호가 소름 돋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 나에게 보이던 미소 같은데 소름이 끼치도록 다르게 느껴졌다.

“그럼 나머지는 전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장님.”

“그래.”

강철호가 마당까지 따라나온 것은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지도 가 보것습니다.”

마당 구석 창고로 향하는 강철호의 등 뒤에 인사를 건넸다.

“아, 그래요. 전화 주세요.”

쾅.

대문이 닫히기 전 오양호의 눈빛을 보았다.

실핏줄이 터져 흘러내리는 피눈물.

살려달라고.

고통스럽다고.

그 모든 것을 눈빛으로 표현해 보지만, 청 테이프로 꽁꽁 감긴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드르르륵.

문이 닫히고 대문의 빗살 사이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쇳덩어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놈은 납치한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 속에서 지금 자신과 같은 눈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듣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워메, 저 노마가 이제 불쌍해질라 한다.”

민태호 역시 그 소리를 들은 탓에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법복을 입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니는 이 소리가 안 들리나?”

들린다. 아주 잘.

그래서 더욱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신 오양호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