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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하하, 치우가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대수롭지 않은 척.

그저 치기 어린 고등학생이 내뱉은 말이라 웃어넘기고 싶겠지만, 그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유를 안 물어봤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증거가 있습니다.”

비윤리적인 실험.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에게 거짓 희망을 심어준 사건.

“증거?”

“네. 애초에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기에는 내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듯했다.

“증거는? 증거를 보여 준다면 나도 한 번 알아보마.”

지금이야 인류 역사를 뒤바꿀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 떠들어 대지만, 시간이 지나 진실을 알고 나면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쓴 논문인 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설픈 면이 많았다.

이후, 논문 조작의 증거는 인터넷의 한 유저에 의해 밝혀지고, 난자를 제공했던 병원의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탄 발언을 해 버린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하하하, 거래를 할 줄 아는구나.”

“괜찮은 전셋집 하나 구할 돈을 빌려주십시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괜찮은 전셋집을 하나 구해 주십시오.”

“뭐?”

정보의 가치는 지불하는 대가와 비례한다.

방영호의 머릿속에는, 이 아이가 가진 패가 진짜라면 고작 전셋집이 아니라 더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패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흠, 아저씨가 조금 당황스러운데?”

“100억. 지금 성훈산업의 재정 상태를 봤을 때 거의 전부를 베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 패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확신이 설 것이다.

그저 어른 놀이에 심취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기업은 줄기세포에 곧 전부를 베팅할 예정이야.”

“일찍 찾아와 다행이네요.”

“내가 볼 수 있을까 그 증거?”

“오픈된 패에는 베팅을 하지 않는 법이죠. 증거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제 이름이 쓰인 등기부 등본을 내어 주시길 바랍니다.”



***



치우가 나가고 방영호는 서재를 떠날 수 없었다.

“흠…….”

왜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은 거지?

어째서 줄기세포가 무조건 될 거라 확신하고 있던 거지?

시골 촌놈이 탄탄대로를 달려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실패하지 않은 이유는 실패의 가능성이 없는 사업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지금껏 신념을 지키며 쌓아온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박 상무님.”

― 네, 회장님.

그래, 황희석 박사에게 홀린 것이다.

정부도, 수많은 대중도, 혹은 잘 나가는 기업인들까지.

줄기세포 투자에 말이다.

문제는 홀려 있는 이 방영호를 깨워 준 사람이 왜 하필 고등학생인 거냐는 말이다.

사실 깨워 줬다기보다는 더 강한 누군가에게 새롭게 홀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눈빛과 행동이었으니까.

― 회장님?

방영호는 수화기 속 박 상무에게 말끝을 잇지 못하며 고민을 내비쳤다.

이윽고 진중히 열린 그의 입술엔 단호함이 엿보였다.

“투자 보류합시다.”



***



증거를 수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희석 박사 논문에 실린 사진과 같은 사진이 실려 있는 다른 논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논문을 스크랩했다.

“사기를 치려면 성의라도 있어야지. 완전 복사에 붙여 넣기네.”

또 거짓이라는 사실을 못 박아 놓고 들여다보자 잘 맞춰진 퍼즐 속에 엇나간 조각들이 나타났다.

“가장 확실한 건 이사장의 증언인데.”

그렇다고 고등학생이 잘 나가는 병원의 이사장을 찾아가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토한다 해도 이사장의 말을 담아 올 수조차 없을 거고.

고등학생인 내 손에 들려 있다면 그 말은 변질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셋값 정도는 되겠지.”

다시 방영호의 집을 찾았을 때는 그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 왔구나.”

집이 바뀐 것은 아니다. 집주인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일 뿐.

“서재로 올라가자꾸나.”

두꺼워진 책가방을 눈치챈 방영호가 계단 중간쯤에서 나에게 손짓했다.

[등기필증]

보란 듯이 꺼내든 의미는 책가방 속에 있을 패를 빨리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주스 줄까?”

“커피 주세요. 그것보다 이거 먼저 보시죠.”

내가 준비한 패를 책가방 속에서 꺼내 펼쳐 보인다.

“회장님 시선에 뜨거운 커피가 목에 걸릴 것 같아서요.”

이 집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방영호의 시선은 오로지 내 가방이었다.

“신기하구나. 치우 네가 열여덟이라는 게.”

책가방이 열린 뒤 다시 방영호의 눈빛을 살폈다.

책가방을 향하던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내 모습이 비쳤고,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도, 아들의 친구도 아니었다.

삐익!

― 네, 회장님.

― 아주머니, 커피 좀 올려줘요.

인터폰에서 손을 뗀 방영호가 자연스레 서류들을 읽어 내려갔다.

“진짜 놀랄 노 자네.”

스르륵.

“이거 네가 직접 스크랩한 게냐?”

“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구식 데스크톱을 가지고 만든 스크랩 자료.

방영호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수도 없이 많이 봤을 것이다.

그런 방영호에게 조금 부족한 증거를 팔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스크랩이 아니라 PT 자료였으면 이게 몇 십억짜리 계약서라도 쉽게 사인을 할 것 같구나.”

“이제 결정하시겠어요?”

“결정은 어제 치우 너를 봤을 때 이미 바꿨고, 오늘은 바꾼 내 결정을 확신하는 자리다.”

스윽.

방영호가 등기필증을 스윽 밀어내 내 앞으로 보냈다.

“치우 네가 준비한 패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자, 내가 너에게 거는 베팅금.”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어머니에게 말하기가 그렇지?”

“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사기극에 놀아난 게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그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부의 대물림이 아닌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자리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나요?”

“이 서재에는 참 많은 사람이 다녀갔단다. 그리고 여기를 찾은 사람들과 그들의 목소리는 높은 책장에 막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지. 대신 그 목소리들은 이 책장 속 책에 수집된단다.”

“제 배경도 수집됐나 보네요.”

“미안하구나. 이번 줄기세포 투자는 나한테 중요해서 말이다. 패를 볼 수는 없지만, 패를 들고 있는 사람 정도는 알아야 내 직성이 차거든.”

척.

자리에서 일어난 방영호가 책장 속에서 하나의 파일을 꺼냈다.



[한치우 보고서]



“어제 치우 너를 보고 이 파일이 꽤 두꺼울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여백이 많더구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 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점이 끝이었지.”

아니다.

여백에는 마흔다섯 살 한치우의 인생이 새겨져 있지만, 과거로 돌아와 지워졌을 뿐이다.

지워진 여백의 무엇을 새겨 넣고 무엇을 바꿀지 결정하는 행운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방영호는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그래서 치우 너의 모습이 더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너를 설명해 줄 이력서가 없으니.”

“열여덟 살 짧은 줄에 채워 넣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학생이라 생각해 주세요.”

“하하하, 그 짧은 줄에 내가 감겨 버리다니.”

스윽.

방영호가 내 앞에 놓여 있던 등기필증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 필증은 부모님이 놀라시지 않게 다시 전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일어나는 엉덩이가 가벼웠다.

웃음을 보이실 어머니의 모습이 상상돼서.

“치우 네가 입고 있는 옷이 교복이 아니라 양복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으니 말이다.

“졸업식 때나 입겠죠.”

“그러니까 말이다. 지금의 치우 너도 내 옆에 두고 싶은데 네가 정말로 양복을 입게 되는 날까지 어떻게 참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드르륵.

“양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서재의 넓은 문이 열렸다.

“제가 입고 싶은 옷은 양복이 아니라 법복이니까요.”

치우가 나가자 방영호는 넓은 집무 테이블 위 전화기를 들었다.

― 네 회장님.

“어제 제가 한 말에 지금 보낸 자료를 대입해 보세요.”

― 혹시… 황희석 박사 논문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 말에 방영호는 한치우 이름이 적힌 보고서와 등기필증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니요. 의심이 아니라 조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



― 글쎄 그렇다니까!

평소 조곤조곤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안까지 흘러들어 왔다.

― 몰라. 새로 바뀐 집주인이 엄청 부자인가 보지. 지금 전세금 그대로 똑같이 재개발 아파트 전셋집을 내준다고 말했다니까.

다소 티가 나는 방법이었지만 방영호가 전달한 등기필증은 무사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웃으며 통화를 하시는 모습은.

― 재개발 기간 동안 거취 비용까지 내준다니까 천운이지 천운! 그렇지 않아도 이사하면 치우 학교 문제도 그랬는데, 지금 전세금으로 구할 집도 없었고…….

비록 작지만 따뜻한 보금자리의 위치는 바뀌겠지만, 여전히 나와 어머니의 온기로 가득할 것이었다.

― 우리 치우? 그럼∼ 여전히 공부 잘하고, 착하고, 건강하고, 잘생겼지. 너는 잘 지내? 못 본 지 오래됐는데.

예전에는 매일 같이하시던 친구와의 통화를, 또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어머니의 나이를 나 또한 겪고 나서야 알았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면 자기 자신의 삶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는 것을.

― 그래. 잘 지내고 치우 방학하면 같이 놀러 갈게.

이제 곧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학교 생활?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굳이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다.

조금 달라진 것은 나를 괴롭히던 명선호와 그의 무리는 내가 손만 올려도 몸을 바르르 떤다는 것과 날이 갈수록 근육이 붙는 나를 보며 이제 내가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워했다.

이 상황은 교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교감과 학생주임은 나를 보면 억지웃음을 보였고, 다른 교사들은 나를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한 명도 나에게 다가오는 교사가 없는 걸 보니 지금껏 학교 폭력 피해자 한치우에게 떳떳한 교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이미 내가 어떤 아이인지 소문이 돌아 내 성적에 자신들의 감정을 섞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학교는 미래를 계획하며 졸업장을 받기 위한 시간을 때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사시는 내년이고, 방학은 약 3개월.”

이제 곧 방학이 시작되면 꽤 많은 시간이 생긴다.

시장통 어머니의 야채 노점을 번듯한 가게로 만들어 줄 시간도 함께.

그리고 때마침 괜찮은 목표물이 모니터 속에 나타났다.

“그래 예행연습도 할 겸.”

드르륵.

치우가 방을 떠나고 멈춰 있는 모니터 속 화면에는 현상수배범 명단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