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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억.”

담배 연기에 섞인 한숨이 나에게로 향했다.

“뭐? 지금 나랑 장난하니?”

“반응이 왜 그래요? 싸게 부른 건데.”

사실 이 문제가 회자되고 시끄러워진다면 나도 좋을 게 없었다.

법복을 입게 되는 순간 사람을 폭행했다는 꼬리표가 평생 붙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꼬리표가 두려워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교무를 책임지는 사람이 그렇게 수지 타산을 못해서 되겠습니까?”

“허, 학생주임에게 들었다만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한데 그 똑똑한 머리로 다른 생각은 안했고?”

“말해 보시죠.”

“그만한 돈을 주는 것보다 그냥 한 번 시끄럽고 마는 게 나을 거란 생각 말이야? 네가 아직 사회를…….”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서원 학원,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와 부속 병원까지. 서원 그룹이 만든 국내 최대의 학원 법인이죠.”

하나 서원 그룹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IMF를 기점으로 서원 그룹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2004년 결국 파산하여 그룹 전체가 해체돼 버린다.

“서원 그룹은 망했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재단법인은 결국 최후의 보루로 살아남게 되었죠.”

아무리 전국에서 노는 아이라지만 이제 겨우 열여덟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듯, 교감은 담뱃불이 옷에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있다.

“하지만 학교 폭력이라는 이슈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부는 옳다구나 하고 서원 학원을 조사할 겁니다. 왜냐? 서원 그룹은 현재 VIP를 탄압하던 과거 정부에게 엄청난 비자금을 갖다 바쳤으니까요.”

“너… 뭐야?”

“그 과정에서 단 1원이라도 불법적인 자금 이동이 있었다면, 정부는 서원 학원에 관선 이사를 파견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감 선생님의 장인이자 서원 학원의 이사장은 지금 넋이 빠져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누군가를 원망하겠죠.”

“앗! 뜨거워!”

그가 떨어진 담뱃불을 눈치챈 건 바지를 뚫고 들어가 자신의 허벅지에 고통스러운 화상을 입히고 나서였다.

“선생이 학생 앞에서 담배를 피우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젠장!”

고통은 가면 속 교감의 진짜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지금 네가 한 말이 네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야?”

“네. 그러니까 열여덟 고등학생에게 용돈이나 주면서 회유할 생각이면 돌아가시죠. 그리고 단순히 머릿속에만 입력해 놓지는 않았으니까 절 묻을 생각도 접으시고요.”

“음… 그렇게 큰돈이 왜 필요한 거지?”

“그걸 왜 궁금해하십니까? 영수증 처리라도 해드릴까요?”

“그래. 네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닌 것 같으니 나도 돌리지 않고 말하지. 영수증 처리 없이 돈 건넸다가 나중에 네가 말 바꾸면 내가 곤란해지는데.”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세무조사 들어오면 분명 저까지 타고 들어올 텐데 제가 제 발등 찍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노린 거냐? 일부러 괴롭힘 당해 주는 척한 거고?”

“아니요. 괴롭다고 말도 하고, 도와 달라 요청도 해봤지만 철저히 무시당했죠. 지금은 오히려 고맙네요. 그게 아니라면 3억이란 거금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원망만 하던 상황이 과거로 돌아오니 기회가 되었다.

약점을 잡아 협박으로 뜯어낸 큰돈.

조폭이 하는 짓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죄책감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

내 마음속엔 이미 원망과 꼬여 버린 인생에 대한 보상이란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죄책감이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한 돈으로 가져오세요. 추적도 꼬리도 붙을 수 없는 돈.”

물론 법복을 조금 더 빨리 입을 수 있다면 기소권이라는 칼로 그들을 찌르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열여덟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 돈을 받는 순간 결국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네가 다를 게 뭐니? 폭력을 행사한 놈과 그 폭력을 대가로 돈을 챙기는 너.”

“다를 거 없죠. 그저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법일 뿐입니다. 아직 세상은 거대 재단인 서원 학원과 맞서 싸울 사람이 얼마 없거든요.”

“거기까진 주제를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탁!

그의 비릿한 웃음을 보며 나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



― 학교폭력예방센터에 YH 재단이라는 이름으로 3억이라는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하지만 YH 재단은 등록되지 않은…….

“어머나! 치우야 이것 봐봐.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니?”

TV를 보던 어머니가 기분 좋은 뉴스에 웃음을 보인다.

“엄마한테 돈을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나도 같은 고등학생을 키우는 엄마잖니. 저런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돈이 치우 너처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도 너무 좋아.”

앞으로 웃을 일만 가득할 거란 약속.

뭐가 어찌 됐건 지킬 수 있을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는 공부할게요.”

“쉬엄쉬엄해 과일 좀 줄까?”

“괜찮아요.”

방 안에 들어와 낡은 데스크톱의 전원을 켰다.

한참을 기다려도 바탕 화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해 방안을 살펴보자 내 기다림의 이유를 설명해 줄 달력이 보였다.

2004년 11월 15일.

어느새 켜진 추억 속 바탕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빌드업을 시작할까?’

앞으로 일어날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열여덟 고등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속 터져 죽겠네.”

인터넷을 열고 답답한 속도로 뉴스들을 찾아보았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리자, 눈과 머리가 번쩍거릴 정도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보였다.



[법무부, 내년부터 사법 고시 응시 자격 개정.]

[학력 제한 없던 사법 고시, 내년부터 법학 과목 35학점 이수자만 응시 가능.]



딱!

손가락을 튕기자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 이것부터.”

2006년 1월 1일부터 사법 고시의 응시 자격이 바뀐다.

물론 법대를 들어간 적이 있는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지금 날짜 11월 15일.

내년 1월에 사법 고시를 응시한다면 내년에 치러질 47회 사법 고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오랜 조폭 생활로 머리가 굳어졌다 하더라도 사법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 평이 겨우 넘는 좁은 고시텔 방안에 갇혀 본 것이라곤 기출문제와 답안의 법리 해석문이었다.

잠꼬대를 법조문으로 해댈 정도이니 시간이 지난다고 잊힐 리가 없었다.

“그럼 이걸로 일단 학비 문제는 해결되겠네.”

없는 형편에도 훗날 공부 잘하는 아들에게 원망을 들을까 봐, 어머니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여 나를 사립학교에 보내셨다.

물론 공립학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선택이었다.

그 사정을 나도 알고 있는 탓에 공립대에 들어갔지만, 사법 고시생에게는 생각보다 돈 들 곳이 상당히 많았다.

어쨌건, 사법 고시에 합격한 고등학생은 대한민국 유수의 명문대들이 장학금을 주며 데려가려 할 것이다.

“이건 됐고, 지금 급한 건 이사 문제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이제 곧 재개발을 위한 이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두 발조차 뻗기 힘든 좁은 원룸으로 가게 된다.

“쩝, 1억은 남겨 둘 걸 그랬나. 어떻게 보면 2년 동안 폭행당한 합의금인데.”

그렇다고 기부한 돈을 되돌려 달라고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아들 민윤호의 이름을 딴 진짜 재단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지만, YH라는 이니셜이 사람들에 머릿속에 새겨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추후에 진짜 YH재단이 설립될 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성훈산업, 줄기세포에 대규모 투자 예고.]



“흠,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지. 이게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걸 이때는 몰랐지만.”

이런 건 관여하지 말자.

어차피 내년이면 밝혀질 텐데.

후회한들 무엇하리,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건데.

스크롤을 내리려는 찰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잠깐만, 성훈산업?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업인데…….”

쾅!

책상을 내려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기억이 확실해지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나는 곧장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날개 달린 채팅 프로그램을 열었다.



[치우천재] : 야 성훈아!

[성훈이지롱] : 응?

[치우천재] : 너희 아버지 회사 이름이 성훈산업 아니야?

[성훈이지롱] : 응, 맞아!

[치우천재] : 잠깐 나 좀 보자.

[성훈이지롱] : 지금?

[치우천재] : 어. 지금 당장.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현관문을 나섰다.

“치우야, 밖에 추워!”

“잠깐 나갔다 올게요!”



***



“와….”

성훈이가 알려준 주소로 뛰어가자, 우리 집 근처 풍경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곳이 나타났다.

“여기가 너희 집이야?”

이쪽 길로는 올 생각도, 기회도 없었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고급 주택단지가 있는지 말이다.

그런 고급 주택단지 속에서도 성훈의 집은 다른 집을 몇 개 합쳐 놓은 것마냥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다.

“응, 맞아. 그런데 어쩐 일이야?”

“혹시 너희 아버지 집에 계셔?”

“응, 계시지.”

“잠깐 뵐 수 있을까?”

“괜찮긴 한데 왜?”

“드릴 말씀이 있어 너희 아버지가 꼭 들으셔야 할.”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성훈이.

성훈이가 잘사는 집안인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성훈산업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훗날이었다.



[성훈산업, 결국 부도 방영호 회장 일가족 해외 도피]



뉴스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기업 이름과 그보다 더 익숙한 장남의 이름을 보고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성훈산업의 명줄을 갉아먹을 쥐를 잡으러 왔다.

쥐약을 든 채.

어쩌면 친구의 집안을 구하고, 우리 집안의 보금자리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아버지, 친구 왔어요.”

“응? 친구?”

드라마를 보면 심심치 않게 재벌 집 풍경이 나온다.

대리석 바닥과 거대한 샹들리에.

집에서도 양복을 갖춰 입고 위층 서재에서 내려오는 회장님.

“안녕하세요, 한치우라고 합니다.”

“아, 이번 모의고사 전국 1등 했다는 친구?”

성훈이의 아버지, 방영호 회장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그래, 일단 들어오거라.”

어떤 집을 방문해도 1등이라는 수식어는 환영 인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아주머니, 여기 애들한테 맛있는 것 좀 해 주세요.”

“네, 회장님.”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주방으로 들어갔고, 방영호 회장은 시종일관 나에게 미소를 보였다.

“기특하구나, 부모님이 참 좋아하시겠어. 얼굴도 잘생겼고.”

“저…….”

“그럼 재밌게 놀다 가거라. 언제든지 놀러 오고.”

“저,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위층으로 향하던 방영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네.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렴.”

“아저씨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응?”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성훈이와 뜻밖의 제안에 황당해하는 방영호 회장이었다.

“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구나.”

계단을 오르는 방영호를 뒤따라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

3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책장이 서재 전부를 두르고 있었고, 책장 속에는 책이 빼곡했다.

또 서재 한가운데에는 회의를 위한 응접실이 보였는데, 수십 명이 들어와도 좁지 않을 만큼 꽤나 큰 공간이었다.

“거기 앉으렴.”

“네.”

착.

방영호가 가리킨 응접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사이언스 학술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 할 말이라는 게 뭔지 이제 말해 보거라.”

“줄기세포에 대규모 투자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벌써부터 경제에 관심이 많구나.”

“네. 그래서 회장님이 꼭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저 호기심 많은 열여덟 고등학생을 대하는 태도의 방영호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은 곧 관심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은 조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