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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잘 살펴보고 있지?”

“네, 대표님. 조용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으름장을 놓고 떠난 나성원은 다행히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한테 똑똑히 전해. 성원파 애들 건드리지 말라고.”

“대표님… 그래도 전쟁 준비는 해 놓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안 건드려도 저쪽에서 연장 차고 들어오면 우리 애들 여럿 죽습니다.”

“상철아. 우리 이제 깡패 아니다. 깡패일 때야 연장 차고 들어오면 우리도 연장 차는 거지만, 일반인일 때는 어떻게 해야겠어?”

“연장을 안 차고 싸워야 합니까?”

“아이고, 인마 경찰에 신고를 해야지.”

불법적인 사업을 모조리 정리하고, 수천만 원짜리 로펌 변호사들을 고용해 서울연합파를 SY 그룹으로 만들었다.

“떠나겠다는 직원들은 퇴직금 넉넉히 챙겨 주고 남는다는 직원들은 과외라도 시켜서 회사원처럼 만들어 봐.”

“네, 알겠습니다.”

“길이 막히네. 취임식은 몇 시야?”

“두 시입니다.”

“서둘러서 가자.”



***



“SY의 새로운 대표, 한치우 님 입장하십니다.”

짝짝짝.

상석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못마땅한지 손은 박수를 치지만 눈빛은 곱지 않다.

“반갑습니다, 이사님들. 한치우입니다.”

조폭이 만든 기업이라고 모든 구성원이 조폭은 아니다.

평생 머릿속에 채운 거라곤 욕이고, 컴퓨터로 할 줄 아는 건 도박밖에 없는 조폭들이 기업을 운영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삥 둘러앉은 이사들은 몸속에 문신도 없으며 이력서에 써 낼 학력도 꽤 괜찮았다.

“현재 저희 그룹이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조폭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이상 이제 우리는 떳떳한 사업을 통해 그룹을 성장시킬 기회가 생겼습니다.”

SY 그룹의 간판은 합법적이지만 매출 대부분이 사채, 불법 도박 사이트, 용역 깡패 등의 불법적인 일이었고, 불법을 모조리 걷어 내니 매출이 심각할 정도로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사들 뒤에 서 있는 조폭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해지는 반면, 앉아 있는 이사들의 눈빛은 곱지 않다는 것이다.

“한 대표, 지금 회사 적자가 얼마인 줄은 아세요?”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저희는 이제 검찰과 경찰들에게 수 억의 뇌물을 뿌리지 않아도 되고, 직원들은 칼과 빠따가 아닌 서류 가방과 노트북을 들고 합법적인 비즈니스를 하게 될 겁니다.”

“불법적인 일도 머리 딸려서 허덕이는 조폭들이 노트북과 서류를 들고 뭘 한다고요? 비즈니스? 차라리 공부 잘하는 중학생을 데리고 하는 게 낫겠습니다.”

회의실에는 이사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비아냥거리는 정태용 이사의 말에 뒤에 나열해 있던 조폭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씨발, 지금 뭐라 그랬습니까? 정 이사님?”

예상한 대로 강상철이 정태용 이사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저 봐∼ 수틀리면 욕부터 나오는 깡패들 데리고 비즈니스? 할 거면 한 대표 혼자하세요. 우리가 무슨 대단한 비전을 기대하고 민태호 밑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까? 우리는 그저 민태호가 그 깡패 짓해서 벌어다 줄 돈을 기대하고 들어온 겁니다.”

불법을 걷어 내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법으로 맺어진 관계는 합법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깨져 버린다.

“저희 지분 정리나 잘해 주세요. 한 대표가 원하는 사업은 골빈 애들 데리고 하시고.”

정태용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났고, 많은 수의 이사들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쾅!

문이 닫힌 회의실을 둘러봤다.

몇 명은 남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해 봤지만, 텅 빈 회의실 의자들을 보자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대표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생각을 바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을 바꿔.”

“네?”

휙.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위에서 벌 받고 계시는데 우리가 까지는 못할망정 죄를 추가해서 되겠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휴, 이제 나도 헷갈린다. 우리가 깡패인지 저놈들이 깡패인지.”



***



“댁으로 모실까요, 대표님?”

“아니, 술이나 한잔 먹으러 가자.”

“네, 대표님. 서 마담한테 전화해서…….”

“아니, 성북동으로.”

“달동네 말씀이십니까?”

“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

그리고 민태호와 가장 가까운 곳.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원하던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깡패들을 소탕하며 썩은 세상을 맑게 만드는 방법을.

“그리고 대표님, 정 검사가 연락해 왔습니다.”

“받지 마.”

“괜찮을까요? 중앙 지검 강력부 부장입니다. 그놈이 서울의 깡패들 목줄을 쥐고 있잖습니까.”

“말했잖아 상철아. 우리 이제 깡패 아니라고.”

만약 내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검사가 됐다면 정 검사와 달랐을까?

‘동상이 검사가 됐다면 분명 좋은 검사였을 거여.’

민태호의 말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깡패들을 소탕하며 썩은 세상을 맑게 만드는 그런 검사가 됐을까?

살아온 길은 조금 달랐지만, 민태호와 나는 같은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떤 후회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었다.

민태호는 조폭이라는 후회.

나는 살인이라는 후회.

“가서 소주 몇 병이랑 안주 될 만한 것 좀 사와.”

“네, 대표님.”

상철이 편의점을 찾아 떠난다.

“후∼”

밤하늘과 네온사인 가득한 서울의 밤거리가 수평을 이루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답답함이 조금은 해결되는 것 같았다.

“거 땅 꺼지겠소, 한 대표.”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예측할 수 있었다.

민태호와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한 사람.

탁탁탁.

나무 지팡이의 경쾌한 타닥거림이 들려왔다.

“다리도 불편하신 분이 여기까지 올라오신 겁니까?”

“에이, 설마 걸어왔을까 봐?”

“같이 소주잔 기울이실 거 아니면 돌아가시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 있나?”

지팡이를 껄렁하게 짚은 나성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인다.

“참, 저도 주먹 짬밥이 몇 년인데 다리병신한테 작업당할 것 같습니까?”

“허∼ 조폭 안 한다면서 입이 거치네, 한 대표.”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죠.”

철컥.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익숙하지 않은 물건.

나성원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칼이 아닌 권총이었다.

“뭡니까 그건?”

“다리병신이 휘두른 칼은 피해도, 다리병신이 쏜 총알은 못 피하지.”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조폭 두목이 민간기업 대표한테 총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해도 막아 줄 뒷배가 있으니까.”

“뭐?”

“잘 봐…….”

휙.

나성원의 손짓에 언덕 밑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들이 나타난다.

“이 총은 여기 계신 정 검사님이 협찬해 주셨고, 총알은 SY 그룹 이사님들이 협찬해 주신 거고, 마지막으로…….”

괜찮았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썩은 세상에는 검사와 기업인, 그리고 깡패의 경계선이 없어진 지 오래니까.

“너?!”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나성원 옆에 서는 상철의 모습은 꽤 많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자∼ 한 대표, 잘 들어. 시나리오는 이래. 요놈 상철이라 그랬나? 뭐, 여튼. 요 상철이가 한 대표에게 총을 쏠 거야. 그럼 한 대표는 뒤쟈 뿔겠지? 그럼 정 검사가 상철이한테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5년으로 맞출 것이고, SY 그룹은 여기 계신 이사님들 뜻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리고 서울연합파는 성원파로 흡수된 채 새로운 SY 그룹의 대표는 요 나성원이 되는 거지.”

“하하하, 아주 좆같은 시나리오네.”

허탈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웃음을 멈춘 뒤에는 상철이의 눈을 살폈다.

“왜? 이유라도 좀 알자, 상철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런, 씨발! 이유를 말하라고!”

흔들린다.

도대체 무엇이 상철이의 눈을 흔들리게 한단 말인가.

“이놈 딸린 식구가 여섯이고 한 대표가 준 월급이 300이야. 흔들리지 않고 배기나.”

“정말이야? 그저 돈 때문인 거야?”

아닌데.

내가 10년 넘게 봐오던 상철이는 그런 애가 아닌데.

“얼마야? 태호 삼촌이랑 10년, 나와의 10년을 지워버리는 금액이 얼마냐고.”

“…죄송합니다. 가족들이 붙잡혀 있습니다.”

“뭐?”

척!

권총을 잡은 상철의 손이 떨려 오자, 나성원이 그의 손을 덮어 움켜쥐었다.

“뒈질 놈 말은 그만 듣고 어서 당기지?”

“너희가 인간이야? 그래 나성원이야 본성이 양아치니까 그렇다 쳐도 정 검사랑 이사들 당신들은 뭔데?”

헛기침을 고개를 돌리는 이사들과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웃는 정 검사.

“그러니까 깡패 새끼가 왜 자꾸 양지로 나오려고 그래. 사람 피곤하게. 그냥 음지에서 돈이나 갖다 바치면서 살지.”

“그래서 검사란 새끼가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살인 청부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야?”

“지켜보다니? 적극적으로 도와야지. 나도 투자한 게 있는데.”

“그래… 인간 아닌 새끼들이랑 말 섞을 필요 없지.”

슈트를 벗어 재끼고 그들에게 달려갈 자세를 잡았다.

“한 대표, 조용히 가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야 고통 없이 죽는 거 알잖아. 괜히 객기 부리다가 잘못 맞아서 총알 낭비하게 하지 말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괴롭힘을 당하던 학창 시절?

나 자신을 억누르지 못한 살인?

지옥에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선택한 조폭 생활?

그것도 아니면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썩어 빠진 세상?

“죽어! 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