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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 차려진 술상 위에 걸터앉은 남자가 들려진 발목을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거참, 내가 명문대 출신 깡패는 봤어도 사시 패스한 깡패는 또 처음 보네”

“좋게 봐주십시오, 검사님.”

정권이 바뀌고 검찰은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검사실로 나를 부르지 않고 여길 찾아왔다는 건 자리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내게 원하는 것은 똑같다는 의미였다.

스윽.

나는 그가 걸터앉은 테이블 옆으로 USB 하나를 올려놓았다.

“코인 지갑입니다. 달마다 넣어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심기가 좋지 않은지 손을 들어올렸다.

짝!

뺨에 따끔한 열감이 전해져 왔다.

“어디 감히 깡패 새끼가 검사 목에 목줄을 채우려 들어.”

뇌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 내 떳떳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뿐.

“범단 수괴죄(범죄단체 수괴죄)로 사형 때려 줘? 사시 패스한 놈이니까 더 잘 알겠지?”

털썩.

“죄송합니다, 검사님.”

꾸욱―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자 그의 구두 굽이 내 뒤통수를 누른다.

“잘 들어 지검장님 여의도 건너가신다니까 깨끗한 걸로 세 장만 준비해서 보내고, 마지막 커리어 쌓으시게 성원파 애들 잡아놔.”

성원파.

강북 최대 규모의 조직.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겠다는 소리다.

“검사님, 3장 보내드리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저희 식구들 이제 전쟁 안 합니다”

“하하하, 깡패가 주먹질을 안 한다고?”

“불법적인 사업도 전부 정리 중입니다. 그렇게 되면 검사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어지겠죠.”

“이런 미친 새끼가. 너 뭐라 그랬어?”

퍽!

또다시 내 뺨으로 향하는 손을 붙잡았다.

“적당히 하시죠. 저랑 검사님이랑 다를 게 뭡니까?”

“다를 거?”

쨍그랑!

맥주병이 깨지며 날카로운 녹색 칼날을 만들어 냈다.

“이 깨진 병으로 내가 너를 찌르면 정의가 되지만, 네가 나를 찌르면 범죄가 되는 거야, 알아? 그게 너랑 나랑 다른 거고.”

스윽.

비릿한 맥주 냄새와 함께 점점 목 쪽으로 서늘한 깨진 병이 다가온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간판 내리고 싶지 않으면.”



***



“한 이사∼ 오랜만에 쇠주나 한잔하지.”

불그스레진 뺨을 어루만지며 룸살롱을 나오자 민태호가 기다렸다는 듯 뒷자리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탁!

“새로운 중앙 지검 강력부 부장?”

“예.”

“아따∼ 감히 우리 동상 얼굴을.”

민태호가 붉어진 뺨을 보고 눈치챈 듯 말했다.

“어뗘?”

“빠꼼이에요.”

“빠꼼이면 달라는 거 주고, 야기 마무리 짓지 뺨은 왜 내준겨?”

“승진 물먹었다더니, 독기가 아주 바짝 올라 있더라고요.”

“잘 달래 봐. 돈은 얼마든지 써도 되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나무가 아니라 숲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 잘 안 통하네요.”

“워메∼ 피곤한 놈이 우리 목줄을 잡았구마잉.”

“저놈 구워삶는 것보다 사업 정리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도박 사이트랑 용역 회사만 정리하면 저놈한테 우리 목줄 잡힐 일은 없으니까.”

“그려∼ 한 이사가 알아서 혀. 앞으로 한 이사가 이끌어 갈 기업이잖어. 나야 이제 뒷방 노인네지 뭐.”

민태호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1년 전 시한부 선고를 받은 민태호는 수억을 써 가며 생명을 유지해 오고 있지만, 조직의 실권은 전부 나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멈춰 섰고, 나와 민태호는 차에서 나와 단골 횟집으로 향했다.

“아지매!”

“아이고∼ 우리 민 대표님 아닌겨.”

“동상이랑 쇠주 한잔 할라니까 싱싱한 놈으로 몇 마리 떠주이소.”

시장 상인들은 전부 서울연합파를 종교처럼 떠받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조합장 자리에 앉아 있던 성원파는 각종 이권을 얻기 위해 시장 상인들을 괴롭혔고, 민태호는 성원파와의 전쟁을 통해 성원파를 시장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고 몇십 명이 다쳤는데, 그 때문에 민태호는 징역살이를 하며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근데 그게 도대체 어디 사투리예요?”

나는 알 수 없는 민태호의 말투를 괜히 한 번 물었다.

“몰러. 전국구 조직 두목이 지역감정을 섞어서 되겠는감?”

“뭔 소리야 도대체.”

“하하하, 쇠주나 부으러 가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민태호는 조직의 막내 시절 배고픔을 추억한다며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곤 했다.

“오랜만에 한 이사랑 둘이 있고 싶으니까 너희는 퇴근들 혀.”

“네, 고문님!”

민태호를 수행하던 덩치들이 언덕길을 내려가고,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민태호의 팔에 화려한 문신이 드러났다.

“흉해요. 나이 먹고.”

“후회하니까 늦었어야. 3,000만 원이나 주고 혀 깨물면서 참고 했는디, 지우는 데는 2억을 달라니. 얼마나 미련 맞고 등신 같은지.”

쪼르륵.

민태호가 자신의 잔을 채운다.

휙!

“물 드시죠.”

“아이고, 서러워서 참. 뒷방 노인네라고 무시나 당하고.”

“말 들으세요. 민 고문님 이제 제가 SY 대표입니다.”

“이래서 살아 있을 때 물려주는 게 아니라 혔는디.”

“저도 깡패 기업 대표되는 거 싫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사세요.”

“내가 왜 동상한테 조직을 물려주려는지 알고는 있어?”

“또… 맨날 똑같은 소리.”

“이제 서울연합파는 없는 거여. 동상이 맡는 순간 SY 그룹은 합법적이고 지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제.”

달동네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민태호는 매일 똑같은 말을 했다.



후회한다.

이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생각만으로 잘못을 빌은 것은 아니다.

불법적인 사업들을 전부 정리했고, 합법적인 사업에서 나온 매출의 상당 부분을 지역 발전과 기부를 위해 썼다.

민태호의 역사를 모르던 사람들이 오죽하면 그를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까지 했을까.

“나 죽으면 내 지분 갖다가 그 뭐시기, 재단인가 하는 거 하나 만들어줘, 동상.”

“하하하, 무슨 깡패 두목이 죽어서 재단을 만들어요. 뭔 자랑이라고.”

“내 이름 말고 죽은 내 아들 녀석 이름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여. 남들한테 삥 뜯고 칼로 쑤시고 그러던 거 죽어서라도 갚아 부러야지. 그래야 염라대왕 앞에서 변명이라도 하지 않것어?”

하지만 매년 엄청난 기부로 용서를 구했음에도 신은 민태호를 용서하지 않았다.

콜록콜록.

“자! 그러니까 뭔 자랑이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그래요. 몸도 성치 않은 양반이.”

입고 있던 슈트를 벗어 민태호의 등에 얹었다.

“이제 진짜 갈 때가 됐나… 뽕을 맞아도 말을 안 듣니 원…….”

“윤 박사한테 말해서 마약 성분 강한 걸로 올려 달라고 할게요.”

“살아생전 안 하던 뽕을 뒤질 때 되니까 하네, 참. 흐흐흐.”

실없이 웃는 민태호.

그의 과거가 어떤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웃기는… 죽기 전에 남들 못할 거 하나라도 더 해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가.”

확실한 건 그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옥도 살 만하다는 걸 알려준 사람.

때로는 부모와 형제의 빈자리를 채워 준 사람.

“아따∼ 취한다!”

민태호가 소주잔에 채워진 물을 마시며 소리친다.

“고맙다, 치우 동상.”

“또 뭔 느끼한 소리를 하려고 이래.”

입은 웃고 있지만, 슬퍼 보이는 눈이 또렷이 보였다.

고통을 티 내지 않으려 크게 말하는 민태호의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동상 때문에 7년을 벌었잖어. 후회하며 속죄할 시간도 벌었고. 감방에서 죽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이여.”

스윽.

민태호의 뒤로 가 그의 몸을 일으켰다.

고통을 얼마나 참고 있던 건지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속죄 다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오래 사세요. 지옥 가기 싫으면.”

“하하하… 하여튼… 이 싸가지…….”



***



“……”

팔에 두 줄을 그은 채 검은 액자 속 민태호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 사투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이사님… 천안 박 대표님이십니다.”

“어….”

힘이 풀린 몸을 간신히 일으켜 조문객과 맞절을 했다.

“태호 형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친동생 같은 분이라고…….”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밖에 날파리들이 많아 애들 몇 명 추려서 왔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식사하시고 가세요.”

전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조폭 두목의 죽음.

장례식장 안은 조폭들의 친목회가 된 듯 덩치들의 고개가 연신 숙여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분당 식구 왕민영입니다!”

조폭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던 민태호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는 게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살아온 길이며 단지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밖에 날파리들 얼마나 있어?”

“새까매요. 한 삼 개 중대는 출동한 것 같은데.”

“꼬투리 안 잡히게 잘하고 조폭들 술 먹으면 피 끓지 않게 미리 내보내. 서 마담한테 전화해서 조문객들 술상 봐 놓으라고 하고.”

“네, 이사님!”

새 정권이 들어서고 승진에 목말라 있던 경찰들은 기회의 타깃을 민태호의 장례식장으로 잡았다.

그러니 그저 술김에 한 싸움일지라도 이 안에서 벌어진다면 보통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대부분 민태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 테니 큰 걱정은 없었지만…….

조폭의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톡. 톡. 톡.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인파를 헤치고 다리를 쩔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보인다.

“아이고, 결국 뒤쟈 뿟네.”

“이런 씨발! 이 새끼들 입구 안 막고 뭐 했어!”

그 남자가 민태호의 영정 앞에 다가오자, 강상철 실장이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휙∼

“하지 마. 일단 다 나가 있어.”

“이사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직원들 데리고 나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네…….”

불청객.

평생 지팡이를 짚게 만들어 준 민태호를 찾아온 사람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장례식장이라면 더더욱.

“한 이사 오랜만이네? 민 회장이 뒤쟈 뿌렸으니 이제 한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네, 그래야겠죠.”

나성원.

성원파 두목.

성원파는 상대가 없을 만큼 거대한 서울연합파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다.

여의도에 건너갈 지검장이 욕심을 낼 만큼이나.

“뭘 그리 빨리 간 겨 이 사람아. 내가 알아서 보내 줄라 했는데.”

“소란 피울 거면 돌아가 주시죠.”

“아무리 웬수라 해도 장례식장에서 그러는 건 상도덕이 아니지. 걱정 말어. 애기들 연장 안 채웠으니.”

“두 분 악연은 여기서 끝내시죠.”

“한 이사 조폭들은 말이야 한 대 맞으면 두 대는 때려야 끝이 나는 겨. 자존심을 굽히면 조폭이 아니라 양아치 돼 버리는 거여.”

“이제 서울연합파 간판 내릴 겁니다. 원하시면 저희 지역 업소들이랑 뿌려져 있는 사채들도 나 회장님께 넘기겠습니다.”

“하하.”

푹.

나성원이 비릿하게 웃으며 분향에 향을 꼽는다.

“다리가 불편해서 절은 못하겠네.”

“괜찮습니다.”

스윽.

얼굴을 들이민 나성원이 내 귀에 밀착한 채 조용히 속삭인다.

“잘 들어, 한 이사.”

“말씀하시죠.”

“깡패 간판 내리고 민간사업 한다지?”

“네.”

“깡패가 만든 기업이 민간사업을 한다고 평범한 기업이 될 것 같나?”

“나 회장님이 방해만 안 하신다면요.”

“하하하, SY 건물에 우리 아그들 피가 묻어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꾸벅.

내 귀에서 얼굴을 뗀 나성원이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