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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Y 그룹의 새로운 대표님을 소개합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 사이로 걸었다.

멀리 보이는 한 자리.

[대표 한치우]

얼핏 보면 한 기업의 새로운 대표를 환영하는 자리 같겠지만, 나를 에워싼 사내들의 슈트 속에는 문신이 가득할 것이다.

서울연합파.

거느린 조직원만 수천 명이 넘는 거대 조직.

전국구를 넘어 하나의 기업체가 되어 가고 있는 조직의 두목이 될 수 있던 이유는 특이한 내 이력 때문이었다.



사법연수원생 출신 조폭.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앞을 볼 수조차 없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곤 했다.

왜소한 체구의 안경잡이.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떠한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참고 또 참았다.

얼굴과 몸은 성한 날보다 검푸른 멍과 새빨간 얼룩으로 뒤덮인 날들이 더욱 많았고, 시장통에서 힘들게 버신 어머니의 돈을 갖다 바치면서도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몇 년만 참으면 모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거라고.

합격.

그 의지 때문인지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 고시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단순히 경험 삼아 본 시험이었지만,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흥미를 돋았다.



[만 19살의 나이에 소년 급제!]



덕분에 내 이름은 꽤 많은 언론사에 대서특필되었다.

고시생과 고시 합격생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합격 발표가 난 지 하루가 지나자 담당 교수가 나를 교수실로 불렀다.

“치우야.”

“네, 교수님.”

“내 딸이 이번에 유학 끝내고 귀국하는데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다…….”

담당 교수는 자신의 딸을 내 자취방으로 보냈다.

“교수님… 지금 남자랑 여자랑 단칸방에서 룸메이트를 하라는 겁니까?”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다니까 치우 네가 데리고 다니면서 적응 좀 할 수 있게 도와줘.”

법학과 교수에 장인은 중견 기업의 회장.

딸에게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우습게 마련해 줄 수 있는 재력이 충분했고, 여학생들에게 혼전순결을 강요하던 교수는 기어코 자신의 딸을 여덟 평짜리 자취방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외국물 먹은 예쁜 여자가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으니 말이다.

이미 정상에 도착해 버린 나머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친구들이 독서실을 갈 때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었고, 수술을 통해 십수 년간 나를 괴롭히던 안경을 벗었다.

“저… 혹시 연예인해 보실 생각 있어요?”

“저 사법연수원생입니다.”

“하하하! 유머 감각도 있으시네. 여기 명함 드릴 테니 꼭 연락해 주세요.”

외모도 꽤 봐줄 만했다.

나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여자들 눈에 사법연수생이라는 타이틀은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옥 같은 세상이 천국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천국이 영원할 줄 알았다…….



서원고 동창회.



그곳에 가기 전까진.

현실이 천국으로 변하니 지옥 같던 과거의 기억을 바꾸고 싶었다.

“뭐? 쟤가 한치우라고? 그 말라깽이 한치우?”

“사법 고시 합격해서 지금 사법연수생이라더라.”

동창들의 속삭임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생전 나오지 않던 동창회를 나온 이유는 학창 시절 나를 벌레 보듯 한 여자들이 바짝 달라붙어 내 팔에 가슴을 비비는 것도, 탄성을 뱉으며 나를 부러워하는 남자들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한 무리.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부실해 보이는 점퍼와 배달 브랜드가 적힌 헬멧을 든 채 다가오는 이들.

아직은 껄렁함이 채 빠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꼴을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오랜만이다.”

공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무리.

소년 급제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지를 심어준 무리.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금의 나는 천국 속에 살고 있지만, 이들은 지옥 속에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뭐하는데 그렇게 탔어?”

여기로 오는 차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녀석들에 대한 악감정을 털어 내겠다고.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따라 주며 당당하고, 사려 깊은 모습으로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검사… 됐다며?”

“아직 사법연수생이야. 너희는 춥지도 않냐? 그런 옷차림에… 그 이상한 헬멧은 또 뭐고……. 아, 미안하다 일하다 왔나보구나.”

하지만 정작 녀석들과 말을 섞었을 땐 그러한 생각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여유로울 줄 알았던 내 얼굴은 굳어졌고, 고통을 심어 주고 싶었다.

“어… 뭐…….”

“그래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냐. 술이나 먹자.”

한 잔도 못 하던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너희 설마 지금도 양아치 짓하는 거 아니지?”

“한치우, 그만하지? 우리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반성? 좆 까고 있네. 사람은 겉은 변해도 속은 그리 쉽게 안 변해.”

술이 오르자 어떤 경계선이 무너졌다.

나도 그들도 말이다.

“똑바로 살아 병신들아. 부모님이 불쌍하지 않냐?”

“이런 씨발! 사법 고시 합격했다고 유세 떠냐? 좆만 하던 새끼가.”

“하하하, 거봐 사람은 안 변한다니까.”

“너 외국물 먹은 여자 만난다며? 개랑 떡 치면 신음도 영어로 하냐?”

쨍그랑!

“뭐? 다시 말해 봐, 씨발 새끼들아!”

맥주병을 깨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우리를 뜯어 말렸다.

“야! 너희 왜 그래 진짜. 그만해 이러다 일 나겠어.”

참아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놔 봐! 사법 고시 합격한 새끼 인생 한번 좆돼 보라고!”

“내가 못할 것 같아?”

“니 여자 친구 탱탱하냐? 언제 나도 한번 빌려줘 봐.”

“이런 개새끼가!”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늦어 버렸다.



[소년 급제한 사법연수생의 살인!]



언론이 보기에는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기삿거리였다.

수의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피고는 사법연수생으로서 사회에 모범이 되어야 할 예비 법조인의 책무를 저버린 채 살인이라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점을 물어 징역 11년에 처한다.”

스폰서 검사와 성추행 검사 등 당시 여론은 검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 와!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검사는 8년을 구형했고, 여의도에 건너가고 싶던 판사는 11년을 선고했다.

“항소 준비할게요. 박 교수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선고가 끝나고 방청석 모두가 환호했다.

환호 속에서 나를 보며 울고 있던 한 여자.

“됐어요. 교수님한테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치우 씨… 박 교수님 따님 생각도 하셔야죠.”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미련이 없어야 포기를 하죠.”

“치우 씨!”

재판장을 나와 포승줄이 묶이자, 참고 있던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내 천국은 다시 지옥이 되었다.



***



“고생하셨어요, 치우 씨.”

쾅!

철문을 내 손으로 직접 열 수 있게 된 것은 9년 만이었다.

“하늘 예쁘네.”

교도소 안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담벼락 안과 밖의 하늘은 달랐다.

끼익!

“어? 깡패 삼촌?”

“아따∼ 싸가지는 여전하구먼.”

차량의 창문이 열리고 매서운 인상의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실 줄 몰랐는데.”

“동상 아니면 아직도 저 담벼락 안에 있었을 텐데 은혜는 갚아야지. 뭐부터 할 텨? 가시나? 아니면 술?”

“술만요.”

“하하하, 거참 재미없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구먼. 가시나들이 니 얼굴 보면 겁나 좋아할 텐디 어쩔 수 없쟈.’

민태호.

서울연합파의 두목.

지옥 같은 교도소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사법연수생이라는 타이틀은 천국에서나 날개였지 교도소라는 지옥에서는 올가미일 뿐이었다.

“어이∼ 배운놈, 이리 와서 내 항소장이나 써 봐.”

“좆까. 너 같은 쓰레기 항소장 써 주려고 고시 본 거 아니니까.”

“워메∼ 이 살인자 새끼 싸가지 보소.”

문신이 자랑이 되고 주먹이 서열을 정하는 곳.

“치우 씨, 배운 사람인 것도 알고 여론 때문에 형량 많이 받은 것도 아는데 1∼2년도 아니고 맨날 그렇게 묵사발돼서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도둑놈들한테 객기 부린다고 겁낼 것 같아? 아니야. 객기를 부릴 거면 등에 깔(칼)이라도 꼽든가. 그럼 추가 떠서 형량은 더 늘어나겠지만, 건들지는 않아. 그렇게 안 할 거면 대충 적응하면서 살고.”

교도관이 내게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객기를 부린 대가로 매일 저녁이 지옥이었다.

학창 시절 당하던 구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바뀌어야 했고, 지옥에서 버티기 위해 머리를 숙였다.

현실을 깨달은 지 2년쯤 지났을 때 교도소의 왕이 찾아왔다.

“아가야∼ 니가 검사되려다 살인자 된 갸 맞나?”

“네, 맞습니다.”

“항소장 써 드릴까요?”

나는 곧장 폭처법(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판례문을 전부 읽었고, 민태호의 항소장을 작성했다.

10년을 선고받은 민태호는 항소심에서 형량이 3년으로 줄었다.

“이야∼ 몇 천만 원짜리 변호사보다 살인자가 더 낫네. 아따, 내가 이 은혜를 뭐로 갚아주면 될까?”

문신이 자랑이 되고 주먹이 서열을 정하는 곳의 왕, 민태호.

“남은 형기 동안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주세요.”

“그거면 되나?”

“네, 충분합니다.”

민태호는 교도소장조차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야들아∼”

“네, 형님.”

“애들한테 전해라 여기 치우 동상이 내 친동상이라고.”



***



“그려 치우 동상은 이제 뭐 할껴?”

“아직 모르겠습니다.”

질퍽한 술자리가 끝나고 민태호가 물었다.

“내 밑에 들어오는 건 어뗘?”

“깡패 하라고요?”

“아따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깡패가 뭐여 깡패가. 옛날처럼 연장질하던 시대는 갔어. 우리는 기업이여 기업!”

‘기업은 무슨… 그래 봤자 깡패지.’

내 생각이 어떻든 간에 민태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동상, 가슴에 살인전과 별 달고 취직이라도 하려는 겨?”

“막노동이라도 알아봐야죠.”

“아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별을 인정해 주는 조직은 조폭밖에 없어, 전과가 이력서가 되지.”

“하하하, 쓰레기 같은 조직이네요.”

“같은 쓰레기라면 주머니 빵빵한 쓰레기가 낫지. 이미 마빡에 살인자 도장은 찍혀 부렸는데 막노동은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어?”

더 나은 선택이 없던 건지.

아니면 내가 찾지 못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술기운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민태호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것 같았다.

명문대 출신의 사법 고시 패스.

살인 전과가 생기는 순간, 아무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었다.

“깡패하면 돈 많이 벌어요?”

“나가 특별히 치우 동상은 우리 회사의 법무 이사로 스카우트할라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이미 양지로 갈 수 없는 몸.

이왕이면 음지에서라도 왕이 돼 보고 싶었다.

“아무리 깡패 회사라도 이사 직함이면 높은 거 맞죠? 개나 소나 이사면 안 하고.”

“하하하, 이래서 배운 놈들은 틀리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