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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지역 예선 (5)



이 순간, 준혁만큼 긴장한 사람이 또 있었다.

“여보, 준혁이는 잘할 거야.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마치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미래를 보며 일권이 어깨를 감싸며 다독여 주었다.

“저 키 차이 봐요. 우리 준혁이는 아직 애인데…….”

미래는 마운드에 선 준혁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분명 준혁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었다.

엄마의 눈엔 그것이 보였다.

착한 아이라 티는 안 내지만, 평소에도 피곤하면 감각이 예민해지곤 했다.

지금 마운드에서 대만 응원석을 힐끔 쳐다보는 준혁의 모습에서 그 모습이 느껴졌다.

“잘할 거야, 여보.”

일권이 미래의 손을 감싸 쥐듯 부여잡았다.

하지만 미래는 신경은 오로지 땀을 닦고 있는 준혁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우리 아가, 힘내라.”



***



팔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초여름의 날씨는 그라운드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아니, 날씨뿐만이 아니라 선수들의 열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깥쪽 꽉 찬 직구.’

민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투수판에 발을 올려놓았다.

타석에 선 왕웨이펑도 배트를 들어 타격 자세를 취했다.

와인드업과 함께 준혁이 힘차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왕웨이펑이 그 동작에 맞춰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준혁이 민수의 미트를 보고 강하게 공을 던지자, 왕웨이펑의 배트 또한 힘차게 돌아갔다.

깡!

“파울!”

크게 날아간 공은 1루 쪽 파울 담장을 넘어갔다.

[남준혁 선수의 강속구에 왕웨이펑의 방망이가 밀렸습니다.]

[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트에 공이 맞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남준혁 선수,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왕웨이펑 역시 아직 어리다 보니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분한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다.

하지만 잠시 뒤로 빠져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침착을 되찾았다.

한편, 예상 못 한 파울볼에 민수도 놀랐는지 얼굴 표정이 굳었다.

이번에 요청하는 구질은 체인지업,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유인구였다.

방금 왕웨이펑의 힘을 확인해서인지 신중하게 공을 요구한 것이다.

움찔.

패스트볼과 동일한 폼에서 날아 들어오는 체인지업에 왕웨이펑은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겨우 스윙을 참아 냈다.

역시 집중도가 최고조에 다다른 왕웨이펑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볼!”

[아, 그 공을 참아 냅니다.]

[맞습니다. 남준혁 선수가 오늘 첫 회심의 체인지업을 던졌는데요, 그 공을 골라내네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민수에게 공을 돌려받으며 다시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모자를 벗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위해 들어 올린 팔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대만의 응원석이 시끄럽다.

거슬린다.

“후우…….”

애써 마음을 다스린 준혁이 다시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까앙!

이번엔 약간 빨랐다.

3루 방향의 파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볼카운트가 타자에게 불리해졌다.

대한민국의 배터리로서는 한 개 정도 볼을 뺄 여유가 생겼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떨어지는 유인구를 요구하는 민수.

‘민수가 소심해졌네.’

어찌 보면 새가슴이고, 좋게 말하면 신중한 것이 민수의 단점이자 장점.

그만큼 안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유형이기도 했다.

어쩌면 왕웨이펑의 힘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기에 더욱 신중한 것일 수도 있었다.

준혁도 여기서 굳이 민수의 요구를 거스를 생각은 딱히 없었다.

다만, 이번엔 구종을 바꾸기로 했다.

사인을 보내자 민수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에 올린 글러브 속에서 그립을 바꿔 쥐었다.

“믿는다, 민수야.”

투수판을 밟으며 투구가 시작됐다.

평소와 같은 높이로 다리를 들어 올린 후, 힘차게 뻗으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왕웨이펑의 자세에도 시동이 걸렸다.

‘엇!’

똑같은 자세의 폼이지만, 어딘가 공이 붕 떠오르는 느낌.

속구 계열의 공과는 명확히 다른 궤적.

브레이킹 볼 중 커브는 그 특유의 떠오르는 느낌이 있다.

한눈에 그것을 알아챈 왕웨이펑 역시 나이는 어리지만 좋은 타자였다.

준혁의 공을 알아본 왕웨이펑이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이 자식, 커브를 숨기고 있었어!’

아직까지 준혁의 커브는 보지 못한 상태라 공의 궤적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겪어 본 다른 투수들의 커브를 참고 삼아 예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공은 홈 플레이트 근처까지 날아와 더 이상 고민할 틈이 없었다.

‘이건 스트라이크다!’

공이 통과하리라 예측한 지점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작지만 콤팩트한 폼으로 최대한 미트를 향해…….

부웅.

하지만 헛스윙이었다.

왕웨이펑의 예상보다 준혁의 공이 더 떨어진 것이다.

홈 플레이트 근처에 도달한 공은 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며 폭포수와 같은 낙차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민수의 예상보다도 더 떨어졌다는 것.

실제로 연습 때만 몇 번 받아 본 것이 전부인 민수로서는 전력으로 던지는 준혁의 커브를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홈 플레이트를 지난 공이 바운드되며 블로킹하려고 웅크린 민수의 다리 보호대를 맞췄다.

그런 후, 오른쪽 아래로 흐르는 공.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

삼진은 선언되었지만, 아직 아웃은 되지 않은 상황이다.

왕웨이펑은 배트를 던지고 빠르게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민수야, 오른쪽이야! 천천히 잡으면 돼!”

당황한 민수에게 준혁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다행히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상황.

마스크를 벗어 던진 민수가 준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으로 달렸다.

“잡았어! 1루!”

민수가 맨손으로 공을 움켜쥐고 1루수를 향해 빠르게 던졌다.

왕웨이펑은 온 힘을 다해 달렸지만, 아쉽게도 공이 먼저 1루수에게 도착했다.

“아웃!”

1루심이 큰 소리로 선언하자, 대한민국의 응원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이스! 민수야, 잘했어!”

다시금 마스크를 걸치는 민수에게 준혁이 소리 지르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민수도 준혁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네, 대만의 강타자를 잡은 대한민국. 큰 산을 넘었습니다.]

[이후의 타자도 물론 훌륭한 선수들이지만, 왕웨이펑보다는 쉽게 갈 수 있을 거예요.]

[말씀드리는 순간, 대만의 공격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후, 굳은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5번 타자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투수 앞 땅볼로 잡아내고, 이어지는 6번 타자 역시 3구 3진으로 요리하면서 대만의 공격이 끝났다.

아직 스코어는 0대 0.

무득점 경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양 팀의 공수 교대가 진행되었다.



덕아웃으로 들어온 준혁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털보 코치와 감독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까지 몇 개 던졌지?”

“현재 57개네요.”

“그럼 지금 교체하면 준결승에 등판시킬 수 있겠네?”

“네. 다행히 이제는 비교적 쉬운 팀만 남아서 다른 투수들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말이야…….”

“네.”

“지금 퍼펙트게임이란 말이야.”

“그래도 교체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꽤 많이 던진 것 같은데.”

털보 코치의 말에 감독이 앉아서 쉬고 있는 준혁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준혁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팀을 위해서도, 그리고 준혁이의 상태를 봐서라도 이쯤에서 바꿔 주는 것이 맞긴 한데…….”

“아쉽긴 하죠?”

“이후에 저 녀석의 야구 인생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몰라도 퍼펙트게임을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란 말이야.”

퍼펙트게임.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는 완전 게임을 말한다.

아직까지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대기록인 동시에 리틀 야구에서는 규정 때문에라도 더욱 달성하기가 어렵다.

국내 리틀 야구 리그에서는 여섯 명의 타자를 잡는 경우에 무조건 교체되는 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준혁 선수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한 회를 남겨 놓은 상태에서 투구 수 57개를 기록하고 있네요.]

[과연 코치진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가 궁금합니다.]

[맞아요. 아직 점수를 얻지 못한 한국 팀의 공격 등 여러 가지 고려할 요소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런 소식은 방송으로도 알려져 녹색 창에 실시간 검색으로 남준혁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방송의 댓글 창에서도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며 찬반 의견이 갈리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좀 더 우세했다.

사람들의 많은 관심 속에 이윽고 대한민국 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수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꼭 점수를 내자고 서로를 응원했다.

그때, 감독이 앉아 있는 준혁에게 다가갔다.

“어때? 괜찮으냐?”

눈을 감고 있던 준혁이 감독의 말에 눈을 떴다.

“약간 힘들긴 한데,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사실 지금도 교체 타이밍이 늦긴 했는데, 어떻게 할래? 더 던질 수 있겠어?”

“퍼펙트게임 때문에 물어보시는 거죠?”

“그래, 알고 있었구나.”

“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죠.”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려고.”

“지금 교체 안 하면 준결승까지 못 던질 텐데, 괜찮을까요?”

감독이 준혁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대답했다.

“일단 지금은 준혁이 너만 생각하자. 하고 싶으면 던질 수 있게 해 주마. 다른 경기는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투수로만 못 나가는 것이니, 크게 상관은 없어.”

준혁은 역시나 좋은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의견을 물어봐 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선수를 위하는 방향으로 생각한다.

잠시 고민하던 준혁이 대답했다.

“그럼 해 보고 싶어요.”

“좋다. 그럼 다음 회에도 던지는 것으로 하자. 그때까지 푹 쉬고 있어라.”

“네, 감독님.”

감독이 준혁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른 아이들 옆으로 걸어갔다.

준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퍼펙트게임.

말로만 듣던, 그리고 야구 교본에서만 본 그 상황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다.

준혁은 뛰는 가슴을 달래며 사부가 알려준 호흡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자, 떨어진 체력도 회복되며 흥분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 덕아웃으로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

상대의 에이스 투수가 교체된 후 새로 나온 투수의 공략에 성공하며, 드디어 무실점으로 막고 있던 대만에게서 1점을 얻어 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추가 점수를 얻지 못하고 공수가 교대됐다.

[아! 남준혁 선수 마운드로 올라옵니다. 한국 팀 선수 교체 없이 그대로 이어 가려고 합니다.]

[퍼펙트게임에 도전하는 선수를 바꾸기도 쉽지는 않았겠지요. 부디 이 선택이 좋은 결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대만의 공격은 하위 타선인 7번 타자부터 시작됩니다.]

[남준혁 선수,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던지면 됩니다. 그럼 할 수 있어요.]

[1대 0으로 대한민국이 앞서고 있는 순간, 대만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오히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준혁은 차분하게 마운드에 올라 심호흡을 했다.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사부에게 보내는 둘만의 신호였다.

타석에 들어선 대만의 7번 타자는 배트를 짧게 잡은 것이, 어떻게든 치려는 의지가 가득했다.

보통 리그 경기라면 번트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

하지만 국제 대회이니 만큼 혹시나 나올 수 있는 번트를 대비해 민수가 하이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준혁이 자세를 잡고 공을 던졌다.

퍼엉!

다행히 번트 작전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시원하게 돌아가는 배트.

민수와 사인을 나누고 다시 투구 자세로 들어갔다.

이번 공은 봉인을 해제한 커브.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볼에 상대 타자의 배트가 돌아 나왔다.

까앙!

배트에 맞긴 했지만, 힘없이 유격수 방향으로 흐르는 땅볼 타구.

손쉽게 잡아서 1루로 송구해 원 아웃을 시켰다.

이어진 8번 타자.

준혁은 마찬가지로 초구 패스트볼을 던졌다.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이어지는 볼은 체인지업.

하지만 허를 찔렸는지 배트는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스트라이크가 선언됐다.

마지막 볼은 커브.

타자는 크게 헛스윙을 하며 삼진 아웃이 됐다.

이제 마지막 타자다.

준혁은 잠시 모자를 벗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덥다. 사부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참고로 이공자는 시원한 콜라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경기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한 타자만 남겨 둔 대한민국의 남준혁 선수. 대기록이 눈앞에 있는데도 차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네. 끝까지 집중하면 할 수 있어요. 남준혁 선수, 힘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응원석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저 어린 선수가 끝까지 힘을 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마지막 타자를 잡아내길 기도했다.

그렇게 모두가 응원하는 가운데 준혁의 초구가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