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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네 뜻이 그렇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다. 내가 너를 어찌 도울지 이제부터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구나. 그럼 네 호위 기사로 엘과 마티를 내일부터 보내고 그편에 연락을 주고받으면 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몸이 상할까 염려되는구나.”
“감사해요. 그래도 백부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저 혼자라면 아무것도 못 했을지도 몰라요.”
일어나 나가려는 백작과 포옹하며 로젤리아가 말했다.
15년 전 어머니를 잃고, 5년 전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후 형제 하나 없는 로젤리아에게는 백작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이었다.
믿었던 남편에게도 배신당했기에 혹시 백작에게마저 거부당할까 두려웠던 마음을 그제야 털어 낼 수 있었다.
감사를 표현하는 로젤리아를 꽉 안아 주며 백작은 목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켰다.
“아니다. 내가 널 더 잘 돌봐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이런 나쁜 일이 생겼지만, 같이 힘내서 헤쳐 나가 보자꾸나. 너는 네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렴. 이 라인하르트 공작가는 결코 알렉스 그 개자식이 아닌 네 편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려무나.”
“감사해요.”
“됐다. 그런 말은. 그럼 나는 원로들을 만나러 가 봐야 하겠구나. 속상해도 식사는 꼭 챙겨 먹는 것 잊지 말고.”
“네. 그럴게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로젤리아의 대답에 백작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을 벗어났다.
집무실을 나와 공작가를 벗어나는 백작의 두 주먹은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행동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로젤리아를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공작가에서 제 자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가문 회의까지는 시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백작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나간 후, 로젤리아는 집사를 불러 제 앞으로 온 초대장을 가져오게 했다. 여러 귀족이 보낸 각종 초대장 중 몇 장을 골라 집사에게 건넸다.
“이 모임에 참가자가 어떻게 되는지 좀 알아봐 줘요. 특히 성녀가 참가하는 모임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세요. 하지만 알아본다는 티는 최대한 내지 말도록 하고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군말 없이 로젤리아가 건넨 초대장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로젤리아는 석양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때라 해가 지는 모습을 쓸쓸한 눈빛으로 한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로젤리아가 이른 시간부터 서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을 때 거친 노크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로즈!”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집무실 안으로 뛰다시피 들어왔다.
“엘 오빠, 마티 오빠.”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들은 게 사실이야?”
쌍둥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은 사촌인 엘리어스 J 루인과 마티어스 E 루인이었다.
“일단 좀 앉아 봐.”
주황빛에 가까운 붉은 금발을 지닌 형제는 차분한 로젤리아를 보고 나서도 씩씩거리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일단 앉아야 이야기를 나눌 거 아니야.”
로젤리아가 두 남자를 겨우 진정시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젤리아가 들어오라고 답하자 집사가 들어왔다.
“어제 주신 초대장 중 성녀가 참가하는 곳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테판 백작가의 마리아 영애가 개최하는 티 파티에 성녀가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다른 참가자는요?”
“마리아 영애와 친하게 지내는 백작가와 남작가의 미혼 영애들이 서너 명 되고, 나머지는 젊은 부인들을 주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영애의 어머니인 스테판 백작 부인과 고모인 러셀 후작 부인을 합해도 열 명이 넘지 않는 소규모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로젤리아는 마리아 영애와 스테판 백작 부인이 성녀와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 헤아려 봤다.
“백작 부인이 아마 성녀의 예절 교육을 담당했나 보군요.”
“네, 맞습니다. 기본 교육은 마쳤는지 가벼운 티 파티에 성녀를 선보이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성녀가 아직 확실하게 사교계에 데뷔하진 않았죠. 좋아요. 마리아 영애에게 답장을 보내 주세요. 저도 티 파티에 참가하겠다고요. 파티 날짜는 언제인가요?”
“오늘 오후입니다.”
“그럼 티 파티에 어울릴 만한 선물도 같이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
집사가 나가자마자 로젤리아에게 뜨거운 두 쌍의 시선이 내려 꽂혔다.
“로즈,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야?”
“성녀라면 알렉스가 바람난 그 여자 아냐?”
“맞아.”
“우리가 그 여자를 어떻게 해 줄까?”
“말만 하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기사복을 입은 채 이를 부득부득 가는 두 형제를 보며 로젤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일단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번은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기 전에 성녀라는 그 여자를 먼저 만나 봐야겠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알겠다.”
“하지만 혼자 가는 것은 안 돼. 오늘부터 우리가 네 호위로 소속을 변경해 두었으니 어디를 가든 함께 가야 해. 아버지께서 만약의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니 이것만은 꼭 지키라고 하셨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알겠어. 앞으로 잘 부탁할게.”
“물론이지.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에게 말해 줘.”
“그래. 성녀인가 하는 여자나 알렉스도 네가 말만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마.”
진지한 얼굴의 엘리어스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질 나쁜 미소를 짓는 마티어스를 보며 로젤리아가 애써 미소를 만들어 냈다.
“고마워. 명심할게. 그럼 우선 성녀를 만나러 가요.”
* * *
마리아 스테판은 아침 일찍 공작가에서 보낸 답장을 받고는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적대적이지 않은 가문 중 고위 귀족 가문에 형식상 보낸 초대장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참가하겠다는 답장이 왔으니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라인하르트 공작 부인은 스물세 살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품 있는 귀부인이었다.
타오르는 불꽃같이 환한 붉은 머리카락과 고귀한 품종의 고양잇과 맹수 같은 황금색 눈은 그녀를 더 위엄 있어 보이게 했다. 우유같이 하얗고 고운 피부 또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거기다 작년까지 어린 황태자 전하를 3년이나 돌본 보답으로, 여성으로서 받기 어려운 명예 백작의 작위를 황실로부터 수여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공작 부인은 어린 나이지만 사교계에서 뼈가 굵은 노회한 부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아 같은 어린 영애는 당연히 쉽게 말조차 걸 수 없는 분이었다. 인연이라면 파티장에서 겨우 인사를 몇 번 건넨 것이 다인데 덜컹 티 파티 참석 통보를 받으니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영애는 답장을 쥐고 그대로 어머니인 백작 부인에게 달려갔다.
“라인하르트 공작 부인께서 오늘 오후에 열릴 티 파티에 오신다고 하셨단 말이냐?”
“네, 조금 전 늦게 답해서 미안하다며 공작가에서 선물과 답장을 가지고 왔어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공작 부인께서 제 티 파티에 참석하신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음식이랑 차를 좀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꿔야 할까요?”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벌써 꾸깃꾸깃해지기 시작한 편지를 건네주며 쉬지 않고 말했다.
“테이블클로스도 좀 화려한 것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니, 부인께서 제 파티에 오신다니 너무 떨려요. 혹시 저에게 뭔가 나쁜 감정을 가지고 오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녀는 온 방을 빙빙 돌며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그만 앉으렴. 너는 어미가 그렇게 교육을 했는데도 그 호들갑스러운 성격은 고치질 못하는구나. 쯧.”
스테판 부인은 수많은 영애들의 예절 교육을 맡아 훌륭한 예절 선생님이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정작 제 딸만은 만족스럽게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호통을 치고 나서야 마리아가 흥분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공작 부인께서 왜 이런 작은 티 파티에 참석하신다는 걸까? 마리아, 참가한다고 답장을 보낸 사람들이 어떻게 되니?”
백작 부인의 질문에 마리아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대답했다.
“먼저 저랑 친한 쥴리와 글라디스가 있고요. 피에트 백작 부인과 스팅어 남작 부인, 플루인 백작 부인 이렇게 다섯 분이 답장을 보내 주셨어요.”
“그래, 쥴리와 글라디스는 얌전한 영애들이고, 다른 부인들도 딱히 공작 부인과 관계가 있는 분은 안 계신 것 같은데…….”
소규모 파티일수록 인간관계를 고려해서 초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 주최자의 역할이었다. 거기다 아직 예의범절에 서툰 성녀를 초대하는 자리였기에 젊고 온건한 아가씨와 부인들을 골라 초대장을 보냈었다.
마리아와 그 친구들은 공작 부인이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부인들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 백작 부인의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한 명 떠올랐다.
“아…….”
“왜 그러세요. 어머니?”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소문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니다. 마리아. 공작 부인께서 오시는 것은 아마 너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집사에게 가 차와 다과에 좀 더 신경 쓰라는 말이나 전하렴.”
“정말이죠? 그럼 전 어머니만 믿어요.”
철없는 딸을 내몰듯이 밖으로 쫓아낸 백작 부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혹여 그 소문이 사실이라 공작 부인이 성녀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거라면, 생각한 것보다 커다란 사건이 제집에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자신이 예절을 가르친 성녀가 부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백작 부인의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다. 내가 너를 어찌 도울지 이제부터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구나. 그럼 네 호위 기사로 엘과 마티를 내일부터 보내고 그편에 연락을 주고받으면 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몸이 상할까 염려되는구나.”
“감사해요. 그래도 백부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약 저 혼자라면 아무것도 못 했을지도 몰라요.”
일어나 나가려는 백작과 포옹하며 로젤리아가 말했다.
15년 전 어머니를 잃고, 5년 전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후 형제 하나 없는 로젤리아에게는 백작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이었다.
믿었던 남편에게도 배신당했기에 혹시 백작에게마저 거부당할까 두려웠던 마음을 그제야 털어 낼 수 있었다.
감사를 표현하는 로젤리아를 꽉 안아 주며 백작은 목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켰다.
“아니다. 내가 널 더 잘 돌봐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이런 나쁜 일이 생겼지만, 같이 힘내서 헤쳐 나가 보자꾸나. 너는 네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렴. 이 라인하르트 공작가는 결코 알렉스 그 개자식이 아닌 네 편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려무나.”
“감사해요.”
“됐다. 그런 말은. 그럼 나는 원로들을 만나러 가 봐야 하겠구나. 속상해도 식사는 꼭 챙겨 먹는 것 잊지 말고.”
“네. 그럴게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로젤리아의 대답에 백작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을 벗어났다.
집무실을 나와 공작가를 벗어나는 백작의 두 주먹은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행동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로젤리아를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공작가에서 제 자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가문 회의까지는 시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백작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나간 후, 로젤리아는 집사를 불러 제 앞으로 온 초대장을 가져오게 했다. 여러 귀족이 보낸 각종 초대장 중 몇 장을 골라 집사에게 건넸다.
“이 모임에 참가자가 어떻게 되는지 좀 알아봐 줘요. 특히 성녀가 참가하는 모임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세요. 하지만 알아본다는 티는 최대한 내지 말도록 하고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군말 없이 로젤리아가 건넨 초대장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로젤리아는 석양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때라 해가 지는 모습을 쓸쓸한 눈빛으로 한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로젤리아가 이른 시간부터 서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을 때 거친 노크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로즈!”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집무실 안으로 뛰다시피 들어왔다.
“엘 오빠, 마티 오빠.”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들은 게 사실이야?”
쌍둥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은 사촌인 엘리어스 J 루인과 마티어스 E 루인이었다.
“일단 좀 앉아 봐.”
주황빛에 가까운 붉은 금발을 지닌 형제는 차분한 로젤리아를 보고 나서도 씩씩거리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일단 앉아야 이야기를 나눌 거 아니야.”
로젤리아가 두 남자를 겨우 진정시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젤리아가 들어오라고 답하자 집사가 들어왔다.
“어제 주신 초대장 중 성녀가 참가하는 곳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테판 백작가의 마리아 영애가 개최하는 티 파티에 성녀가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다른 참가자는요?”
“마리아 영애와 친하게 지내는 백작가와 남작가의 미혼 영애들이 서너 명 되고, 나머지는 젊은 부인들을 주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영애의 어머니인 스테판 백작 부인과 고모인 러셀 후작 부인을 합해도 열 명이 넘지 않는 소규모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로젤리아는 마리아 영애와 스테판 백작 부인이 성녀와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 헤아려 봤다.
“백작 부인이 아마 성녀의 예절 교육을 담당했나 보군요.”
“네, 맞습니다. 기본 교육은 마쳤는지 가벼운 티 파티에 성녀를 선보이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성녀가 아직 확실하게 사교계에 데뷔하진 않았죠. 좋아요. 마리아 영애에게 답장을 보내 주세요. 저도 티 파티에 참가하겠다고요. 파티 날짜는 언제인가요?”
“오늘 오후입니다.”
“그럼 티 파티에 어울릴 만한 선물도 같이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
집사가 나가자마자 로젤리아에게 뜨거운 두 쌍의 시선이 내려 꽂혔다.
“로즈,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야?”
“성녀라면 알렉스가 바람난 그 여자 아냐?”
“맞아.”
“우리가 그 여자를 어떻게 해 줄까?”
“말만 하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기사복을 입은 채 이를 부득부득 가는 두 형제를 보며 로젤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일단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번은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기 전에 성녀라는 그 여자를 먼저 만나 봐야겠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알겠다.”
“하지만 혼자 가는 것은 안 돼. 오늘부터 우리가 네 호위로 소속을 변경해 두었으니 어디를 가든 함께 가야 해. 아버지께서 만약의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니 이것만은 꼭 지키라고 하셨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알겠어. 앞으로 잘 부탁할게.”
“물론이지.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에게 말해 줘.”
“그래. 성녀인가 하는 여자나 알렉스도 네가 말만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마.”
진지한 얼굴의 엘리어스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질 나쁜 미소를 짓는 마티어스를 보며 로젤리아가 애써 미소를 만들어 냈다.
“고마워. 명심할게. 그럼 우선 성녀를 만나러 가요.”
* * *
마리아 스테판은 아침 일찍 공작가에서 보낸 답장을 받고는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적대적이지 않은 가문 중 고위 귀족 가문에 형식상 보낸 초대장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참가하겠다는 답장이 왔으니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라인하르트 공작 부인은 스물세 살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품 있는 귀부인이었다.
타오르는 불꽃같이 환한 붉은 머리카락과 고귀한 품종의 고양잇과 맹수 같은 황금색 눈은 그녀를 더 위엄 있어 보이게 했다. 우유같이 하얗고 고운 피부 또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거기다 작년까지 어린 황태자 전하를 3년이나 돌본 보답으로, 여성으로서 받기 어려운 명예 백작의 작위를 황실로부터 수여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공작 부인은 어린 나이지만 사교계에서 뼈가 굵은 노회한 부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아 같은 어린 영애는 당연히 쉽게 말조차 걸 수 없는 분이었다. 인연이라면 파티장에서 겨우 인사를 몇 번 건넨 것이 다인데 덜컹 티 파티 참석 통보를 받으니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영애는 답장을 쥐고 그대로 어머니인 백작 부인에게 달려갔다.
“라인하르트 공작 부인께서 오늘 오후에 열릴 티 파티에 오신다고 하셨단 말이냐?”
“네, 조금 전 늦게 답해서 미안하다며 공작가에서 선물과 답장을 가지고 왔어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공작 부인께서 제 티 파티에 참석하신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음식이랑 차를 좀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꿔야 할까요?”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벌써 꾸깃꾸깃해지기 시작한 편지를 건네주며 쉬지 않고 말했다.
“테이블클로스도 좀 화려한 것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니, 부인께서 제 파티에 오신다니 너무 떨려요. 혹시 저에게 뭔가 나쁜 감정을 가지고 오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녀는 온 방을 빙빙 돌며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그만 앉으렴. 너는 어미가 그렇게 교육을 했는데도 그 호들갑스러운 성격은 고치질 못하는구나. 쯧.”
스테판 부인은 수많은 영애들의 예절 교육을 맡아 훌륭한 예절 선생님이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정작 제 딸만은 만족스럽게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호통을 치고 나서야 마리아가 흥분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공작 부인께서 왜 이런 작은 티 파티에 참석하신다는 걸까? 마리아, 참가한다고 답장을 보낸 사람들이 어떻게 되니?”
백작 부인의 질문에 마리아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대답했다.
“먼저 저랑 친한 쥴리와 글라디스가 있고요. 피에트 백작 부인과 스팅어 남작 부인, 플루인 백작 부인 이렇게 다섯 분이 답장을 보내 주셨어요.”
“그래, 쥴리와 글라디스는 얌전한 영애들이고, 다른 부인들도 딱히 공작 부인과 관계가 있는 분은 안 계신 것 같은데…….”
소규모 파티일수록 인간관계를 고려해서 초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 주최자의 역할이었다. 거기다 아직 예의범절에 서툰 성녀를 초대하는 자리였기에 젊고 온건한 아가씨와 부인들을 골라 초대장을 보냈었다.
마리아와 그 친구들은 공작 부인이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부인들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 백작 부인의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한 명 떠올랐다.
“아…….”
“왜 그러세요. 어머니?”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소문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니다. 마리아. 공작 부인께서 오시는 것은 아마 너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집사에게 가 차와 다과에 좀 더 신경 쓰라는 말이나 전하렴.”
“정말이죠? 그럼 전 어머니만 믿어요.”
철없는 딸을 내몰듯이 밖으로 쫓아낸 백작 부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혹여 그 소문이 사실이라 공작 부인이 성녀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거라면, 생각한 것보다 커다란 사건이 제집에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자신이 예절을 가르친 성녀가 부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백작 부인의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