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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녀는 찻주전자를 들어 심신 안정과 기력 회복에 도움을 주기로 유명한 차를 조심스럽게 따라 로젤리아의 앞에 놓았다.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로젤리아는 그제야 울렁거리는 가슴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동안 집 안이 좀 시끄러워질 거야. 그러니 아랫사람들 단속 좀 잘해 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군요?”

“……그래. 이유는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일단은 그만큼만 알고 있어 줘.”

로젤리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마거릿은 더는 묻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없이 따스한 손길로 위로를 전하는 중 집사가 백작의 도착을 알렸다.

그녀가 손님을 맞으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때맞춰 문이 열리고 풍채 좋은 중년 남성이 집무실 안으로 급하게 들어섰다.

“공작 부인, 부르셨습니까? 급하게 저를 찾으셨다는데 무슨 일입니까?”

“엔 백부님…….”

“네가 급하게 찾는다 해서 하던 일도 다 제쳐 놓고 달려왔단다.”

조카인 로젤리아의 부름에 루인 백작이 깜짝 놀랐다.

로젤리아는 어릴 때와 달리 결혼 후에는 공작 부인으로서 완벽하게 처신하겠다며 꼬박꼬박 루인 백작님이라 부르며 조금이라도 흠이 잡힐까 절대 어린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 조카가 지금 어미 잃은 아이 같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로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어서 말을 해 보아라.”

놀란 루인 백작이 서둘러 로젤리아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부님 일단 앉으세요.”

“알았다. 그런데 왜 이리 안색이 좋질 않아. 집사에게 한마디 해야겠구나. 안주인 얼굴이 이리될 때까지 무엇 하고 있었다느냐?”

“이건 집사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긴, 집사뿐만 아니라 내가 공작에게도 말을 해야겠다. 무슨 일이 그리 많다고 안사람 건강하나 제대로 챙기질 못하누.”

백작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당장 공작을 찾아 나설 듯 몸을 들썩거리자 로젤리아가 그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백부님. 제가 드릴 말이 바로 알렉스, 공작에 관한 이야기예요.”

“공작에 관해서?”

“네…….”

루인 백작은 전대 라인하르트 공작의 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공작가는 루인 백작이 이어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떠돌기를 좋아했고 골수부터 무인의 기질이 넘쳤다. 일찌감치 조용하고 명석한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와 작위를 넘기고 이제껏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왔었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서 다시 가문에 돌아오긴 했으나 여전히 권력욕이나 가문에 대한 애착이 큰 인사가 아니었기에 건강이 나빠진 전 공작이 제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한 부탁도 거절했다.

받을 수 있었던 후작 자리도 귀찮다며 그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백작이라는 작위 하나를 겨우 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애초에 가문을 버리고 밖으로 떠돈 자신이 공작가를 잇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 말하며, 차라리 전 공작의 딸인 로젤리아에게 데릴사위를 들여 공작가를 잇게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 전 공작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현 공작인 알렉스였다.

그는 전 공작 밑에서 열여덟 살이 되는 해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무 살부터는 공작의 부관으로서 쭉 일해 온 발렌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알렉스는 전 공작과 비슷한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영리한 남자였다.

그는 백작가의 차남이라 공작가에 입적되어도 문제가 없다며 공작이 로젤리아의 신랑감으로 내세웠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혼인은 공작의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로젤리아도 정든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결혼을 담담히 받아들였었다. 그 이후로 큰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을 보고 백작은 그것을 늘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알렉스의 이름을 꺼내는 로젤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뒷골이 섬뜩하게 당겨 왔다.

“백부님, 알렉스가 저 말고 다른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겠다고 선언했어요.”

“뭐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로젤리아가 힘겹게 꺼낸 말에 백작이 놀라 되물었다.

“백부님도 들어 보셨을 거예요. 얼마 전 황궁에 내려온 성녀를……. 알렉스가 그 여자를 후처로 들이겠다고 하더군요.”

“허, 누구 마음대로 공작가에 다른 여자를 들인단 말이냐?”

화가 나다 못해 기가 찬 백작의 음성을 듣고는 로젤리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제가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했지만 결국 뜻을 꺾지 않더군요. 그런데다 곧 정례 회의가 열릴 때 직접 안건을 올리겠다고, 원로회도 다 자기를 따를 거라 자신하더군요.”

“그 말에 따를 원로가 어디 있다고! 그놈이 미친 게 분명하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당장 그놈한테 따져야겠다!”

흥분한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젤리아가 매달려 겨우 그를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무슨 소리냐! 당연히 찾아가 따지고 화를 내야지.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네 사촌 오라비들도 다 불러서 이놈을 끌어내 혼쭐을 내야겠다.”

“그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로즈, 넌 화가 나지도 않느냐?”

멧돼지처럼 펄펄 뛰는 백작이 가슴을 치며 로젤리아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화가 나요!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백부께서 그러시지 않아도 제가 더 미칠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로젤리아의 눈물에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백작이 애써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화를 낸다 해도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저는 이번 일을 이대로 참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나부터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제까짓 게 뭐라고 공작가에서 후처를 들인다는 말이냐! 고위 귀족이란 놈이 어찌 그런 품위 없는 짓을 해.”

백작이 로젤리아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로즈, 걱정하지 마라. 그런 말이 회의에 나와도 내가 절대 통과되지 못하게 할 터이니. 아무 걱정할 것 없어.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

백작은 자신이 그동안 가문의 일에 소홀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제가 나서면 혹시 로젤리아의 입지가 좁아질까 가만히 있던 것이 독이 되어, 현 공작이 이런 배은망덕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요. 만약 그이가 그 안건을 들고 나온다면 일단 가만히 계세요. 다른 원로들께도 미리 전언을 보내 안건은 그대로 통과시키라고 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로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정말 그 여자를 공작가에 들이겠다고?”

로젤리아는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쓸어 내며 놀란 백작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 여자가 공작가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백부님. 그 전에 한 가지 허락받을 일이 있어요.”

“허락? 말만 하려무나. 지금은 내가 네 부모나 마찬가지 아니냐.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도와주마. 네 아비가 죽기 전 그 앞에서 맹세했단다. 네 아비의 빈자리는 내가 꼭 채워 주겠다고.”

“백부님…….”

백작의 다정한 말에 로젤리아는 제 결심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려워할 것 없다. 무엇이 필요하니?”

“저는…… 알렉스와 이혼하고 싶어요. 이제 더는 그를 제 집에서 보고 싶지 않아요.”

로젤리아가 꺼낸 이혼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머뭇거린 백작이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것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조건 도울 거란다. 하지만 이혼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터인데 괜찮겠느냐? 황실에 이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귀족원의 재판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네가 겪을 고생이 걱정이구나.”

“아마 귀족원까지 갈 일은 없을 거예요. 황실에서 제 이혼 신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백부님에게 부탁할 일 중 첫 번째가 아까 말했듯이 원로들을 설득해 정례 회의 때 알렉스가 제시한 안건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거예요.”

로젤리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식을 올리는 날짜는 무조건 세 달 이후로 잡으셔야 해요. 날짜는 꼭 회의에서 정해서 제대로 기록에 남겨 주셔야 해요.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신전에 보관된 결혼 계약서를 찾아다 주시는 일이에요.”

“결혼 계약서 말이냐? 그런 것이 있었어? 그런데 그것을 왜 신전에 보관해 놓았느냐?”

로젤리아는 궁금해하는 백작을 붙잡고 제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께서 작성해 놓으신 계약서가 따로 있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혹여 알렉스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을까 봐 결혼 전에 미리 계약서를 써서 황실과 신전의 인증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계약서가 분명히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것이 있었어?”

“네, 알렉스는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황궁 법무관을 통해서 서류를 보내 사인한 적이 있어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서류는 신전에 보관하고 있을 거라 했으니, 여기 제 직인을 가지고 가서 그 계약서의 내용을 좀 살펴봐 주세요.”

“내가 말이냐?”

“네, 제 집무실이나 공작가에 두기는 불안하니 백부님께서 찾아 보관해 주시고 제게 한 번 보여 주시기만 하세요.”

“알았다.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엘리어스와 마티어스를 네게 붙여 주마.”

“사촌 오빠들이요?”

“그래, 내가 네 곁에 있는 것보다 겉보기도 그렇고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도 그놈들을 통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거기다 네가 의지할 수도 있고, 급할 경우 그놈들이 곁에 있다면 나도 훨씬 안심이 될 것 같으니 사양은 하지 말거라.”

로젤리아는 백작의 아들인 두 사람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는 편이 맘이 놓이시겠죠? 엘 오빠과 마티 오빠가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두 놈이야 서로 가려고 나설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가문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고 어릴 때부터 그리 싸고돌던 놈들이 아니더냐?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그놈들이 펄펄 뛸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백작의 너스레에 그제야 로젤리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너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만 하려무나.”

“아니에요. 이 일은 제 일인걸요. 그저 뒤에 숨어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제 손으로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했는지 알려 줄 거예요.”